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7월 19일 제네바에서 제2차 북미회담이 끝날 때 양측 대표단은 두 달 후 제3차 회담의 재개를 기대하고 있었다. 재개의 조건인 북-IAEA, 북-남 관계가 순조롭게 풀리지 않음에 따라 회담 재개가 늦어졌다. 그런 가운데 북한 측이 ‘일괄협상안’을 점차적으로 구체화해서 내놓음에 따라 미국도 포괄적 타결을 차츰 더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10월 중순 평양을 방문한 케네스 퀴노네스를 통해 ‘비문서’ 형태로 제안 내용을 보낸 데 이어 11월 11일 북한 협상단 대표 강석주가 ‘일괄협상안’을 발표하자 며칠 후 미국 정부도 포괄적 타결안을 검토하기로 외교안보장관회의에서 결정한다. 이 과정과 이에 대한 남한 정부의 반응을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 437-438쪽에 이렇게 정리했다.
뉴욕에서 무려 15차례에 걸쳐 중간급 회담이 열리고 많은 서한이 평양과 워싱턴 사이를 오간 뒤 11월 15일 미 행정부는 마침내 자체적으로 마련한 ‘일괄협상안’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기로 결정했다. 1단계 의제의 핵심은, 북한이 IAEA 정기사찰을 다시 수용하고 남한과의 대화를 재개하며, 그 대가로 미국은 94년 팀스피릿 훈련을 취소하고 오랫동안 미뤄져온 제3차 북-미 협상을 재개한다는 것이었다. 3차 회담에서 논의될 2단계 협의 사항은 말썽 많은 영변의 핵폐기물 처리장 두 곳에 대한 IAEA의 사찰, 북한에 대한 국가 인정, 교역 및 투자를 둘러싼 한-미-일 3국의 양보 등이었다.
이 사건은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워싱턴포스트지의 제프리 스미스 기자에게 즉각 포착됐다. 그 보도는 미국의 북한에 대한 양보, 그중에도 특히 대 북한 정책에 있어 남한을 주변국으로 전락시킨 사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남한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제안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도 포함돼 있었다. ‘일괄협상’은 그해 봄 그의 오랜 맞수인 김대중이 공개적으로 내세운 제안과 모든 면에서 흡사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김대중이 ‘일괄협상’을 지지한다면 김 대통령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자동적으로 이에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많은 미국 관리와 언론인들은 김영삼의 행동에 김대중에 대한 질투심 내지 견제심리가 크게 작용했다고 보았다. 김영삼의 극단적 태도를 달리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런 추측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1992년 초 통일부차관에서 물러나 1995년 초 아태재단 사무총장을 맡기까지 3년간 현장을 떠나 있던 임동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서 이 기간에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을 극히 간략하게 했다. ‘제1차 북핵위기’의 양상을 그는 이렇게 정리했다.
이해[1993년] 11월에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의 ‘일괄타결안’을 수용하려 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협상을 파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에 반발한 북한은 5MW급 원자로에서 미국이 금지한 ‘사용 후 연료봉’ 추출을 시도하고, 급기야 미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군사 공격을 추진함으로써 한때 한반도의 전쟁위기까지 치닫는 이른바 1994년 봄의 ‘제1차 북핵위기’가 조성된다.
이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전격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을 통해 문제해결의 돌파구가 마련되고 이를 계기로 미국과 북한은 다시 제네바에서 포괄적인 주고받기 식 협상을 추진하게 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다시 1994년 10월 중순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마무리 단계에 있던 제네바합의 내용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힌다. “붕괴에 직면해 있는 북한과 타협한다는 것은 북한 정권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며, 한국과는 달리 북한과의 협상 경험이 적은 미국이 북한에 속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미국 정부는 “대중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라”며 김영삼 정부에 불쾌감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확실한 비전도 없이 무책임한 여론에 좌우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피스메이커> 356-357쪽)
김영삼 정부 내에서 입지가 좁아지고 있던 한완상 통일부장관은 1993년 10월 9일 안보장관회의에서 ‘일괄타결안’ 이야기를 꺼내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친 김에 나는 대북전략에 대해 지금은 북-미 간 일괄 타결로 핵 문제를 풀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내 말에 긴장하는 듯했다.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 발언이 런던에서 날아온 DJ의 발언과 비슷하다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김 대통령은 DJ에 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체질적으로 싫어했다.
