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치가 정책 결정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개발에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1990년대에 한국과 함께 “아시아의 용”으로 꼽힌 타이완, 말레이시아 등 신흥산업국(NICs)의 1960~1990년간 경제발전 실적은 한국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독재와 경제통제가 심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호황기의 성장률이 한국만큼 높지 않더라도 1972년, 1980년 등 불황의 충격이 덜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성장을 이룬 것이다.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발전 조건이 함께 작용한 것이다.

 

근대국가의 첫 번째 특징은 국가 기능이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한편으로는 경제활동의 양상이 복잡해지고, 또 한편으로는 국가가 모든 국민을 일일이 직접 상대하게 된 결과다. 권력 분립은 민주주의 원리 이전에, ‘만기친람’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노골적 독재가 아니라도 지나친 대통령중심제가 재난구조 같은 국가기능에 장애를 일으킨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권력 분립이 없으면 국제관계에서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일본이 고종에게 을사조약을 강요할 때 고종은 신민의 의견을 알아봐야 한다고 사태 진행을 늦추려 했지만 모든 권한을 가진 황제에게 신민의 의견을 물을 필요가 어디 있냐는 반박을 받았다. 대한제국을 황제독재체제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때 헐값으로 배상청구권을 팔아넘긴 것도 독재정권이기 때문이었다. 독재정권에서는 정권의 이익을 위해 국익을 내다버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1993년 6월 이후 북미회담 진행에 따라 ‘유일지도체제’로만 알았던 북한 내부에도 어떤 형태의 권력 분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관찰자들에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 정도를 상정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부의 존재가 갈수록 분명히 부각되어 갔다.

 

미국 정부에서도 국방부의 강경론이 국무부의 온건론과 맞서는 일이 많다. “망치를 쥔 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못대가리로 보인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처럼 군대를 관장하는 국방부가 군대 쓸 일 많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북한의 군부는 미국의 국방부와 차원이 다른 존재다. 원래 공산국가에서 군의 정치적 의미가 엄청나게 크다. 당과 함께 인민의 의지를 직접 받드는 기구로서 정부의 일부가 아니라 정부 전체와 대칭을 이루는 존재다. 해방 후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 소련군 지도부의 정치적 역량은 ‘전투 기술자’에 불과한 미군정 지도자들과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전역 후에도 정치가와 행정가로 역량을 발휘할 소련 장군들과 달리 미군 장군 대다수는 연금 타먹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10여 년 전 중국에 처음 갔을 때 들은 우스개가 하나 있다. 여러 사람 보는 앞에서 물에 빠진 사람이 있을 때 누가 구하러 뛰어들까? 인민해방군 병사라는 대답이다. 공산당원은 눈치만 보고 있지만 병사는 군복을 입고 있어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당도 군도 믿지 못하게 된 세태를 냉소하고 있지만 그 바닥에는 인민의 신뢰를 받아야 할 당과 군의 위상에 대한 인식이 깔려있다.

 

공산국가에서 군의 비중이 큰 한 가지 이유는 건국과정에서 군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건국 후 안정 상태가 오래 가면 군의 역할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 공산권의 붕괴에 따라 국가의 존립 위기가 닥치면서 군의 역할이 다시 커졌다.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제2인자로 나설 때는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원회 위원 등 여러 부문으로 동시에 진출했다. 그러나 실제 권력계승 단계에서는 인민군 최고사령관(1991)과 국방위원장(1993)으로 군 장악에 치중했고, 1998년 개헌으로 국방위원장 직을 국가 최고위직으로 만들어 죽을 때까지 지키며 ‘선군정치’를 표방했다.

