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 22일 뉴욕의 유엔 미국대표부로 북한의 김용순 로동당 국제비서가 찾아가 캔터 국무부 차관을 만난 뉴욕회담은 당시 진행되고 있던 한반도 해빙의 흐름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그런데 이 회담에서 보인 미국의 경직된 태도가 이후 북핵문제의 난항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서울 불바다” 발언에까지 이르게 될 북핵문제의 난항에 물론 북한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북한의 책임만은 아니다. 북한의 입장을 어렵게 만든 미국과 남한 정부의 책임을 살펴본 다음 그에 비추어 북한의 책임을 평가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지난 회에 이어 미국의 관리, 학자와 언론인의 진술을 통해 미국 입장의 문제점부터 살펴보겠다.
뉴욕회담 후 북한은 NPT 규정에 따른 IAEA 사찰을 받아들이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가장 중요한 조치가 5월 4일에 최초보고서를 제출한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규정의 요구보다 훨씬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고, 특히 90그램의 플루토늄을 추출해 놓았다는 것은 미국 정보기관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놀라운 사실이었다.
북한의 이 적극적인 공개를 학자이자 언론인인 리언 시걸은 ‘보여주고 말하기(show and tell)’ 정책으로 해석한다. 자기네의 협상 의지를 입증할 만큼을 공개하고 나머지 정보는 협상수단으로 쓰기 위해 보류해 둔다는 것이다. (<미국은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구갑우-김갑식-윤여령 옮김, 사회평론 펴냄> 61쪽) 그런데 대다수 미국 관리들은 북한의 전략을 ‘속이고 후퇴하는’ 것으로 오판했다고 시걸은 비판한다.
북한이 최초보고서에서 모든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더라도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고 하는 시걸의 관점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미국 측은 거짓을 찾아내는 데만 몰두했고 최초보고서를 북핵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미국 정부의 분위기를 시걸은 이렇게 설명했다.
부시 행정부의 정책은 일종의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표현된다. (...) 그러나 곧 완전한 채찍 정책으로 복귀하였다. 이것은 북한의 경제적 쇠퇴와 심화되는 정치적 고립을 이용하여 굴복을 강요하면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기 위한 사찰을 실시하여 IAEA와 남한 사찰단의 접근을 확보하려는 강압외교였다. 한 관리는 그 당시의 정책을 “계속 미소를 지으면서 북한을 압박하고 북한을 외길로 몰아가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캔터 국무차관은 행정부가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 북한에 어떠한 구체적인 유인책 또는 동기를 제공하거나 북한 관리와의 정치적 회담을 개최하는 것마저도 거부하는 강경노선”을 채택했다고 후일 밝혔다. (위 책 60쪽. 이 책은 번역과 편집에 아쉬운 점이 많아서 내 판단에 따라 글을 고쳐서 인용하며, 고친 곳을 일일이 표시하지 않는다.)
최초보고서 제출 이후 미국 측의 ‘트집 잡기’와 북한 측의 반발이 이어지는 가운데 팀스피릿 재개 문제가 제기된 상황을 시걸은 이렇게 설명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팀스피릿 문제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가 개최되기 바로 전에 주요한 현안으로 제기되었다. 한-미 연례안보협의회는 1992년 10월 8일 워싱턴에서 개최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서울이 회담 후에 발표할 성명의 초안을 제출했을 때 워싱턴은 이것을 놓고 부처 간 논쟁에 휩싸였다. 서울이 제안한 내용은 “(남북 간) 상호사찰체제의 완수를 위한 중대한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팀스피릿을 재개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최대 관심사가 팀스피릿의 재개라고 생각하는 국무부 한국담당 부서는 그 결정을 격렬히 반대했다. 그리하여 성명의 문구를 완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IAEA가 북한과 성과를 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 작업을 지연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체니 국방장관은 훈련의 재개를 원했다. 국무부 한국전문가는 팀스피릿이 군사적 채널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국방부가 미국 정부 내의 “문제들을 때려 부술 수 있는 쇠망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팀스피릿을 위협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고, 우리가 위협수단을 사용함으로써 한국의 요구를 만족시켰을 때 이익 또한 명백했다.” 그와 국무부의 여타 한국전문가들은 “우리는 위협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다.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밝힌다면 북한은 반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이해했으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카트만은 “사람들은 해결책이 아니라 위협수단을 찾고 있었다. 이것이 이곳의 사고방식이었다.”고 설명한다. “경고의 목소리는 그보다 낮았다.” 팀스피릿을 반대하는 고위관리인 그레그 주한 미대사는 이러한 결정을 미리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시걸 위 책 69-70쪽)
팀스피릿 등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안보에 대한 위협이라고 하는 북한 주장에 대해 남한과 미국은 군대 유지를 위한 훈련일 뿐이라고 아직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을 보면 미국 관리들이 모두 팀스피릿을 북한에 대한 ‘위협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군사기술에 내가 정통하지 못하지만 ‘세계 최대’라는 규모를 보더라도, 또 ‘월남 패망’ 직후 확대된 상황을 보더라도, 단순한 훈련을 넘어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은 분명한 일이다.
