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장엽” 기사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되어 있다.
황장엽이 한국으로의 망명 전까지 김일성-김정일 부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자신의 신변불안과 위협 때문에 정치적 망명을 택한 후 비록 말년(末年)에 한국에서 반 김정일 활동에 진력했다고 하나, 오늘날 북한주민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족벌체제하에서 온갖 고통을 감내(堪耐)해야 하는 근인(根因) 중 하나인 주체사상을 정립하는데 적극 기여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죽기 전까지 김정일 체제의 잔혹상을 고발하고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북한 인권상황 개선을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했던 공과를 결코 폄하(貶下)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다.
1997년 2월 베이징 한국대사관으로 망명한 황장엽(1923~2010)은 김일성대학 총장, 조선로동당 국제비서와 총비서장,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낸 최고위급 인사일 뿐 아니라 북한의 통치이념이던 주체사상의 핵심이론가였다. 권력 측면에서나 사상 측면에서나 북한 지도부 중심에 오랫동안 있던 74세 노인의 망명은 누구에게나 놀라운 일이었다.
70세가 되어 “마음이 바라는 곳으로 따라가도 경계선을 넘지 않게” 되었다고 한 성인이 아니라도,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얕은 욕심이 잦아드는 것이 정상이다. 고희가 지난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새로 바라겠는가? 사람들이 그의 망명에서 순수한 동기를 기대한 것은 오랫동안 고위직을 지낸 경력 위에 그의 나이가 겹쳐진 때문이었다.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은 북한의 실상에 대해 그가 많은 중요한 사실을 정직하게 알려줄 것을 사람들은 기대했다.
남한에 와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회고록 집필이었던 것은 그런 기대에 부응한 일이었다. 1999년에 나온 회고록의 머리말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나의 삶을 마무리지으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진실을 밝히려고 했다. 내가 미워하고 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사실보다 나쁘게 평가하려 하지 않았으며,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원칙하게 미화하려 하지 않았다. 역사는 결국 모든 것을 제자리에 갖다놓기 마련이며 역사를 왜곡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다.
나는 나의 견해를 절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읽어주기 바란다. 사회공동의 이익과 관계 없는 개인의 사생활이라든가 다른 나라의 내정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될수록 언급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황장엽 회고록-“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시대정신 펴냄) 7-8쪽)
나는 북한 사정이 궁금하면서도 이 책을 읽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직한 기록이 아닐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 느낌이 든 까닭은 여러 가지이거니와, 무엇보다 부제에 쓰인 ‘진리’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진리란 믿음의 대상이다. 진리의 주장에는 그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그러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을 조장하는 의미가 있다. 남북 간의 경계선을 뛰어넘은 그의 망명이 대립의 초월이 아니라 새로운 대립구조로의 전환일 뿐이라는 의심이 이 말에서 굳어졌다.
결국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1980년대 공산권 붕괴를 앞둔 북한 상황을 살펴보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한 사정을 많이 전해준 인물로 박병엽(1922~1998,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선인 펴냄)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선인 펴냄) 등을 남김)이 있지만 그는 1980년대 초에 북한을 떠났고, 초기 북한에 대한 증언을 집중적으로 남긴 사람이다. 좀 미심쩍더라도 황장엽의 책을 “사실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읽지 않을 수 없다.
책을 펼치자마자 정말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를 절감한다. 자신의 인격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너무 ‘초현실적’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능력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고매한 인격, 성실한 인품, 투철한 책임감, 순수한 이상주의... 정말로 그런 특성을 다 갖춘 사람의 현실에 대한 기록이라면 참고 가치를 바랄 수 없다. 그런 깨끗한 인격자가 어떻게 더러운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참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은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을 할 동기가 있는 것이다. 그 동기를 이해한다면 그 거짓말이 가진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예컨대 황장엽은 자기와 맞선 사람들을 비판할 때 예외 없이 ‘아첨꾼’이나 ‘모략꾼’으로 매도한다. 사상투쟁이든 권력투쟁이든 아첨과 모략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보는 그의 인식이 여기에 비쳐져 있다. 그 스스로 어떤 자세로 투쟁에 임해 왔는지 알아볼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의 기록을 읽으면 투쟁의 양상을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황장엽의 거짓말이 없는 사실을 지어낸 것으로 보이는 대목은 별로 없다. 사실의 해석에서 황당하게 치우치는 문제 정도로 생각된다. 그런 해석을 그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것이라면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반대자들을 아첨꾼으로 몰아붙이는 그가 자기 자신의 행동을 스스럼없이 적은 것을 볼 때, 자신은 아첨꾼이 아니었다고 진심으로 그가 믿었다면 도저히 정상적 정신상태로 볼 수 없다.
