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생의 셀리그 해리슨은 워싱턴포스트 도쿄지국장으로 있던 1972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인터뷰하면서 북한 사정에 가장 정통한 서방 언론인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그 후 언론계를 떠나 국제관계 연구에 나서면서 최고급 북한 전문가가 되었다. 1994년 6월 사망 한 달 전의 김일성과의 세 시간에 걸친 면담으로 그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미국 지식인으로서 현실적 존재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해리슨의 논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역할이 북한의 대변인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북한에 대한 그의 지식과 이해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후자의 의견을 가진 사람이지만, 설령 그가 “북한의 대변인”이라 하더라도 그것 역시 매우 소중한 역할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북한의 대변인’이 너무 적다는 사실 때문에 불필요한 어려움과 위험을 얼마나 많이 겪어 왔는가.

 

해리슨의 논설 중 ‘북한붕괴론’의 반박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본다. 소련 해체와 동구권 붕괴 이래 북한붕괴론이 끈질기게 떠돌면서 여러 나라의 정책결정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대결정책에 치우치게 한 영향뿐만 아니라 포용정책에도 많은 편향성을 일으켰다. 근년 들어 미국의 관계,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많이 퇴조했지만, 한국의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는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북한붕괴론의 ‘확인사살’이 필요하다고 나는 본다. 미국에서 북한붕괴론이 잦아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두 차례 지도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큰 동요가 없다는 사실을 통해 체제의 안정성이 확인된 것이고, 또 하나는 북한 사정에 관한 정보 공급이 (아직도 아주 원활하지는 않지만) 그 동안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정권이 북한붕괴론에 집착하는 것은 정권의 수구성 때문이다. 남한 정책의 수구성이 남북관계의 발전을 가로막고 한반도 평화에 불필요한 위험을 가져오는 것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고 요즘도 있는 일이다. 정책의 수구성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과제의 하나가 북한붕괴론의 청산이다.

 

북한붕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출발점으로 해리슨이 2002년 낸 <코리안 엔드게임>(이홍동 외 옮김, 삼인 펴냄)을 살펴본다. 북한붕괴론이 성행하던 1990년대의 여건 속에서 해리슨이 이에 반대한 논거가 어떤 것이었는지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논거의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 후의 변화된 여건 속에서 북한붕괴론의 붕괴를 당연한 일로 볼 수 있다.

 

해리슨은 책의 앞머리에서 북한붕괴론의 존재를 지적하고 그에 대한 자기 의견을 요약해서 내놓았다.

 

북한이 붕괴할 것인가-그리고 미국이 그 붕괴를 촉진시켜야 할 것인가-에 관한 논란은 줄곧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 결정을 마비시켜 왔다. 이 논란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평양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시하고 ‘제한된 개입[포용]’ 정책의 가능성을 열어 두면서, 시간만 보내 왔다. 장기적이면서도 일관된 정책 목표가 부재한 가운데 역대 행정부들은 자기 나름의 목적을 추구하는 평양이 조성한 위기에 말려들어 임시변통책을 내놓곤 했다.

 

논란은 점점 단순화되어 경직된 논리를 선택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한쪽은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북한이 붕괴한다는 쪽으로 나아갔고, 다른 쪽은 김정일 체제가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 생존한다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 중간 정도가 가장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이데올로기에 눈멀지 않은 현실적 평가이다. 북한이 생존은 하지만 노동당 체제와 그 지도력의 성격이 크게 바뀐 다음에야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 엔드게임> 43-44쪽)

 

이에 이어 클린턴 행정부에서 북한붕괴론이 득세한 상황을 설명했다.

 

북한 붕괴에 대한 기대감은 클린턴 행정부 8년 동안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특히 김일성 사망과 이후 밀어닥친 기근과 경제적 침체가 이를 부풀렸다. 1994년 10월 워싱턴이 평양과 제네바 합의를 체결했을 때 공화당이 이에 대해 공격해 오자 백악관과 국무부는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세워 공개적으로 대응했다. 한 관리는 핵동결 대가로 민간 경수로를 지어 주는 것을 반대하는 비판자들에 대해 경수로를 건설하는 데 10년이 걸릴 것인데 “그 동안 북한 정권이 붕괴할 것이 거의 틀림없으며, 그때가 되면 북한은 이미 남한에 흡수돼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

