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더 포스톨(Theodore Postol)이란 사람이 있다. 1946년생으로 MIT에서 원자력공학 학위를 받은 후 연구소, 의회, 국방성을 거쳐 1980년대 말부터 스탠포드대학 등 학계에서 군사기술 관련 연구에 종사해 온 사람이다. 1992년 걸프전에서 패트리어트미사일 적중률에 대한 정부와 업계의 선전이 거짓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나선 후 미국 미사일방어망(MD, Missile Defense)사업의 앙숙 노릇을 해왔다.
MD란 적이 발사한 미사일을 요격하는 방어방법이다. 엄청난 속도로 비행하는 미사일을 요격한다는 것은 “총알로 총알을 맞추는” 것과 같이 어려운, 고도의 기술과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사업이 채택만 된다면 방위산업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고 정-관계에도 특급 떡고물이 쏟아질 수 있으므로 미국 집권세력에게는 대단히 유혹적인 사업이다. 개념도 명쾌해서 국민에게 선전하기도 쉽다. 누가 미국으로 미사일을 발사해도 MD로 막아주겠다는데, 세금 좀 잡아먹는다고 반대할 국민이 많겠는가.
MD에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그 하나는 효과적인 MD가 만들어질 경우 군사적 균형이 근본적으로 무너져 세계평화에 위협이 된다는 점이다. 1949년 소련의 핵실험 성공 이후 세계가 핵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미-소간의 핵균형 덕분이다. 미국이 MD 구축에 성공해 보복의 위험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면 외부의 적에게 마음 놓고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이 꼭 나쁜 나라라서 이런 걱정을 하는 게 아니다. 군사력의 비대칭 상태가 전쟁을 유발하기 쉽다는 것은 군사학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대다수 미국인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미국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 미국인에게 좋은 일이라고, 세계평화가 깨지든 말든 미국이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 미국 정치계에서도 이 문제가 무시되기 쉽다.
또 하나 문제는 이와 달리 미국인들이 심각하게 여기고 따라서 미국 정치계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세금을 쏟아 부어도 효과적인 MD 구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포스톨 같은 MD 반대자들은 이 문제의 지적에 주력해 왔다.
걸프전쟁에서 이라크의 대표적 공격력이 스커드미사일이었다. 부시(애비) 대통령은 스커드 요격에 사용된 패트리어트미사일 제조업체 레이시언사 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요격 성공률이 97퍼센트를 상회했다고 자랑했고, 미 육군도 요격 성공률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80퍼센트, 이스라엘에서 50퍼센트에 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런데 포스톨은 의회의 한 위원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이들 예비적 연구에서 나타난 증거에 따르면 요격 성공률은 10퍼센트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0퍼센트일 가능성도 있다.”
나중에 의회 소위원회에서 채택한 보고서에는 이런 대목이 들어있었다.
“패트리어트미사일 체제는 걸프전에서 미국 국민들이 믿도록 오도된 것과 같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라크가 발사한 스커드미사일 중 패트리어트미사일로 요격에 성공한 것이 몇 개를 넘어선다고 볼 만한 증거가 거의 없고, 그 몇 개에조차 의문의 여지가 있다. 미국 국민과 의회는 전쟁 중부터 전쟁 후까지 행정부와 레이시언사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일방적 성공 주장에 오도되어 왔다.”
미사일 요격이란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것이다. 총알로 총알을 맞추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과 같이. 그런데 공격미사일 발사에 비해 월등한 기술이 필요하고, 설령 그런 기술이 확보된다 하더라도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것이다. 아무리 충분한 기술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유의미한 성공률을 가진 요격미사일 발사에는 표적으로 하는 공격미사일 발사보다 최소한 백 배 이상의 비용이 든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상식이다.
이런 상식을 내가 파악한 것은 크레이그 아이젠드래스 등의 <미사일디펜스>(들녘 펴냄)를 번역한(천희상과 함께) 덕분이다. 2002년에 나온 책이지만 MD 사업의 기본 성격을 살피는 데는 충분히 도움이 된다. 이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미사일방어망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각 시기는 분통이 터질 정도의 유사성으로 그 직전의 시기를 되풀이한다.
1. 첫째, 이러저러한 미사일방어망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과학자-무기연구소-방산업체-싱크탱크-정치인의 연합 그룹들이 있다. 이 연합 그룹들은 서로 반주를 맞춰가며 군사적 위협을 과장한다. 그러면서 개발 중인 미사일방어망의 조기 배치를 위해 비현실적인 주장들을 늘어놓는다. 그들은 종종 경쟁적으로 치열한 로비 활동을 벌여 백악관과 의회에서 자신들이 내세우는 미사일 방어망에 대해 어느 정도 지지를 얻어낸다.
2. 예산이 책정되고, 무기연구소. 방산업체와 대형 계약을 맺는다. 정치인들에게는 선거 운동 자금과 지역구 일자리가 약속된다. 계속 연구와 실험이 늘어나고, 무기 연구소와 방산업체는 그 결과들을 왜곡한다. 부정적인 연구 및 실험 결과는 정치적으로 은폐된다. 미사일 방어망이 배치 단계로 접근하면, 그로 인한 군축협정과 대외관계에 대한 잠재적 해악도 무시된다.
