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로 제공’이 1993년 7월 제2차 회담 이후 북미회담의 초점이 되는데, 경수로의 의미에 대한 간결한 설명을 옮겨놓는다.
경수로는 본래 산화중수소, 다시 말해 중수(重水)를 사용하는 원자로와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핵반응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일반 물을 사용하는 원자로다. 경수로는 영변에서 가동 혹은 건설 중인 흑연 감속 원자로에 비해 훨씬 정교한 장치였다. 당시 북한의 기술 수준으로는 경수로 개발 능력이 없었으므로 거의 모든 기술과 부품을 해외에서 수입해야 할 형편이었지만 경수로는 흑연 감속 원자로에 비해서 성능이 월등했다. 영변에서 유일하게 가동 중인 5MW급 원자로는 별 탈 없이 돌아간다고 가정할 때 생산할 수 있는 전력량은 미국의 대형 빌딩 5개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정도의 양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서 표준형 경수로 2기만 있으면 2천MW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데 이는 워싱턴시 전역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429쪽)
불빛이 가득한 남한과 온통 캄캄한 북한이 대비되는 야간 위성사진이 생각난다. 남한의 전력 생산용량이 8천만 kw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이 간절하게 바란 경수로는 2백만 kw 용량의 것이었다. 오버도퍼는 북한이 경수로를 추구해 온 사실도 정리했다.
북한의 경수로 제의는 미국측 대표단에게는 대단히 생소한 이야기였지만 북한 정부가 경수로 도입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꽤 오래 전 일이었다. 80년대 중반 북한이 소련에게 요구한 소련제 원자로가 바로 경수로형이었다. 결국 경수로형 원자로 제공과 관련한 소련과 북한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북한 지도부는 현대적인 원자력시설에 대한 관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92년 5월 북한을 방문한 한스 블릭스 IAEA 사무총장은 북한으로부터 경수로를 도입하고 그에 필요한 농축 우라늄 연료를 해외에서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잇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블릭스는 힘닿는 데까지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북한의 김달현 부총리는 서울을 방문해 비무장지대 인근의 북한 지역에 남북 협력으로 경수로를 설치하고 양국 모두에 전력을 공급하자고 제안한 바 있었다. 이 계획은 남한측이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거의 조달하도록 돼 있었다. 당시 공개되지 않고 비밀에 부쳐졌던 김달현의 제안은 그해 말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뒷전으로 밀렸고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같은 책 430쪽)
1985년 북한은 소련에게 경수로 제공을 약속받고 NPT 가입을 신청했다. 기술과 원료를 확보하고 있던 흑연감속로를 경수로로 대체할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소련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로 붕괴에 이르렀고, 새로운 제공자가 필요하게 된 북한은 IAEA에도 남한에도 손을 벌렸다. 호응을 얻지 못한 채로 있던 차에 미국이 ‘북핵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하고 나서자 그렇다면 당신네가 해결해 달라고 제안을 꺼낸 것이다.
소위 ‘북핵 문제’는 북한이 경수로 제공을 누구에게든 받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1993년 7월의 제안에서도 경수로만 제공해 주면 핵사업과 관련된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 대표단은 경수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버도퍼는 당시 미국 대표단의 태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네바 회담에서 북한이 다시 한 번 경수로 문제를 제기했을 때 갈루치는 국무부와 국방부 고위급 인사들로부터 받았던 언질, 즉 북한에 대해서 어떤 약속도, 특히 재정적 약속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상기했다. 7월 19일 엿새 일정의 회담 마지막 날 갈루치는 미국은 “북한의 경수로 도입을 지지하며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경수로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공식 선언문을 채택하기로 합의했다. 단, 경수로 제공은 핵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해결책’으로 검토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훗날 갈루치는 이 모호한 선언문 내용을 일컬어, 경수로를 제공한다는 “약속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도록 일곱 차례나 수정한 다음에야 겨우 합의에 이른 표현”이라고 말했다. (같은 책 431쪽)
미국 측은 “약속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도록” 고심해서 모호한 표현을 짜냈지만 북한 측은 대만족이었다. 한 달 전 뉴욕의 제1차 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고 무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유엔헌장 내용을 넘어서지 않는 약속 정도만으로 아무런 실질적 양보 없이 북한의 NPT 탈퇴 보류를 얻어냈지만 북한 측은 그때도 대만족이었다.
