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8일부로 카터(1924~ ) 전 미국 대통령이 한 가지 기록을 깨뜨린 것이 있다. 퇴임 미국 대통령으로서 31년 7개월 16일을 채움으로써 1964년 10월 20일 사망한 허버트 후버(1874~1964)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긴 퇴임 기간의 내용이 충실하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닮았다. 재임 중 인기가 폭락했다가 퇴임 후 되살아난 카터를 “미국 최고의 전임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후버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대공황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쫓겨나듯 백악관을 떠난 그가 트루먼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걸쳐 행정개혁위원회(후버위원회)를 이끈 업적이 높은 평가를 받고 그가 쓴 윌슨 대통령의 전기 <The Ordeal of Woodrow Wilson>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카터의 퇴임 후 활동을 상징하는 것이 2002년의 노벨평화상이다. 오바마가 2009년 받으면서 “미국 대통령이면 아무나 받는 건가?” 권위가 떨어져 버렸지만, 카터에 앞서 이 상을 받은 미국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우드로 윌슨 둘뿐이었다. 카터의 수상이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퇴임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받았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세 사람은 재임 중에 받았다. 카터의 수상은 역대 평화상 중 가장 충실한 내용을 갖춘 것의 하나로, 그의 수상이 노벨평화상의 권위를 높여주었다는 말까지 듣는다.
주 상원의원과 주지사 경력밖에 없던 지방정치인 카터가 1976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워터게이트사건에 따른 미국민의 ‘새 정치’ 열망 덕분이었다. 그런 배경 위에서 대통령 재임 중 카터는 교육과 에너지정책의 전면 개혁과 파나마운하 반환, 주한미군 철수 등 ‘미국의 숙제’를 푸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엄청난 역풍을 맞았다. 1979년이 카터에게는(미국에게도) 끔찍한 해였다. 1월의 이란 무슬림혁명으로 인한 에너지위기 속에서 3월에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가 터졌다. 이란혁명이 11월 대사관 인질사태로 번져 나간 데 이어 12월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시작되었다. 참신성에 대한 기대감이 관리능력에 대한 실망으로 돌아서면서 ‘레이건 시대’의 문이 열리게 된다.
퇴임 후 카터센터를 통한 카터의 인권-평화 노력은 네오콘과 신자유주의가 미국을 지배하는 동안 미국의 ‘양심의 횃불’ 노릇을 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탄압과 가자 공격을 앞장서서 비판하고 있다. 질병 퇴치와 주거환경 개선에서 국제분쟁 조정에 이르는 카터의 광범위한 활동의 중요한 성과 한 가지가 1994년의 ‘북핵위기’ 해결이었다.
두 가지 인연이 1994년 카터의 북한문제 개입을 도와주었다. 6월 15일 평양 도착 후 제일 먼저 만난 김영남 외교부장이 “우린 그때부터 각하가 좋았더랬습니다.” 하며 호감을 표했다고 한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271쪽) 카터가 대통령 재임시 추진한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가리킨 말이다. 미국 정치인 중 북한 지도부의 가장 큰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카터였다. 김일성은 여러 해 전부터 카터의 평양 방문을 청하고 있었고, 카터도 1993년부터 평양 방문의 뜻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공교로운 또 하나의 인연은 당시 주한대사 레이니를 통한 것이었다. 신학자로서 에모리대학 총장을 오래 지낸 레이니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한국과 깊고 넓은 인연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레이니는 총장 시절인 1982년 카터센터를 에모리대학에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카터와 개인적 친분을 맺고 있었다. 카터가 평양으로 향하게 된 경위를 위트-폰먼-갈루치는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는 한반도, 핵무기, 그리고 개인차원의 외교 등에 모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대통령 재임 시에 거의 독단적으로 주한미군의 철수에 나섰다가 결국은 포기해야만 했다. 또 1978년 개인외교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화해에 성공한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 이후에는 김일성과 박정희와의 3자회담을 비무장지대에서 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그 제안으로 인해 정부에서는 그야말로 거의 난리가 났었다. 그러나 핵기술에 관한 한 그는 거의 전문가였다. 그 스스로 원자력공학을 전공했었고 미국 해군의 원자력화에 성공한 신화적인 하이먼 릭오버 제독 휘하에서 잠수함병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핵이라면 치를 떨었다.