팀스피릿 재개 방침이 제기될 무렵 남한 정부의 입장에는 상당한 혼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의 외교-군사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냉전기의 대결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전향적 북방정책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노태우 정권의 레임덕 현상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92년 10월의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서는 팀스피릿 재개 가능성이 조건부로 제기되었다. 그 후 두 나라의 대통령선거 기간에는 온건한 방향으로의 조정이 불가능했고, 두 나라에 들어선 새 정권 역시 온건한 정책을 앞세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고 시걸은 본다.
팀스피릿 중단은 일단 계획이 개시되자, 처음에 그 계획에 반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한 가지 이유는 새로운 대통령들이 국방문제에 대해 온건해 보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김영삼은 해외에서 풍파를 일으키기를 원치 않는 국내 개혁주의자였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군부로부터 의심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영삼은 군 수뇌부의 숙청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군부와 다른 충돌을 바라지 않았다. (...)
클린턴 행정부의 국방부 고위관리들은 팀스피릿이 군사적으로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북한의 적대적 대응을 우려했으나, 그보다는 중단에 대한 남한의 적대적 대응과 이로 인한 워싱턴에서의 정치적 불화가 중요했다. (시걸 위 책 72쪽)
팀스피릿을 재개하면 북한의 적대적 대응을, 재개하지 않으면 남한의 적대적 대응을 미국 정부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가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 하여 북-미 간 직접 대화를 몹시 꺼리던 상황을 생각하면 수긍이 가는 예상이다. 노태우 정권 말기-김영삼 정권 초기의 남한 정부의 입장과 태도는 나중에 살펴보겠다.
미국은 대외관계에 있어서 외교적 전통보다 군사적 전통이 강한 나라다. 그리고 국민의식 중에도 ‘미국예외주의’ 경향이 강해서 외부세계에 대한 이해력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에 정치계도 외교력보다 군사력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외교관의 역할을 자임하는 국무부 관리들에게는 이런 경향이 크나큰 질곡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북한인들과 다시 한 번 회동을 하자는 방안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가능성의 타진만 가지고도 워싱턴과 서울의 관료들은 두 파로 나뉘었다. 소위 온건파들은 외교 접촉 그 자체가 당근이나 채찍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그들은 이런 대화를 정치와 무관한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고 믿었다. 즉, 두 정부간에 문제가 있으면 다른 수단을 쓰기 전에 우선 문제를 풀기 위해 서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이것이 상식인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특히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에서는 북한이 외교적 대화에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나쁜 짓을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상황을 두고 북한 외교관과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서울과 평양 모두에 양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논리가 지속됐다. (퀴노네스 <한반도 운명> 120쪽)
미국 관계와 정치계의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상대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긴 데는 북한에 대한 증오심과 경멸감이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1950~53년 전쟁에서 체면 없이 물러난 후 많은 미국인들에게 북한을 거꾸러트려야 할 상대로 보는 시각이 남았다.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에 임해 북한도 동유럽 공산국들과 마찬가지로 굴복할 것으로 기대하고, 북한이 굴복하지 않자 자멸할 것으로 보는 관점이 유행했다. 미국 언론계와 학계를 통틀어 최고의 북한 전문가로 명성을 누려온 셀리그 해리슨은 이렇게 말한다.
1996년 1월 21일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 보좌관은 백악관 상황실에 나를 포함한 6명의 민간 전문가를 초청했다. 레이크는 남한 출장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반도 관련 업무를 다루는 관리 8명이 그 토론에 참석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북한이 독립된 국가로서 계속 생존해 나갈 것이라고 얘기했다. 레이크를 비롯한 관리들은 모두 나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들 대부분은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과 붕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핵동결 합의에 따라 경제 제재를 완화하지 않으면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재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들은 나의 경고에 냉소를 보냈다.