 

1996년 1월 21일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 보좌관은 백악관 상황실에 나를 포함한 6명의 민간 전문가를 초청했다. 레이크는 남한 출장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반도 관련 업무를 다루는 관리 8명이 그 토론에 참석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북한이 독립된 국가로서 계속 생존해 나갈 것이라고 얘기했다. 레이크를 비롯한 관리들은 모두 나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들 대부분은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과 붕괴에 대한 두려움 대문에 스스로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핵동결 합의에 따라 경제 제재를 완화하지 않으면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재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들은 나의 경고에 냉소를 보냈다. (같은 책 44-45쪽)

 

해리슨은 북한이 동구권 국가들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는 기본 이유로 민족주의와 유교적 전통 두 가지를 제시했다.

 

북한의 민족주의적 상징주의의 핵심 주제는 다음과 같다. 미국은 전략적 이유로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부활시키려는 것을 돕고 있으며, 미국의 아첨꾼인 남한은 단기적인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일본의 침략을 번듯이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한이 공유하는 역사 인식은 이런 논리를 강력하게 뒷받침해 준다. 북한뿐 아니라 남한 사람들도 미국이 1905년 필리핀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신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도록 묵인해 준 것을 비난한다. 그로부터 40년 뒤 미국이 소련과 함께 한반도를 분단시킨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남한이 분단 이후 미국과 일본에 휘둘려 민족적 대의를 배신했다고 본다. 평양은 남한 정부의 초기 지도자 중 많은 사람이 일본에 협력한 적이 있으며, 북한 지도자들이 항일 빨치산 전사로서 결점 없는 민족주의자들인 것과 대비된다고 주장한다. (같은 책 54-55쪽)

 

한민족이 중앙집권적 관료 기구를 갖추고 유교적 가치에 입각한 통일정부를 구성한 것은 1,2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 독일은 1945년 분단될 때 통일된 기간이 1세기도 채 안 되었다. 독일 사람들의 문화적-정치적 기질은 매우 지방분권적이어서 주요 도시들은 모두 최고 상표의 소시지나 최고의 오페라하우스를 가지려고 경쟁했다. 반면 매우 동질적인 조선에서는 피라미드형 행정기구의 정점에 왕이 있었고, 지방 정부는 왕정의 지부에 불과했으며, 문화적 규범은 모두 서울에 의해 결정되었다. (...) 양반 계층이 된 주요 가문들은 왕조 내부의 경쟁에서 쫓겨나지 않는 한 영구적으로 수도에 거주했다. 신성불가침한 사적 소유권이란 개념은 없었다. 왕이 변덕을 부릴 때마다 사람들의 경제생활이 박살나곤 했다. (같은 책 70-71쪽)

 

유교적 윤리관에서 보면, 이상적인 지도자는 모범적인 행동이나 현명한 가르침과 같은 도덕적 영향력을 통해 나라를 다스려야 하지, 야만적인 강요에 의해 나라를 다스려서는 안 된다. 지도자는 현명함을 백성들에게 전수하고, 백성은 그 진리를 기계적으로 암기해 옳은 것을 배운다. 김일성은 조선시대 왕들처럼 백성들에게 야만적으로 강요하는 수단을 조직적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그의 백성들은 고위 당국이 내려 주는 것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김일성은 이를 활용해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했다. (...) 이들을 결합시킨 사적 유대는 과거 봉건시대의 양반적 전통을 연상시킬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후원자인 소련에게 배운 민주집중제와 과거 전통으로부터 내려온 유교적 가치, 문화적 유산 등을 성공적으로 결합해 전통적인 정치학의 분류법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냈다. (같은 책 72-73쪽)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놓고 “상상의 공동체”니 “발명된 전통”이니 하는 말이 근래 유행하는데, 민족의 실체가 근세까지 불안정한 상태에 있던 지역과 사회에나 적용되는 말이다. 1990년을 전후해 무너진 동유럽 공산권 지역에는 1878년 베를린회담에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루마니아의 독립이 결정될 때까지 완전한 주권국가가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터키, 러시아, 세 제국의 각축장일 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산정권이 세워진 나라들 중 70년 이상의 ‘민족국가’ 전통을 가진 나라가 없었다. 그런 곳의 민족주의, 예컨대 ‘범슬라브주의’(Pan-Slavism)에는 ‘상상의 공동체’나 ‘발명된 전통’의 측면이 크다.