카터 대통령이 임기 중과 퇴임 후에 한 여러 가지 활동은 북한과 코드가 맞았다. 김일성은 그를 ‘의인’이라고 부르며 카터 행정부 초기 여러 경로를 통해 그와 접촉하려고 노력했었다. 1981년 초 카터 대통령이 퇴임하고 국제분쟁의 해결사로 나서자 이후 북한은 해마다 카터센터에 초청장을 보냈다. 첫 번째 초청장이 왔을 때 부시 행정부는 그를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그 다음 해에는 그의 보좌관만 갔다. 1993년 2월 카터는 또 다시 초청장을 받았지만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핵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 이후에도 북한은 세 번씩이나 초청을 거듭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1994년 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는 카터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뭔가 해야만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그 해 5월 짐 레이니 주한 미대사가 샘 넌 의원과 리처드 루가 의원의 방북을 주선한 후 아틀란타로 날아왔다. 카터센터가 위치한 에모리대학교의 총장을 지내기도 한 레이니 대사는 카터 전 대통령의 오랜 친구였다. 그는 카터 전 대통령을 만나 일역을 맡으라고 촉구했다. (...) 카터의 주목을 특히 끈 것은 “이 위기를 진정시켜 제2의 한국전쟁을 막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김일성과 직접 통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레이니 대사의 회동 후 6월 1일 카터 전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여 우려를 표명했다. 곧 갈루치가 전 대통령에게 브리핑을 하러 날아갔다. (<북핵위기의 전말> 246쪽)
카터의 평양 방문은 ‘개인 자격’이었다. 미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공식 위임을 받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입장이 클린턴 행정부와 다른 것인지 여부가 언론의 관심을 모았다. 카터는 김일성과의 회담이 끝난 후 정부를 대표해 그에게 브리핑을 해줬던 갈루치에게 전화해서 회담 내용을 간략하게 얘기해준 다음 바로 CNN과 인터뷰할 것이라고 알렸다. 정부 입장을 듣지 않고 바로 방송으로 자기 생각을 발표한 것이었다.
[주한미군 증강 방침을 의논하는 외교-국방 장관급] 회의는 이미 한 시간 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때 대통령의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 평양에서 카터 전 대통령이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의자를 뒤로 밀 때 비서가 얼른 카터가 통화를 원하는 것은 갈루치라고 말했다. 갈루치는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수화기를 드는 순간 갈루치는 카터의 독특한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카터는 김일성이 사찰단의 잔류를 허용할 의향이 있다고 하면서 대신 대화를 재개하고 제재를 철회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옆방에 모여 있다고 전하면서 갈루치는 대답했다. “저의 생각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카터는 대통령이 결정을 내리면 자신에게 전화해서 알려달라고 했다. 갈루치는 워싱턴에서 평양으로 전화를 할 방법이 없으므로 다시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근 20분에 달한 통화가 끝날 무렵 카터는 갑자기 생각난 것과 같은 말투로 곧 CNN에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통화가 끝난 후 갈루치는 회의실로 돌아와 통화내용을 애써 정확히 전달했다. 가장 먼저 나온 질문은 그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안보보좌관 토니 레이크가 먼저 물었다. “자네, CNN에 나가지 말라고 말했겠지, 아닌가?” 아니라고 갈루치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렇게 말했어도 들을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변명하듯 말했다. 갈루치 옆에 앉아 있던 크리스토퍼가 다시 물었다. “좌우간 하지 말라고 말이나 했나?” 갈루치는 다시 아니라고 대답했다. 싸늘한 침묵이 흘렀고 갈루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
[잠시 후 연 기자회견 말미에] 대통령이 자리를 뜬 후 갈루치가 세부사항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갈루치는 극도로 말조심을 했다. “카터 대통령이 받은, 북한이 북한과 국제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대해 건설적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는 조짐”을 환영한다고 했다. 첫 질문은 뒤쪽 멀찌감치에서 나왔다. “당신은 카터 대통령이 CNN에 나가 자신이 한 거래를 설명하는 것을 말리려고 하지 않았나요?” 잠시 망설인 끝에 갈루치는 그러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 간단한, 그러나 사실인 대답에 따라 카터와 클린턴 사이에 불화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잠시나마 진정되었다. 갈루치의 실수가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북핵위기의 전말> 278-281쪽)
카터가 평양에 있는 동안 미국 행정부와 전직 대통령 사이는 불편한 것으로 보였다.
한국 측을 어느 정도 안심시킨 후 백악관이 할 일은 카터를 통제하는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카터의 기자회견에 대한 백악관의 반응을 설명하고 카터로 하여금 더 이상 미국정부의 정책과 어긋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하도록 했다. 전직 대통령에게 그 정도의 말을 하려면 갈루치 정도로는 부족했다. 안보보좌관인 토니 레이크가 적격이었다.
