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권 대북정책의 배경으로 많이 거론된 것이 ‘북한 붕괴론’이다.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북한에 관한 정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남북대화에는 치명적인 주장이었다. 상대가 곧 쓰러질 것이라는 가정 하에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있는가? 또 그런 속셈을 감추지 않으면서 북한을 대하는데, 북한 쪽이 신뢰를 갖고 대화에 임할 수 있겠는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 고위급회담을 파탄으로 몰고 간 ‘훈령 조작’ 사건 같은 것을 저지를 수 있게 해준 것이 북한 붕괴론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북한 붕괴론을 김연철은 이렇게 정리, 설명했다.

 

북한 붕괴론은 예나 지금이나 ‘보수적 기대’의 이데올로기다.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과 만나서 생긴 일종의 관변 논리이기도 하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김일성 사후 노골적으로 흡수 통일 의지를 밝히곤 했다. 1994년 8월 15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통일은 갑자기 올지도 모른다”며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때부터 급변 사태 대비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모든 국책 연구기관들은 통합 대비 연구에 매진했다. (...)

 

북한 내부 권력 투쟁 가능성이 근거도 없이 난무했다. 이럴 때에는 정보 수집과 판단 기능을 갖고 있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부가 오히려 북한 붕괴론을 조장했다. (...)

 

권력 투쟁설 혹은 붕괴론은 김영삼 정부 입장에서 남북 관계 악화의 책임을 북쪽에 떠넘기는 핑계 거리이기도 했다. 1994년 8월 17일 이홍구 당시 통일 부총리는 기자 간담회에서 “남북 관계가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핵 문제가 아니라 북한 체제의 불투명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내부 사정 때문에 남북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된 진단이며, 이런 진단은 어리석은 처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처방이란 ‘기다리는 전략’이다. 김영삼 정부는 그렇게 이제나 저제나 북한이 붕괴하기를 기다렸다. 클린턴 행정부가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 외교를 하고 있을 때, 김영삼 정부는 관중석으로 비껴 앉아 하염없이 기다렸다. (<냉전의 추억>(후마니타스 펴냄) 114-116쪽)

 

후에 햇볕정책의 기수로 나설 임동원은 노태우 정부의 통일부 차관으로 있었는데, 그때도 그는 남북관계 발전에 적극적인 입장이었다. 1992년 1월 김용순-캔터의 뉴욕회담 직후 미국 국무성의 로버트 칼린이 상황을 설명하러 통일부를 방문했을 때 임동원은 자기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고 회고했다.

 

“내가 북한 대표들과의 대화를 통해 감지한 바에 의하면, 북한은 체제위기에 처하여 ‘생존전략’을 추구하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외교적 목표를 미국과의 적대관계 해소와 외교관계 수립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북한이 국제핵사찰 수용을 지연시키는 것은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유도하여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 위협을 가하지 않겠다’는 법적인 안전보장을 받아내려는 것이다. 북한은 끝까지 핵문제를 대미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카드로 사용하려 할 것이다. (...)” (<피스메이커> 240쪽)

 

북한의 NPT 탈퇴선언 1년 전의 시점인데 마치 그 후 북한의 태도를 미리 예견한 듯한 내용이다. 임동원은 과거 사실의 회고에 매우 엄정한 태도를 지키는데, 그 엄정성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사후의 생각을 끼워 넣은 것이 아닌지 의심도 들 만큼 정확한 통찰이다.

 

임동원도 북한의 “체제위기”, 즉 붕괴 가능성은 인정하고 있었다. 동구권 붕괴에 이어 소련 해체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중국도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의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북한의 양대 동맹국이 혼란과 침체에 빠진 상태에서 동유럽 공산국들과 달리 북한만이 버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일 지도체제의 지도자 김일성은 80세의 고령이었다. 그 시점에서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가능성일 뿐이었지, 필연성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 동안 확인되었다. 북한의 외부세력 중에는 북한의 붕괴를 앞당기려고 애쓴 세력도 있고 막으려고 애쓴 세력도 있었다. 붕괴를 원하는 쪽에서는 앞당기려고 애쓰고 원하지 않는 쪽에서는 막으려고 애쓴 것이다.

 

임동원은 북한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는 전제 하에 그 위험을 피하는 길을 모색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햇볕정책을 시도한 한완상도 그랬다. 반면 김영삼을 비롯한 붕괴론자들은 북한의 붕괴를 촉진하려고 애썼다. 미국 정부 일각, 특히 군사-정보 분야에는 북한의 붕괴를 원하는 일군의 관료집단이 있었다. 북한의 붕괴를 막으려는 정책노선이 국무부를 중심으로 미국 정부 내에서 나타나는 것은 1993년 6월 북미회담이 시작된 뒤의 일이었다.