그러나 그날 내 발언은 일괄 타결을 고려하는 클린턴 행정부의 기류를 감지했기 때문에 나온 발언이었다. 또한 나는 근본적으로 북-미 간 일괄 타결이 한반도 핵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라고 판단했다. 북한은 이를 끈질기게 요구해왔고 최근에는 미국도 이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는 듯했다. 김 대통령도 이런 정황을 한승주 외무장관을 통해 들었을 법한데 여전히 완강해 보였다. (<한반도는 아프다> 148쪽)
김영삼이 대북정책에서 김대중을 의식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한완상은 “런던에서 날아온 DJ의 발언”이라 했는데, 김대중은 당시 미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7월 초 영국에서 돌아왔다가 9월 하순 다시 출국해서 독일과 러시아를 거쳐 미국으로 갔던 것이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 1권 629쪽에 미국에서의 활동 상황이 적혀 있다.
10월 1일에는 컬럼비아 대학 동아시아연구소 교수단 초청으로 강연을 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도 남북통일은 흡수 통일 형식으로 이뤄져서는 안 되며 단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
나는 미국 체류 중에 북핵 문제를 일괄 타결 방식으로 풀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즉 북한이 핵 개발을 완전히 포기하는 대신 미국은 북한과의 외교 및 경제 협력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미 합동으로 펼치는 팀스피릿 훈련도 그만둘 것을 촉구했다. 일괄 타결안이야말로 북한 핵 위험을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대안임을 설파했다.
1993년 10월 중 팀스피릿 훈련 중단 방침이 한-미 간에 논의된 상황이 위트-폰먼-갈루치의 책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남한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강력한 협상 카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한국과 미국의 전략은 북한이 NPT에 남고 국제 안전조치를 수용하기로 약속하면 대신 팀스피릿 훈련을 취소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0월 15일로 예정된 회담 직전 한국의 관계 장관들은 특사 교환을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핵문제와의 연계를 끊는 것이라 판단했다. 따라서 북측 특사가 서울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난다면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하겠다고 북한에 제안하자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접근법은 국내정치적 효과도 노리고 있었다. 즉 한국이 중요한 외교 문제에 있어 미국에 주도권을 내어주었다는 비판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미국은 이런 전략의 변화에 주저했다. 부수장위원회가 한국의 관계장관 회의 직후 이 제안 내용을 받았을 때 갈루치 차관보는 팀스피릿 훈련이 군사적으로 별 소용이 없으며 예산도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합참의 마이크 라이언 중장은 팀스피릿 훈련의 규모를 줄이면 되는 것이며 미국은 원래의 전략을 계속 고수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국방부의 민간인 지도자들은 제3차 북미회담이 성공적일 경우 팀스피릿 훈련 취소를 발표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결론을 내릴 수 없자 미국은 한국에게 팀스피릿 훈련 중단을 제안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결국 새로운 협상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10월 15일 남북회담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 후 백악관은 마지못해 북한이 특사교환 및 IAEA가 요구하는 사찰 활동에 합의한다면 팀스피릿 훈련 중단을 고려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러한 정책의 변경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감안하여 북미회담이 만족스럽게 마무리된 후에 이와 같은 발표를 하기로 했다. 허바드는 뉴욕에 있는 허종 차석대사를 통해 미국의 새로운 입장을 전달했다.