3. 옹호자들의 주장과 달리 그 미사일방어망이 기대 이하라는 것이 마침내 밝혀지고 예산이 대폭 삭감된다. 또다시 과학자-무기연구소-방산업체-정치인의 연합 그룹들에 의해 새로운 미사일방어망 아이디어가 제출된다. 그리고 이 역사의 새로운 시기가 다시 시작된다.
1969년 시작된 미-소간의 제1차 전략무기제한회담(SALT I, 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I)에서 MD가 핵심적 의제가 된 것은 위에 말한 두 가지 문제점(군사적 불균형을 초래할 위험과 엄청난 비용) 때문이었다. 그래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Anti-Ballistic Missile) 조약이 1972년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되었다.
ABM조약을 뒷받침한 원리는 MAD(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상호확증파괴’로 흔히 번역되는데 만족스럽지 못하다. ‘공멸의 공동인식’이 더 정확할 것 같다.)였다. 어느 쪽이 선손을 걸든 양쪽 다 감당할 수 없는 피해가 분명히 예상되기 때문에 억지력이 작동하는 군사력 균형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1970년대 초 데탕트 상황의 ABM조약 체결은 MAD가 평화 유지를 위한 최선의 현실적 원리라는 데 양측이 동의한 결과였다.
ABM조약의 적용 대상은 전략무기에 대한 요격기술이었다. 전술무기에 대한 요격기술은 그 제약을 받지 않았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섰을 때 힘을 숭상하는 레이건은 그때까지 우세해진 요격기술을 발판으로 전략방어계획(SDI, 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선포했다. ABM조약을 형식적으로만 존중하면서 실질적으로는 MD 개발을 통한 군사력 무한경쟁을 선언한 것이었다.
반대자들이 ‘별들의 전쟁’이라고 조롱한 SDI가 1983년 선포되었을 때 소련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SDI 폐기는 소련의 가장 중요한 외교목표가 되었다. 1986년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에서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에게 SDI가 완성된 후 소련에게도 나눠줌으로써 불균형을 피할 생각이라고 말하자 고르바초프는 진지한 제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대꾸했다.
미국이 냉전 해소 직후 일으킨 걸프전쟁(1991년)의 목적 하나가 군사기술 업그레이딩에 있었다고 보는 비판적 시각이 있다. 실제로 미국은 최신 군사기술의 과시에 큰 노력을 기울였고, 패트리어트 요격기술을 부각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포스톨을 비롯한 비판자들의 지적과 몇몇 관계자들의 내부고발로 인해 애초 주장했던 높은 성공률을 깎아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실패가 부시의 재선 실패에 일부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MD 사업에 냉담한 클린턴 행정부는 MD 사업을 축소하려 했다. MD 추진세력은 MD 사업의 현상 유지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2001년 부시(자식) 행정부가 들어서자 MD 사업 부활의 길이 열렸다. 2001년 12월 부시는 ABM조약 폐기를 소련의 조약 승계국인 러시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통보했고, 6개월 후 조약이 폐기되었다. 미국 역사에 극히 드문 일방적 조약 폐기 조치였다. 그 후 MD 사업은 거침없이 확장되었다.
1972년 ABM조약 협상에 참여했던 존 라인랜더는 이 조약의 폐기로 “이 세계가 핵확산의 효과적 억지를 위한 법적 장치를 상실했다.”고 한탄했다. ABM조약은 냉전기 군비경쟁 억제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장치였다. 그 폐기는 핵무기의 자유경쟁 선언이었다. 이 조치가 9-11테러 직후에 취해졌기 때문에 부시 정부가 뉴욕테러를 조작했다고 하는 음모론 중에는 ABM조약 파기가 테러 조작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는 주장도 나왔다.
ABM조약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조약 파기가 핵군축 방침에 어긋나는 방향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보지 못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들을 무마하기 위해 부시 정부는 ‘불량국가(rogue states)’의 위협을 제시했다. 무책임한 국가나 테러세력의 핵위협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꼭 들어맞는 모델로 북한이 이용되었다.
1993년 제1차 ‘북핵위기’ 때 민주당은 백악관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의회에서는 열세였다. 어떤 정책의 추진을 위해서도 공화당의 전면적 반대를 피해야 했다. MD 사업을 마음대로 축소시키지 못하고 최소한 현상유지를 허용해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을 도와주는 것이 세계평화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클린턴 행정부 일각에 있었지만, 강한 힘을 갖지 못했다. 한편 세계평화를 바라지 않는 세력의 견제는 강했다. 북한과의 대화를 주장하는 국무부 관리들과 이에 반대하는 국방부 관리들 사이의 갈등 배경에는 미국의 군사정책에 대한 근본적 의견대립이 작용하고 있었다. 북한이 결국 국제사회 진입에 실패하고 ‘불량국가’의 대열에 들어선 것은 미국 군사주의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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