 

미국 군사-정보 분야의 대결주의 경향은 ‘네오콘’의 흐름이다. 냉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미국의 1극 패권체제를 세우겠다는 이 흐름은 아이젠하워가 지적했던 ‘군산복합체’의 의지를 대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냉전이 종식된 세계에 새로운 긴장의 씨앗을 뿌리려는 세력이 미국 내에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반면 북한 붕괴론을 앞세운 남한 일각의 대결주의 추세는 그리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북한을 둘러싼 긴장의 완화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남한의 집권세력이 집요한 대결주의 추세를 보인 이유가 무엇일까?

 

1948년 무렵 분단건국 추진세력이 남한에서 득세하던 상황과 비교해 본다. 통일건국은 민족의 염원이었고 분단건국은 전쟁의 위험을 가져오는 일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분단건국 추진세력이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특권구조 때문이었다. 기존의 특권층인 친일파는 통일건국이 이뤄질 경우 특권을 빼앗기거나 심지어 박해를 받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미국에 의존하는 분단건국을 통해 미래의 특권층이 되고자 하는 친미파가 과거의 특권층과 손잡음으로써 막강한 재력과 폭력을 갖춘 세력을 이뤘던 것이다.

 

1987년 군사독재 종식을 계기로 남한 사회에서 민주화의 상당한 진척이 이뤄졌지만, 독재시대의 특권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른바 ‘1987체제’의 한계였다. 남북관계의 발전에는 민족국가의 완성을 통해 체제 변화를 이끌어낼 소지가 있었고, 그 변화는 특권구조의 약화를 향할 공산이 컸다. 군사세력을 대신해 특권구조의 보루가 된 자본세력이 거대언론과 정부를 앞세워 남북관계 발전을 가로막는 일에 나섰다. 분단구조의 모순이 특권구조의 모순을 지탱해 주는 역할 때문에 ‘수구’세력이 지키는 대상이 된 것이다.

 

남한의 수구세력은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을 어렵게 만드는 대결주의 노선의 목적으로 ‘흡수통일’을 흔히 내세웠다. 대결주의 노선의 반민족성에 대한 비판과 반감을 무마하기 위해 ‘통일’이란 말을 앞세운 것이다. 북한은 어차피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 그것을 떠안는 준비에 모든 자원과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쇠약한 상태로 오래 있으면 병원비가 많이 나올 것이므로 목을 졸라 숨을 끊어주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흡수통일의 예로 독일을 많이 거론한다. 눈부신 경제발전을 구가하고 올림픽까지 당당히 치러낸 1990년대 초의 상황에서는 남북한 관계를 동서독 관계에 비교한 것은 그럴듯한 발상이었다. 독일의 통일이 얼마나 큰 부담을 가져왔는지는 당시까지 깊이 인식되지 않고 있었고 한국경제의 바탕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도 IMF사태가 닥치고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1993-94년의 세계가 ‘자본주의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남한 위정자들이 강압적 대 북한 정책이 몰고 올 실제적 위험에 눈감은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남한 특권세력의 미국에 대한 의존적 자세가 국가와 사회의 명백한 위험도 묵살할 만큼 심화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언론인과 학자로 다년간 한국 사정을 연구해 온 셀리그 해리슨은 1971년에 윌리엄 포터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들은 노골적인 표현을 기억한다.

 

“그들(한국인들)은 ‘엉클 샘’의 젖통에 착 달라붙어 있어요. 당연히 우리를 놔주고 싶지 않은 거지요.”(<코리안 엔드게임>(이흥동 외 옮김, 삼인 펴냄) 280쪽)

 

그리고 20여 년 후 제임스 레이니 대사에게 들은 말을 함께 내놓는다.

 

“당신이 샴쌍둥이처럼 얽히게 됐을 때,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샴쌍둥이가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관계가 아니지요. 우리는 어리석게도 서로 계속 의존하게 만들면서 긴장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어요.”(<코리안 엔드게임> 282쪽)

 

붕괴는 폭력적 현상이다. 붕괴 당사자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피해가 일어날 수 있다. 남한 수구세력이 북한 붕괴론에 쏠리는 것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미국에 의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중심에 작계(작전계획) 5027이 있다. 이에 대한 해리슨의 설명을 옮겨놓는다.