 

분단 이후 남한 정권이 민족주의를 등지는 일이 많았고 경제와 문화가 외부 영향에 노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강고한 민족의식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외국인이 많다. 한국인 자신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1천년 넘는 민족국가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 민족주의에는 분명히 남다른 점이 있다.

 

그런데 지난 70년간 남북 간 상황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북한인의 민족주의가 어떤 것이겠는가. 동유럽 국가들이 투항할 조건이라 해서 북한도 투항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게다가 투항 상대가 누구인가. 동유럽 공산국들은 미국에 대해 북한처럼 직접적인 ‘원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때까지 40여 년간 소련과의 관계 중에는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었을 것이다. 가까운 소련보다 먼 미국을 더 싫어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북한은 달랐다. 소련이 공산권 맹주로 버티고 있는 동안에도 소련에 전폭적으로 의지하던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주체’사상을 세운 것은 북한 체제가 사회주의 못지않게 민족주의에도 의지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측면은 위기상황일수록 부각되기 마련이다. 동유럽과 비슷한 수준의 압력으로는 무너지지 않을 특성을 북한 체제는 갖고 있었다.

 

민족주의와 함께 북한 체제를 버텨준 또 하나의 요소로 해리슨은 유교적 전통을 꼽았다. 유교적 전통 때문에 북한 체제가 조합주의(corporatism) 특성을 갖게 되었다고 그는 본다. 북한의 조합주의 특성은 브루스 커밍스가 “The Corporate State in North Korea”에서(Hagen Koo ed., <State and Society in Contemporary Korea>, 1993) 지적한 것이다.

 

해리슨은 조합주의 특성을 북한 체제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저항력을 확보해준 요소로 제시하면서 군국주의 일본에서도 나타났던 ‘아시아적 조합주의’의 의미에 대해 여운을 남겼다.

 

커밍스는 일본이 유럽의 파시스트 강국에 합류했지만 천황 체제는 대중 정당이나 명확한 이데올로기가 없기 때문에 진짜 파시즘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일본의 유교적 유산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은 아시아적 조합주의 체제였다. 북한 체제 역시 맑스-레닌주의를 과거 정치의 유교적 유산과 뒤섞은 독특하면서도 나름의 마력을 가진 사회주의적 조합주의 체제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 (<코리안 엔드게임> 73쪽)

 

조합주의 특성의 근거를 ‘유교적’ 전통보다는 ‘봉건적’ 전통으로 설명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개인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세계관에 경쟁하는 것이 조합주의이기 때문이다. 유교적 전통이 그리 강하지 않았던 일본 경우를 설명하는 데도 봉건적 전통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합하다. 산업혁명과 계몽사상에서 출발해 19세기 세계를 석권한 ‘근대주의’(modernism)는 유기적 전통질서를 파괴함으로써 하나의 ‘세계체제’를 만들어 왔다. 정치에서는 자유주의, 경제에서는 자본주의가 근대주의의 대표적 표현이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강한 힘을 누린 20세기 세계에서 조합주의는 파시즘 등 전체주의 체제에서 단편적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개인주의가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반발로 조합주의의 표현이 극단화된 사례가 전체주의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주의 세계관이 자체 모순에 의해 한계에 이른 21세기 상황에서는 조합주의의 다른 가능성이 검토될 필요가 떠오르고 있다. 그 필요를 염두에 둔다면 조합주의 특성이 북한 체제를 지탱한 역할을 더 깊이 검토할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리슨은 북한이 극심한 경제난을 버텨낸 이유로 제4장 “비밀스런 개혁”에서는 북한이 나름대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제5장 “금과 석유, 그러나 무기력한 이미지”에서는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이 가진 잠재적 가치가 장기간에 걸친 유동성의 위기 속에서도 경제를 지탱해준 측면을 지적한다. 이 점은 솔직히 잘 납득되지 않는다. 북한의 버티는 힘을 조금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측면이기는 하지만 압력의 엄청난 규모에 대응할 만큼 큰 힘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북한붕괴론을 비판하는 데는 두 가지 논점이 있다. 하나는 그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정당성 문제고, 또 하나는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타당성 문제다. 최근 나온 이재봉의 “북한 붕괴,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719]에 두 문제가 나란히 다뤄져 있다.

