내 퇴폐적 도락 중에 술과 담배보다 오래된 것이 바둑이다. 초딩 때 맛을 들였으니 60년 가까운 棋歷이다.
'퇴폐적'이라 함은 생산성이 별로 없는 향락이란 뜻이다. 인생에 확고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믿던 젊을 때는 한편으로 즐기면서도 한편으로 죄의식을 느껴야 했다. 소명이 어디 있는지 아직 확실치 않은 동안에나 즐길 것으로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나이 들면서 차츰 뻔뻔해졌다. 인생의 목적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말고 따로 뭐 있겠는가 하는 딜레탕티즘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공부도 좋아서 하는 거고 술, 담배, 바둑도 다 좋아서 하는 건데 차별할 게 뭐 있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편하게 먹다 보니 도락이란 것도 그냥 퇴폐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 뭔가 얻는 바가 있다는 쪽으로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바둑이 특히 그랬다. 예상할 수 있는 변화와 예상할 수 없는 변화 속에 침잠하는 가운데 뭔가 지적 연마가 이뤄지는 것 같았다.
바둑에서 지적 연마의 측면을 눈여겨 보면서 통용되는 규칙을 좀 바꾸면 이 측면을 더 강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리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談棋'라는 대국방식을 고안해 봤다. 바둑 두면서 입 많이 놀리는 것을 흔히 나쁜 매너로 본다. 그런데 '手談'에 '口談'을 곁들이면 재미도 더 있고 내용도 더 풍성해질 수 있지 않을까?
대화를 권장하는 방안으로 '무르기'의 양성화를 생각해 봤다. '一手不退'는 바둑의 대원칙으로 통한다. 이것이 현실의 불가역성을 강조하는 관점으로 생각되었다. '불가역성'이란 말이 최근 한-일 정부 간 합의 때문에 각광받고 있는데, 현실에는 가역적 측면과 불가역적 측면이 뒤얽혀 있는 것 아닌가. 이번 정부 간 합의가 문제되는 것도 무엇보다 불가역성이 성립할 수 없는 영역에 불가역성을 선언한 데 있지 않은가.
제한된 조건 내에서 무르기를 허용하는 것이 현실의 가변성을 더 넓게 수용함으로써 지적 연마의 효과를 늘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착점을 보고 앞서 내 생각의 허점을 깨달을 때, 그 직전에 뒀던 수를 무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앞에서부터, 여러 수를 무르게 한다면 게임의 긴장감이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딱 한 수만 무르게 하면 불가역성의 영역과 가역성의 영역이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20여 년 전 가까운 바둑친구들과 모임 이름을 걸자는 의논이 나왔을 때 내가 제안한 '동네바둑'이 채택되어 아직까지 간판을 지키고 있다. 바둑 둘 때 구경꾼들의 참견과 훈수가 심해서 짜증날 때 "이거 동네바둑 돼버렸네!" 투덜대곤 한다. 우리 사이에 그런 거 짜증내지 말고 서로 참견과 훈수를 스스럼없이 하면서 지내자는 뜻에서 제안한 건데, 그 역(逆) 발상이 재밌다고 낄낄거리며 찬동들 해줬다.
블로그를 만들고 보니 훈수 얻기 좋아하는 내 취향이 여기서도 나타난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있는 일에 관한 생각을 설익은 채로라도 올려놓고 누가 훈수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욕심만큼 활발한 반응이 없는 것은 우리 사회의 '내 생각' 밝히기 어려워하는 풍토 때문일 것이다. 주변사람들 중에도 만나서 얘기하면 좋은 의견 주는 사람이 블로그에는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글로 자기 생각 남기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 그래도 많지는 않으나마 의견 남겨주는 분들이 있어서 고마운 마음이다.
그런데 훈수 얻기에 아주 발 벗고 나서게 된 것이 이번 소설 구상이다. 다른 과제들은 내가 전문가로서 주체적 역량을 가진 것이라서 얻고자 하는 훈수가 부수적인 범위였는데, 소설이란 건 밑바닥부터 기어오르는 길이다. 뭔가를 이뤄낼 만한 기본 밑천은 있는 것 같지만 목표에 이르는 길은 깜깜하다. 이웃들의 도움을 얻어 '소설'이라 할 만한 것을 끝내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건 '동네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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