 

전쟁이 ‘오해와 부주의’로 빚어질 수 있는 위험성은 작전계획 5027의 근본적인 변화로 증폭되어 왔다. 작전계획(이하 ‘작계’) 5027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분쟁 발생 시 미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취하게 될 행동 시나리오이다.

 

작계 5027은 1953년 휴전 이후 10년 동안 한국전쟁의 재발 상황을 가정했다. (...) 미군과 남한군은 수도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까지 단계적으로 후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3년 미국은 새로운 ‘전진 방어’ 개념을 도입했다. 이 개념에 다르면 미군은 B-52폭격기를 동원한 24시간 폭격을 통해 북한의 서울 북부 진출을 막고 (...) 9일 만에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전략에 따라 비무장지대 남쪽에 미군과 남한군 포병부대가 전진 배치됐고 이에 대응해 북한도 포병부대를 전진 배치했다. 이 포진은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북한의 1개 주요 도시[개성] 점령을 상정한 1973년의 전략 변경은 한층 더 극적인 1992년의 전략 변경으로 길을 열어 주었다. 이 작계 5027-92는 미 제3 해병사단과 남한군 제1 해병사단이 북한 동해안의 원산에 상륙한 뒤 서쪽으로 진격해 평양을 점령하고 이와 동시에 미군과 남한군 보병부대들이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진해 이들을 지원하도록 되어 있다. (...) 작계 5027-92에서 중요한 사항은 북한군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첩보가 있을 경우 이에 대응해 실제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인 ‘교전 발생 전 단계’에서부터 전투태세를 갖춘 미군과 남한군을 전방 진지에 투입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엔드게임> 205쪽)

 

이름은 ‘전진 방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공격’ 계획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이 계획 자체가 북한을 위협하는 데도 쓰였다. 1993년 3월 남한의 이병태 국방장관이 국회 답변에서 미국과의 협의 없이 이 계획의 내용을 폭로했는데, 이병태는 북한의 도발적인 성명에 대응하는 ‘억제책’으로 계획 내용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1998년 10월에는 주한미군사령부 기획참모부장 에이어즈 중장이 기자들에게 이 계획 내용을 알려주면서(취재원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북한에 대해 더욱 위협적인 내용을 두 가지 덧붙였다. 하나는 남한이 점령정부 수립의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이 공격해 올 “모호한 징후”만 발견되어도 선제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해리슨은 에이어즈가 작계 5027-98 수정본 내용을 밝힌 것으로 설명한다.

 

미군과 남한군이 실제 교전 발생에 대비해 예비적으로 이동하는 ‘교전 발생 전 단계’에 대해 언급한 작계 5027-92와 같이 에이어즈 중장이 제시한 작계 5027-98의 수정 계획은 “북한군의 남침 전 단계, 초기 침공의 저지, 역공을 위한 재편 그리고 대규모 북한 침공”이라는 미군과 남한군의 4단계 작전을 추가로 담고 있다. “최종 단계에서는 미 해병군단의 모든 전력이 투입될 것이다. 북한의 저항이 분쇄된 이후 미군과 남한군은 북한의 국가 기능을 폐지하고 남한의 통제 아래 북한을 재편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이 종료되었을 때 북한은 어떤 종류의 군사 행동도 저지르지 못하게 되고, 우리는 그들 모두를 궤멸시킬 것이다.” (<한반도 엔드게임> 205-207쪽)

 

1990년대 중후반 북한이 겪은 ‘고난의 행군’을 생각한다면 붕괴론이 아주 허망한 것은 아니었다. 동유럽 공산국 중에는 더 건강한 모습을 보이다가 무너진 나라들도 있었다. 그리고 미국과 남한은 북한의 붕괴를 촉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도 북한이 끝내 무너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도움이다. 이 무렵에는 중국의 힘이 아직 약했고 인권문제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다. 1994년 6월의 긴장 상황 속에서 중국은 북한 옹호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기도 했다. 대 북한 제재 결의에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뜻을 북한에 전함으로써 북한이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다. 미국과 남한의 권유에 따른 제스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북한의 붕괴를 막으려는 중국의 의지는 굳건했고, 북한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제공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의 국력은 크게 늘어나 있고 국제적 위상도 당당해졌다. 그리고 북한의 붕괴를 막으려는 의지는 변함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 대박론’이니 뭐니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풍기는 자들은 뭐를 알고 하는 얘기일까, 아니면 그저 습관일 뿐일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