 

두 문제를 나란히 다룰 때, 두 문제의 관련성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재봉의 글에 좋은 논점이 많이 담겨 있지만 이 점에서 아쉬운 감이 있다. 북한붕괴론의 정당성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그 청산을 바라는) 내 눈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 들어 있다.

 

“북한처럼 폐쇄적인 독재국가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수 없다. 정보가 통제되고 자유가 제한되어 불만 표출이 어렵고, 데모를 하더라도 그에 대한 탄압과 처벌이 너무 가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폐쇄적 독재가 인민의 저항을 다소 늦출 수는 있지만, 결국 터져 나올 때는 더욱 격렬하게 된다는 것이 남한의 경험으로도 확인된 사실이다. 7년간 유지된 유신체제보다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가혹한 탄압과 처벌 정도로 부족하다.

 

“1980년대 말부터 노동자계층의 탈북이 급증하고, 유학생 및 작가나 교원 등 지식층뿐만 아니라, 외교관이나 당비서를 포함한 지배층의 망명까지 줄을 이었다. 그러나 '지식층의 이반'이든 '지배층의 동요'든 그들 모두 정권이나 체제에 불만을 품고 북한을 탈출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자신들의 잘못에 따른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소외감으로 탈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황장엽 한 사람을 놓고는 타당한 설명이다. 그러나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탈북’ 사태는 북한 체제의 상당 수준 위기를 보여준 것이다. 그 수준을 냉철히 밝혀 지나친 과장을 피할 필요는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이재봉의 글에서는 북한 체제의 위기를 지나치게 축소해서 보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보다는 북한 체제의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라는 점의 논증에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정당성 문제를 타당성 문제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반증하려 하기 때문에 전체 논지의 설득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북한 붕괴가 관계국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 가능성이 억제된다는 점에 충분한 비중을 두면 설득력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해리슨은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 들지 않고 체제와 지도력의 상당한 변화를 겪으면서 생존의 길을 찾을 것이라는 중간적 판단을 제시했다. 그는 북한이 무조건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인가 하는 식의 흑백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어떤 변화를 겪어내느냐 하는 조건에 붕괴 여부가 걸려있는 것이라면 주변국의 정책 선택이 그 조건에 작용할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미국과 남한 대결주의자들의 붕괴 ‘촉진’ 주장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붕괴 촉진 정책을 강하게 꾸준히 쓰면 붕괴를 정말 일으킬 수도 있었으니까.

 

북한 붕괴 촉진을 주장한 것이 미국과 남한의 일개 파벌이었을 뿐, 두 나라의 국익을 제대로 대변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990년대를 통해 두 나라 정책이 대결주의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으나, 붕괴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에서는 억제된 것이 그 때문이다. 평시에는 대결주의 성향의 소수 이해집단 외에는 북한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위기가 제기되자 국가 차원의 득실을 제대로 따지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해 중국의 대 북한 정책이 같은 기간 중 일관성을 유지한 것은 미국이나 남한보다 북한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북한 체제의 지속성은 자체 역량만이 아니라 주요 이해관계국들에게 그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는 사실에 의지했던 것이다. 미국은 대외정책에서 ‘오판’을 잘하기로 소문난 나라인데도 북한을 놓고까지 결정적 오판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이라크를 멋대로 집적거려서 일으킬 수 있는 문제에 비해 북한에 대한 정책 실패가 가져올 부담이 엄청나게 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남한과 미국의 정책 결정에서 대결주의자들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정보와 이해의 부족이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그 조건이 크게 바뀌었다. 2002년 1월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은 미국 대결주의의 득세를 보여주고 북한은 연이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실험으로 이에 응수했지만, 1990년대와 같은 불안한 상황이 재현될 위험은 크게 줄어들었다. 북한의 상황이 그때보다 더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미국과 남한에서 대결주의가 우세한 동안에는 북한 입장에서 정보 유출을 가로막는 비밀주의에 유리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외부의 위협을 줄이기 위해 “정직이 최선의 정책”인 상황으로 바뀌어 왔다. 북한이 가까운 시일 내에 체제 개방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 대외 홍보의 수준이라도 발전시킬 것을 기대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