한국의 입장에서 미국의 제안은 한 단계 발전한 것이지만 아직 부족했다. 팀스피릿 훈련의 중단 발표가 “만족스러운” 북미회담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특별사찰 문제에 진전이 있은 이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으로 북한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한국은 당분간 열리지 않을 북미회담이 아니라 가능한 빨리 특사 교환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했다. 이에 따라 관계 장관들은 기발한 방안을 생각해냈다. 곧 북미회담 이전에라도 북측 특사가 서울에 오면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하겠다는 내용의 비밀 양해각서를 체결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공식적인 발표는 북미회담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10월 25일 남북 접촉은 이 문제를 다루지도 못하고 끝났다. 다음 일정은 11월 4일로 정해졌다. 그러니 예정된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106-107쪽)
팀스피릿 중단은 북한이 정말 간절하게 요구해 온 것이므로 10월 9일 회의에서 그 논의가 나왔다면 남한도 북한과의 타협을 원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다. 김영삼은 “핵 가진 자와 악수할 수 없다”며 북한을 외면하는 척하고 있으면서도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수 있는 특사 교환에는 강한 집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 정부는 남북대화 진전을 북미회담 진행의 전제조건으로 삼도록 미국에게 줄곧 요구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북한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북미회담에도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북한 문제 해결에 주도권을 쥐겠다고 고집하면서 실제로는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든 자가당착의 원인은 ‘북한붕괴론’에 있었다. 불원간 북한붕괴론의 내용과 성격을 한 차례 집중적으로 검토해 보겠다.
1993년 11월 들어서서의 상황을 한완상은 이렇게 회고했다.
사실 이때 미국 정부는 새로운 대북 정책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었다. 미국은 외교안보담당 차관급 회의에서 북한과 포괄적 접근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10월 초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이 주재한 통일안보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이 미국에도 알려진 것 같았다. (...) 애커먼 의원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와서 북한도 포괄적 접근을 선호한다고 알린 것도 새로운 대북 정책에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미국은 차관급 회의에서는 포괄적 접근책을 상부에 건의한 데 이어 11월 15일 열린 외교안보 장관급 회의에서는 포괄적 접근법을 마침내 승인했다. (...) 한 마디로 미국 정부는 지금까지의 대북 정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일괄 타결 같은 포괄적 대북 정책을 활용하기로 뜻을 굳힌 셈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에서는, 특히 청와대 안에서는 여전히 미국의 이런 흐름과 사뭇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미국의 포괄적 대응방안에 대해 정부는 북한에 지나치게 양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더 가혹한 채찍을 들어야 하는데 당근을 들고 있다고 판단했다. (...)
이런 와중에 클린턴 행정부가 북핵 문제 포괄적 접근안을 승인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그러자 청와대는 긴장했다. 당시 김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할 준비를 하느라 예민한 상태였다. 김 대통령과 주변 참모들은 미국의 새로운 대북 접근책이 한국 정부의 안보 정책을 무시하는 것으로 속단하고 분노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 대통령 특유의 뒤집기로 미국의 정책을 바꾸려고 결심한 듯했다. (<한반도는 아프다> 163-164쪽)
둘째 문단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인정했다고 하는 “지금까지의 대북 정책”이란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문제 해결에 나설 의지가 없다는 전제 아래 펼쳐온 정책이었다. 6월 뉴욕회담 이래 북한이 포괄적 타결 의지를 일관성 있게 표명하자 11월 15일에 이르러 미국도 장관급 회의에서 북한의 제안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이는 결정을 한 것이다.
1992년 1월 뉴욕회담을 미국은 북한에 대한 요구를 전달하는 자리로만 간주했다. 캔터 대표는 북한 측 요구를 귓등으로만 들으라는 지침을 받았다. 일체의 공동발표를 거부하고 차후의 회담 계획도 거부했다. “너랑 안 놀아!” 하는 뜻만을 밝히는 자리였다.