(...) 김일성이 사망하고 기근이 오기 전에도, 소련이나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이래, 미국과 남한, 일본에서는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예견이 한반도에 대한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다. 손쉽게 북한을 동독과 비교하는 관행은 북한 역시 남한에 흡수되어 독일 통일 과정을 재현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광범위하게 퍼지게 했다. 그러나 그런 비교는 남북한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다는 역사적 현실을 무시한 것이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동방정책’을 시작할 때 그런 쓰라린 갈등의 역사를 극복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반도 엔드게임>(이홍동-김태호-류재훈-이재훈 옮김, 삼인 펴냄) 45-46쪽)
대외관계에서 외교적 관점보다 군사적 관점을 앞세우는 경향이 북한에 대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 2000년대 부시(자식) 대통령 집권기에 특히 강하게 나타나는 데 환멸을 느낀 투철한 보수주의자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는 <깡패국가>(김성균 옮김, 한겨레신문사 펴냄)에서 미국이 “변덕스럽고 부주의하고 믿을 수 없고 이기적인 나라”가 된 이유 세 가지를 지적한다.
1. 도덕적 우월주의: 미국적 가치에 동조하는 국가는 우방으로, 반대하는 국가로 적으로 규정하는 것.
2. 패권적 일방주의: 입으로는 국제법과 규범의 준수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자국의 가치와 국익에 따라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것.
3. 공세적 현실주의: 국제사회 안정의 기제인 주권 개념을 무시하고 잠재적 위협이 되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선제공격을 통해 위협의 근원을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 (13-14쪽 문정인의 “추천의 글”에 요약된 내용)
북한의 NPT 탈퇴선언이 팀스피릿 재개 방침에 대한 필연적 반응이었다는 점을 오버도퍼는 이렇게 설명했다.
놀라운 점은 양국의 국방장관이 연례 회담 자리를 빌어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겠다는 폭발성을 지닌 내용을 발표하면서도 이에 앞서 워싱턴 정부의 부처 간 정책위원회에 통보나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이나 도널드 그레그 주한 미국 대사에게 이 예기치 않은 결정은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것이었다. 그레그 대사는 훗날 이 날의 발표가 자신의 재임 기간 중 저질러진 대한 정책의 “가장 중대한 실수”였다고 평했다.
북한 정부의 입장에서 92년의 팀스피리트 훈련 취소는 미국과의 관계 진전을 의미하는 가장 분명한 가시적인 증거였으며 그같은 미국의 양보는 북한 군부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미국 정부는 한-미 양국의 연례 실전훈련을 자국의 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북한의 두려움에 냉소를 보냈다. 그러나 대규모 미군의 추가지원 병력의 해상과 공중을 통한 남한 도착, 핵무기 탑재능력을 갖춘 전폭기들의 비무장지대 인근 비행, 중무장한 한-미 지상군의 부대 이동 등은 북한에 강력한 위협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약 20년 전 팀스피리트 훈련을 구상한 사람들이 애초에 희망한 것이 바로 이런 효과였다. (...)
북한 정부는 한-미 양국의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는 “북남 관계의 진전에 제동을 걸고 북남 대화를 위기로 몰고 가기 위해 획책된 범죄적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북한은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이유로 들면서 공동핵통제위원회 회담을 제외한 모든 채널의 남북대화를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핵통제위원회 회담마저 중단했다. 북한은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결정이 “미국이 핵공격 위협을 포기하겠다고 한 약속을 저버리는 도발행위”라고 단언하며 IAEA 핵사찰을 거부할 수 있다고 처음으로 경고했다. (<두 개의 한국> 407-408쪽)
워싱턴포스트지 최고의 북한 전문가였던 셀리그 해리슨과 돈 오버도퍼, 제1차 북핵위기 당시 뉴욕타임스지 국제담당 논설위원이었던 리언 시걸과 국무부 코리아데스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케네스 퀴노네스, 그리고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를 자처하는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의 진술을 오늘 인용했다. 결코 ‘종북’ 편향으로 고른 증인들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북한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전문가들의 의견은 1990년대 초 ‘제1차 북핵 위기’에 미국의 책임이 크다는 쪽으로 모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책이 한반도에 대해서는 물론, 미국 자신에 대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잘못된 방향으로 결정된 까닭이 무엇일까. 전문가들의 냉철한 판단이 정책결정자들에게 외면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두 층위에서 문제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의 군사산업이 정책 결정에 개입하는 메커니즘이고, 또 하나는 미국의 전통적인 ‘애국심(patriotism)’이다. 두 가지 문제는 그 동안에도 계속 작용해 왔고, 앞으로도 작용할 것이 예상되므로 더 치밀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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