 

1993-1994년 ‘북핵위기’ 속에서 북한은 “전쟁 불사”의 태도를 견지했다. 미국이 볼 때 가소로운 태도였다. 막상 터지기만 하면 며칠 만에 초토화될 나라가! ‘당랑거철(螳螂拒轍)’이 바로 그런 경우를 위해 만들어진 말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군사력이 북한과 큰 차이 없는 이라크를 가볍게 쳐부순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1991년 1-2월간 40여 일에 걸친 미국 주도의 공격으로 2만 명 이상의 이라크군과 10만 명 이상의 이라크 민간인이 목숨을 잃는 동안 이라크군 공격에 의한 연합군 전사자는 190명(미군 113명)에 불과했다. 미국 의회는 걸프전쟁의 비용을 약 611억 달러로 추산했는데, 그중 미국의 부담은 100억 달러 미만에 그쳤다. 이라크인에게는 끔찍한 ‘전쟁’이 미국인에게는 한 판의 가벼운 ‘게임’이었다.

 

1992년 1월 김용순과 캔터의 뉴욕회담에서 미국의 무성의는 상식 이하였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공동성명도 거부하고 추후의 회담 약속도 거부했다. 미국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것 이상 아무 의미도 북한과의 만남에 두지 않은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만은 냉전 승리에 이은 걸프전쟁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계속 무시할 것이고, 미국에게 무시당하는 정권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며, 설령 무너지지 않더라도 가볍게 쳐부술 수 있다는 속셈이었다.

 

1992년 내내 IAEA를 통한 북한 압박은 뉴욕회담에서 보인 태도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쳤다. 1993년 3월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하자 IAEA의 불공정한 조치가 드러나게 되었다. 핵연료의 재처리는 NPT의 금지사항이 아니었다. 이것을 이유로 역사상 유례없는 특별사찰을 요구한 것은 명백히 무리한 조치였고, 북한의 NPT 탈퇴가 현실화한다면 미국과 IAEA가 핵확산금지 체제를 약화시킨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NPT 탈퇴를 막기 위해 1993년 6월부터 북미회담을 열게 된 것이었다.

 

미국이 IAEA를 조종한다는 북한의 주장을 미국과 IAEA 모두 부인했다. 그러나 IAEA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제기구로서 IAEA의 독립성을 미국도 존중하는 시늉은 했지만, 미국에게 꼭 필요한 일이 있을 경우 IAEA가 미국의 뜻을 벗어나 움직일 가능성은 생각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미국이 국제기구를 이용한 노골적 사례로 걸프전쟁 이후 이라크 무기사찰을 위해 만들어진 유엔특별위원단(UNSCOM, United Nations Special Commission)을 들 수 있다.

 

UNSCOM은 1991년 4월 안보리 결의로 만들어졌다. 사전 예고 없이 이라크 내의 어느 곳이든지 찾아가 조사할 수 있고, 어떤 시설이든지 마음대로 사찰할 수 있고,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어떤 자료라도 제출받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요컨대 이라크 주권을 깔아뭉개는 권한을 가진 기구였다.

 

UNSCOM이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기구라는 사실은 첫 3년간 예산을 유엔 아닌 미국에게 타 쓴 사실에서 분명하다. 1994년부터 유엔 예산을 받게 되었지만 장비, 인력 등을 미국에 의지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예컨대 위원단이 수행하는 도청작업에서도 해독을 미국 정보기관에 맡겨 위원단이 필요로 하는 내용만을 미국 측에서 뽑아 넘겨주는 식이었다. 1998년 12월의 이라크 공습 때 미군이 이 도청자료를 활용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라크의 반발만이 아니라 국제적 비난을 모으고 이듬해 해체되었다.

 