평양에 미처 새벽이 오기 전에 카터와의 전화가 연결되었다. 카터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미국정부의 입장에 대한 레이크의 설명을 듣고 나서 강하게 반발했다. 북한에게 연료봉의 재장전과 사용 후 연료봉의 재처리를 하지 말라는 것은 씨도 먹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게다가 김일성과 강석주에게 재처리는 NPT체제에서 허용된다고 벌써 말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취소하느냐고 했다. 그리고 제재를 계속 추진하는 것도 반대했다. 북한이 도청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 이 통화는 매우 냉랭하게 진행됐다. 통화가 끝난 후 카터는 크게 낙담한 표정이었다. (<북핵위기의 전말> 283쪽)
카터의 전화가 왔을 때의 회의장 모습을 오버도퍼도 적대적인 분위기로 그렸다.
갈루치의 전갈이 전해지자 각료실은 폭탄을 맞은 듯 발칵 뒤집혔다. 사찰단의 체류 허용을 빼면 사실 카터가 거둔 성과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카터 전 대통령의 CNN 즉석 회견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자아냈다. 1년 이상을 끌어온 문제에 관해 중대한 결정을 내리려는 와중 그런 소식은 행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중 한 참석자는 카터의 처신을 ‘매국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제재와 병력 증강의 ‘방아쇠를 막 당기려는 순간’ 북한이 들고 나온 지연전술일지도 모른다고 우려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클린턴과 고어 부통령은 덮어놓고 카터를 비난하기보다는 실질적 대응책을 모색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두 개의 한국> 483쪽)
이 문제에 계속 관여해 온 퀴노네스도 비슷한 분위기로 파악했다.
처음에 워싱턴 관리들은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과 성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전에 그랬던 그대로 외교정책을 담당하는 중요한 관리들(국가안보회의의 토니 레이크, 샌디 버거, 댄 폰먼, 국무부의 보브타노프 차관, 보브 갈루치 차관보)은 떨떠름해하며 회의감을 표했고, 세부사항을 놓고 왈가왈부했다. 1993년 8월 이후 그들이 추구해 온 것(핵동결, 남북회담)이 달성됐는데도 관리들은 이를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반도 운명> ?쪽)
인용한 세 권의 책 모두 당시 미국 관리들의 반응을 면밀하게 관찰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카터의 방북에 기대를 걸기보다 불안한 마음으로 마지못해 허용했다는 점, 미국 정부와 카터 사이의 연결을 갈루치 한 사람만이 맡았다는 점, 김일성과의 회담 후 카터가 전화로 알려준 내용을 정부 관리들이 반가워하지 않았다는 점, 카터의 일방적인 CNN 회견에 관리들이 분노하거나 당황했다는 점 등이 공통된 내용이다.
정황으로 볼 때 이런 모습이 모든 사실을 담은 것인지 의심이 든다. 카터와 클린턴 사이에 국무부 차관보 갈루치 외의 다른 교감 통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카터의 역할로 인해 미국의 대북정책에 획기적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럴 가능성을 정부 수뇌부가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다가 카터의 일방적 발표에 떠밀려 그런 정책 전환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김일성의 태도에 따라 그런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예비 시나리오’ 정도는 마련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추측일 것이다. 감정을 억제하고 현실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클린턴 대통령과 고어 부통령의 의견에 따라 카터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시늉이라도 하게 되었다는 오버도퍼의 설명이 이 추측에 부합한다.
이런 예비 시나리오가 있었을 경우 있는 그대로 밝히기 어려운 사정이 여러 가지 있었다. 첫째, 남한의 김영삼 정권이 순순히 받아들였겠는가. 북한과의 ‘포괄적 협상’에 반대하기 위해 1993년 11월 정상회담에서 외교 관행을 벗어나는 ‘행패’를 벌인 김영삼이 북한을 이렇게 쉽게 풀어주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카터가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큼직한 선물을 만들어줬기 때문에 김영삼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런 선물을 확보해 놓기 전에 북한과의 협상 가능성을 알려줬다면 김영삼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상상해 보라.
둘째, 대북정책의 전환은 일관성 결여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제1차 ‘북핵위기’는 북한이 피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는데도 미국이 마구잡이로 몰아붙여 조성한 것인데, 막상 파국이 시야에 들어오자 전쟁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더구나 중간선거가 닥쳐 있었다. 선거를 앞두고 유화책으로 돌아선다는 것은 미국에서 엄청난 정치적 손해다. 카터를 앞세워 어쩔 수 없이 정책을 바꾸는 것처럼 눈가림이라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클린턴의 민주당은 중간선거에서 참패를 겪게 되는데, 나약한 대외정책이 주요 패인의 하나로 꼽혔다.
카터와 클린턴 사이에 모종의 ‘짬짬이’가 있었다는 추측을 확인할 만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향후 진행을 살핌에 있어서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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