미국 대표단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 아무런 양보도 아무런 약속도 하지 못하게 하면서 회담장에 내보내는 것은 병사에게 총알도 주지 않으면서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부 요직의 윗사람들은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아무 생각도 없이, 상황에 떠밀려 대표단을 보낸 것이었다.
회담을 시작할 때는 수석대표 갈루치도 별 생각이 없었다. 어떤 협상조건을 허용해달라고 윗선에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막상 북한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북한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회담의 성과를 바라볼 수 있을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뉴욕에서도 유엔헌장 범위 안이니까 아무런 양보도 아니라는 입막음 아래 북한 측이 원하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리고 제네바에서도 구체적인 약속을 해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북한의 요청이 장차 논의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1993년 7월 제네바에서의 제2차 회담을 끝낼 때 미국은 북한의 경수로 획득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을 뿐, 그 획득을 도와줄 구체적 방법의 의논은 제3차 회담으로 미뤘다. 그리고 북한이 IAEA 및 한국과의 관계를 잘 풀어나갈 것을 회담 재개의 조건으로 설정했는데, 그 조건이 잘 충족되지 않았다. 그래서 1년 넘게 지난 1994년 8월에야 제3차 회담이 열려 ‘포괄적 타결’을 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미국은 군사적 해결책을 검토하는 상황을 겪고 남한에서는 ‘불바다’ 소동이 일어나는 등 북핵위기의 ‘위기성’이 부각된다.
미국이 1년 동안 북미회담 재개를 의도적으로 지연시켰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본다면 그 기간의 ‘위기성’ 부각 덕분에 포괄적 타결에 따르는 재정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막대한 경수로 건설비용의 대부분을 남한과 일본에게 떠맡기는 것이 북핵위기의 부각 없이 가능했을까? 미국이 회담 재개를 일부러 늦춘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재정 대책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재개를 서두를 입장이 되지 못했으리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은 제2차 회담에서 원하는 해결 방향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회담 재개가 늦춰지자 비공식 루트를 통해 더 구체화한 ‘포괄적 타결’ 방안을 미국에 알렸다. 10월 중순 게리 애커만 하원의원의 평양 방문을 수행한 케네스 퀴노네스를 통해서였다.
애커만을 수행했던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국무부 소속 북한 담당자 C. 케네스 퀴노네스는 북-미 회담 성사에 일익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북한 외교부는 양국 현안을 놓고 퀴노네스와 오랜 대화를 나눈 끝에 일련의 해결책을 정리한 서류 한 장을 그에게 건넸다. “북한은 NPT에 잔류하고 IAEA가 실시하는 정기적인 사찰을 수용할 용의가 있으며 IAEA가 요구한 ‘특별사찰’ 문제를 토의하기로 한다. 그 대가로 미국은 ‘팀스피릿’ 훈련 중단과 대 북한 경제제재 조치를 철회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지체됐던 3차 회담을 재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북한의 주고받기식 제안은 그들의 협상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은 ‘일괄 타결’ 식의 동시다발적 포괄 협상보다 합의를 향해 한 단계씩 나아간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북한 외교부는 이 제안이 북한 최고 지도부의 승인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두 개의 한국> 434쪽)
퀴노네스는 이때 평양에서 받은 문서 내용을 <한반도 운명> 242-243쪽에 밝혀놓았는데, 이와 대조해 보면 오버도퍼의 요약은 정확치 못하다. 무엇보다 미국 측 의무 중 “핵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에 경수로 제공 책임을 질 것”이 빠져 있다. 퀴노네스가 밝힌 문서 내용은 이듬해 여름 제3차 회담을 거쳐 ‘제네바합의’로 이뤄질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담은 것이었다. 퀴노네스는 이 문서가 구속력 없는 극비문서인 ‘비문서’라고 설명했다.