그 때 리처드 버틀러 UNSCOM 단장이 이라크가 사찰에 협조하지 않는다며 위원단을 철수시켜 미국의 공습을 위한 핑계를 만들어준 반면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은 이라크의 사찰 협조가 충분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IAEA가 그래도 UNSCOM 같은 날라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미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유엔기구는 없었다. 북한에 대한 IAEA의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는 미국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이라크를 짓밟고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가운데 북한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미국 정부, 특히 군부 내에는 많이 있었을 것이다. 이라크의 경제난을 외면하는 저유가정책의 결과 후세인이 참지 못하고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그것을 빌미로 이라크를 장악한 것처럼, 북한을 곤경으로 몰아넣으면 뭔가 빌미가 될 사건을 저지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1993년 6월 이래 북미회담을 진행하는 배후에서도 그런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고, 1994년 봄 ‘북핵위기’의 다른 해법이 보이지 않게 되자 북한 공격의 분위기가 미국 정부 내에 짙어졌다. 1994년 5월 18일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과 존 샬리카쉬빌리 합참의장은 해외주둔군 사령관 일부를 포함한 모든 4성 장군을 국방부 회의실에 모았다. 제2의 한국전쟁을 위한 병력, 병참, 물자 등의 동원계획을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 날 페리-샬리카쉬빌리-럭[주한미군사령관]은 군 최고통수권자인 클린턴에게 회의 결과를 전달하기 위해 백악관으로 향했다. 그것은 아시아에서 점증돼 가고 있는 무력 충돌 가능성이 몰고 올 심각하고 중대한 결과에 대한 공식적인 보고였다. 이 보고 내용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최초 3개월간 미군 사상자 5만2천 명, 한국군 사상자 49만 명은 물론이며 여기에 더해 엄청난 숫자의 북한군과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추산했고, 군비는 6백1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이지만 그중 극히 일부만을 동맹국들의 지원금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또한 이와 같은 끔찍한 비극은 취임 16개월째인 클린턴 행정부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며 국내외적으로 클린턴이 품고 있던 다른 계획과 야망들은 뒷전으로 밀려나야 할 판이었다.

 

사태의 중대성을 실감한 클린턴은 이튿날인 5월 20일 한반도에서의 위기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외교-안보 담당 보좌관 회의를 소집했다. 한반도 위기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대다수 언론인들과 전문가들은 이 회의 후 미 정부가 오랫동안 미뤄 온 제3차 북-미 고위급 회담을 재개하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등 외교적 해결 쪽으로 방향을 틀자 적잖이 놀랐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463-464쪽)

 

북한군의 전투력이 미국의 공격을 막은 것이었다! 병력과 무기 수준에서 북한군은 걸프전 개전 당시의 이라크군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미군 수뇌부는 북한군이 이라크군처럼 쉽게 패주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미군과 한국군 사상자를 50만 명 이상으로 예상한다면 북한군 사상자는 1백만 명, 거의 ‘전멸’에 이르도록 항전할 것을 예상한 것이다.

 

그리고 걸프전쟁처럼 전쟁비용을 분담해줄 상대가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전쟁을 지지했고, 전쟁비용의 3분의 2를 지불했다. 그런데 남한과 일본은 전쟁을 지지할 리가 만무했다. 이라크의 스커드미사일이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에 가한 위협과 전혀 다른 차원의 피해를 두 나라가 입을 것이 분명했다. 김영삼 정권이 ‘북핵위기’의 외교적 해결을 방해하고는 있었지만, 전쟁을 감당할 용의는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북한을 전쟁 위험에서 구해낸 것은 그 군대의 힘이었다. 북한이 GDP의 4분의 1을 군사비로 쓴다 해도 그 절대액수는 남한 군사비의 몇 분의 1에 불과하다. 북한군의 힘은 전멸을 불사하고 상대방에게 최대의 타격을 가하려는 임전태세에 있는 것이었다. 이런 임전태세는 국가나 지도자에 대한 추상적인 ‘충성’만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군 스스로를 국가의 ‘주체’로 여기는 주체의식이 필요하다. 그런 의식은 평상시에도 모든 정책결정에서 군의 입장을 배려하고 군의 의사를 존중하는 관행을 통해서만 키워지는 것이다. ‘선군정치’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미국에서나 남한에서나 북한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북한 지도자를 미치광이로 여기고 북한을 예측 불가능한 나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봐야만 그쪽 태도에 상관없이 적대적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북한의 입장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국과 남한의 주류 언론이 그 동안 그려준 북한의 모습에 비하면 그런 노력의 여지가 많이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