17개월이 지난 1993년 6월 북미회담에 미국이 나서게 된 것은 북한의 NPT 탈퇴선언 때문이었다. 탈퇴를 유보시키는(취소가 안 된다면) 것 외의 아무런 목적도 없었다. 그런데 뉴욕과 제네바의 회담을 거치면서 북한의 요구를 인식하게 되었고, 드디어 북한의 제안을 진지하게 다룰 정부 차원 결정에 이른 것이다. 이제 회담다운 회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정부가 북-미 대화에 임하는 태도를 바꾸려는 이 무렵에 이에 역행하는 기류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기류는 한-미 양국의 군부 쪽에서 나타났다. 1993년 11월 1일 유엔총회의 대북결의안 채택이 기폭제 노릇을 했다. 블릭스 IAEA 사무총장이 북한과의 협조가 원활치 않다는 보고를 한 뒤 유엔총회는 북한에게 IAEA와의 협조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140 대 1로 통과시켰다. 반대 한 표는 북한 자신의 것이었고, 중국은 기권했다.
11월 4일 한-미 국방장관 회담(연례안보회의)에서는 1994년 팀스피릿 훈련에 관한 어떤 결정도 당분간 유보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북한과의 대화를 가로막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을 전후해서 양국 국방장관은 긴장을 증폭시키는 언론플레이를 했다.
권영해 한국 국방장관은 11월 2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핵개발 계획에 대한 우려와 함께 군사조치도 불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막 돌아온 애스핀 미국 국방장관을 만난 로이터통신은 “어쩌면 우리는 ‘위험구역’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미 국방부 고위관리”의 발언을 보도했다. 11월 5일 <워싱턴포스트>에는 “대 북한 경제봉쇄를 단행하고 북한과의 대화를 중단하며 미 국민들에게 아시아의 군사적 위기상황에 대해 설명하라”고 클린턴에게 촉구하는 칼럼이 실렸다. 이를 계기로 미국 언론의 ‘북한 때리기’가 시작되었다.
이틀 뒤[11월 7일] 클린턴은 NBC에서 방영되는 “Meet the Press”에 출연해 “북한이 핵폭탄을 개발하는 것을 결코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면 군사적 행동도 불사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현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꼴이었다. 그로부터 몇 주 동안 수많은 미국 관리들은 북한이 이미 적어도 1개 이상의 핵폭탄을 제조하는 데 성공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남발했고 그제야 백악관은 클린턴이 실언을 했다고 해명했다.
북한은 갑자기 미국 언론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NBC와 월스트리트저널지가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공동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31%에 달하는 사람들이 현재 당면한 가장 심각한 외교문제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꼽았다. 제시된 문항 중 최고로 높은 수준이었다.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435-437쪽)
북미회담의 진행을 가로막는 또 하나 악재가 이 무렵부터 자라나기 시작했다. 패트리어트미사일의 한국 배치 방침이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문제가 처음 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93년 12월부터였다. 주한미군 사령관인 게리 럭 장군이 전쟁이 발발하거나 북한이 노동 미사일을 발사해 미군 기지를 폭격할 경우를 대비해 이를 건의했던 것이다. 그의 건의는 국제 핵사찰 재개를 둘러싼 북한과의 협상이 자칫 와해될 수 있다고 우려한 국무부의 반대로 잠정적으로 보류됐다. 그러나 뉴욕타임스지 소속 국방부 출입기자 마이클 고든에 따르면 그가 남한을 현지 취재한 뒤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돌아왔을 때 “백악관은 완전히 공포에 빠진 상태”였다고 했다. 백악관은 지난 10월 소말리아에 파견됐던 평화유지군의 경우처럼 행여 행정부가 미군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군사 장비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사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443-444쪽)
북한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바뀌고 있던 이 시기에 그 변화에 대한 반발이 한-미 정부 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11월 23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영삼이 미국의 ‘포괄적 타결’ 방침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행위 하나로 김영삼은 제1차 북핵위기에서 김일성 못지않은 중요한 역할을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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