북한 측은 평양 체류기간 중 나를 이용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미스터 리는 수시로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에 대한 미국의 입장, 팀스피릿 및 그와 관련된 주제를 놓고 우리의 생각을 떠봤다. (...) 그래서 결국 나는 문서로 그 내용을 작성해서 보여주기 전에는 이제 워싱턴의 그 누구도 그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판문점으로 떠나던 날 아침 일찍, 리는 내게 ‘비문서’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는 내가 비문서의 외교적 개념을 설명해 주기 전에는 그 어떤 문서도 남길 수 없다고 우겼다. 그는 처음에는 웃으면서 물었다. “어떻게 문서가 비문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비문서란 정부 간에 교환되는 극비문서라고 나는 설명해주었다. 따라서 이 문서가 만에 하나 외부에 유출될 경우, 예를 들어 대중에 누출될 경우 정부는 모두 비문서의 신빙성을 부인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리가 내게 비문서를 줄 수 있지만 혹시 누출될 경우 북한은 이 문서 자체를 부인할 수 있었다. 리는 그 아이디어가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핵문제에 관한 문제의 비문서를 작성하느라 북한 대표단이 밤을 새웠다고 생색을 냈다. 문서를 받아들면서 나는 그에게 북한 정부의 어느 선까지 그 문서에 담긴 내용을 승인했느냐고 물었다. 리는 ‘최고지도자’도 비문서의 내용에 만족했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나 역시 문제의 비문서를 누구에게도 유출시키지 않고 바로 미국 정부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한반도 운명> 241-242쪽)
퀴노네스를 이 시점에 평양에 보낸 사실이 북한과의 대화를 미국정부가(적어도 국무부가) 원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듬해 6월 평양 방문을 앞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게 퀴노네스가 브리핑을 해주지만 수행은 허용되지 않았다.
오후 늦게 크리크모어 대사는 국무부에 다시 와서 내게 이번 방북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그것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한국과장에게 물었다. 그러나 핵문제에 관한 나의 지식과 북한인들과의 친분 때문에 나는 카터 일행과 동행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반도 운명> 275쪽)
카터 방북 당시 특사가 아닌 개인 자격이었고 그 방북에 대해 미국 정부가 아무런 공식 책임을 갖지 않는다는 특별한 사정도 작용한 것이었겠지만, 북미회담 대표단 멤버인 퀴노네스의 평양 방문은 1993년 10월 당시에도 미국 측이 북한 측과의 소통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면 금지할 논리가 있는 것이었다. 퀴노네스의 경위 설명을 볼 때 ‘비문서’는 북한 측이 줘서 그냥 받아온 것이 아니라 그가 문서의 형식까지 설명해 가며 요청해서 받아낸 것이었다.
이 비문서에 담긴 북한의 포괄적 타결 제안이 “그들의 협상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고 오버도퍼는 봤다. 복잡한 협상을 최대한 간단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북한이 협상의 목적을 분명히 정해놓았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절실하게 추구한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준다. 불확실한 상태가 오래가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문서 교부를 북한 측 협상태도 변화의 결정적 계기로 볼 일은 아니다. 포괄적 협상의 절대적 키워드인 ‘경수로’를 북한 측은 6월 뉴욕의 제1차 회담과 7월 제네바의 제2차 회담에서 거듭거듭 꺼냈던 것이다. 뉴욕에서는 미국 측의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고, 제네바에서는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불가침 약속과 에너지원 확보를 통해 우리 체제를 보장해 달라. 그러면 당신네가 제기해 온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내용의 포괄적 타결안을 북한 측은 뉴욕회담 이전부터 세워놓고 있었고, 미국이 이 제안을 들어주는 데 따라 차츰 구체화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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