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진로를 놓고 그 '문명의 전통' 때문에 미국 같은 나라와는 힘을 행사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차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든데, 이런 식으로 말할 여지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나라가 제나라에게 거듭된 패전 끝에 땅을 떼어주기로 맹약을 맺을 때, 노나라 장군 조말이 단상에 뛰어올라가 비수로 환공을 위협, 땅을 빼앗지 않기로 약속을 받고야 내려왔다. 환공은 화가 나서 이 약속을 어기고 싶었는데 지키는 편이 낫다고 관중이 권해서 그대로 지켰다는 이야기가 <사기 자객열전>에 적혀 있다. 나도 더러 글에 활용한 일이 있다.
이 이야기는 "힘보다 덕이 낫다"는 정도의 막연한 교훈으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시스템공학이나 게임이론을 적용하면 이런 이야기에서 꽤 구체적인 의미를 뽑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빼앗으려던 땅의 가치와 "그런 상황에서 맺은 약속까지 철저하게 지키는구나." 하는 신뢰의 가치를 직접 비교할 수 있으니까. 이런 신뢰의 주체가 이웃나라에게 "당신네 나라를 향후 10년간 침범하지 않겠소." 하든지 "함께 저 나라를 공격하면 어떤 이득을 주겠소." 할 때 상대가 쉽게 믿고 호응해 준다면 믿음을 받지 못하는 경우보다 큰 이득을 볼 것은 분명한 일 아닌가.
그러고 보니 사대-자소의 관계에 대해 그런 식의 설명을 시도한 일이 있다. "이 세상은 큰 자와 작은 자들이 어울려 이뤄진 곳인데, 그 안에서 각자의 분수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조화로운 질서를 지킨다는 이념이다. 힘에 눌려 억지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천하 질서에 능동적으로 공헌한다는 명분으로 약자는 자존심을 지킬 수 있고, 강자는 약자의 태도가 일시적 득실에 따라 바뀌지 않으리라고 신뢰할 수 있는 길이었다. (...) 천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천하의 모든 세력을 끊임없이 힘으로 억누른다는 것은 오랫동안 계속하기 힘든 일이다. 제국 내에 있는 좁은 범위의 신민에게는 충의 이념을 적용하고, 제국 밖의 주변국이나 오랑캐에게는 작은 존재로서 주체성을 인정해주는 타합책이 현실적으로 유용했던 것이다." (<밖에서 본 한국사> 177-178쪽)
이런 이야기들을 수천 년간 새겨 온 사회의 진로 선택은 미국 같은 나라의 선택과 아무래도 같을 수 없을 것 같다. 교양 수준이 낮은 대중의 태도는 중국이고 미국이고 별 차이가 없겠지만, 지식층의 역할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의 직접선거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아 '비민주적'이란 비판을 받는 중국의 현 체제가 문명의 힘을 살려내는 데는 더 적합한 체제라 할 수 있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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