당시[1970년대 중엽] 나는 김일성의 아들과 딸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기반이 확고하지는 않더라고[도] 불안해 할 정도는 아니었다. 김일성은 자식들인 김평일, 김영일, 김경진 등을 위해 자주 특강을 해주었다. 또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를 위해서는 아내가 그 집에 가서 살다시피하면서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나도 이따금 중앙당에 근무하는 김경희를 찾아가 강의를 해주었다. (<황장엽 회고록> 212쪽)
김경희-장성택 부부는 황장엽의 후원자로 여러 번 책에 나온다. 김일성과 김정일 이하 모든 중요 인물에게 잘 보이려고 그가 기울인 노력을 행간에서 끊임없이 알아볼 수 있는데 그 노력이 가장 큰 성과를 보인 상대가 김경희였고,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아내가 그 집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고 적었을 것이다. 김정일-김경희 남매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1980년대 초반인 듯.
하루는 김정일이 오랜만에 나를 술자리에 불렀다. 한창 연회가 무르익는데 김정일이 나더러 들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황 비서가 술을 한 잔 쭉 마시는 걸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그러자 동료들이 내 양쪽으로 달라붙어 강제로 술을 먹이려고 난리였다. 나는 입을 꼭 다물고 그들이 붓는 술을 절대로 입에 넣지 않았다. 그러자 술이 흘러 옷이 젖고 말았다. 동료들이 질려 물러나자 이번에는 김경희가 나섰다. 나는 그녀와의 관계도 있고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무안해 하지 않게 하려고 조금 마시는 척했다. 그걸 본 김정일이 직접 나섰다.
“모두 그만두시오. 내가 책임지고 마시게 할 테니.”
김정일은 자기 자리에 있는 술병을 들어 따라 주면서 덧붙였다.
“버티려면 끝까지 버텨야지, 경희가 먹인다고 드시면 됩니까.”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아 그가 따라준 술을 눈 딱 감고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술은 맹물이었다. 아마도 김정일은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어서, 색깔만 술과 같은 맹물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위 책 260쪽)
김경희가 나선 것은 왜였을까. “황장엽은 김경희 사람”이라는 평판이 파다하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몸싸움 수준의 권주에 목숨 걸고 저항하던 그가 김경희의 잔만은 마시는 척이라도 하는 걸 보며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었을까. 그걸 빤히 알면서도 김경희의 잔을 물리치지 못하는 황장엽. 그리고 김정일이 손수 나서자 목숨 걸고 그 잔을 털어 넣는 황장엽.
김정일과의 관계에 대한 황장엽의 인식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김정일은 김영주가 부총리에 있는 것도 껄끄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김영주를 자강도의 어느 산골로 보내 연금시켜 버렸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93년, 김일성은 자기 동생의 처리문제로 평판이 좋지 않고, 또 이제는 김정일의 경쟁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계산하여 김영주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형식상의 부주석을 시켰다. 그러나 김영주는 여전히 연금상태나 마찬가지였고, 업무에서도 철저하게 제외되었다.
김영주는 유배지에서 평양으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은 지지해도 정일이는 지지할 수 없다. 정일이를 망친 것은 황장엽이다.”
김영주는 내가 김정일을 망친 것으로 오해할 만큼 현실파악이 어두운 편이었다. (위 책 208쪽)
김정일을 ‘망친’ 사람이라면 어찌 보면 김정일을 ‘만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황장엽이 김정일을 극렬하게 비판하면서도 그 지도자를 자기가 만든 면이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 자부심이 김영주의 말 인용을 통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대학총장, 당 비서,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 당당한 자리에 앉아 있을 때도 그가 제일 공을 들인 일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연설문 대필이었다. 의욕적으로 쓴 연설문이 윗분에게 채택되는 장면을 그릴 때마다 그가 느꼈던 희열은 남한에 와서 쓴 회고록에서도 생생하게 나타난다. 인민이 받아들이는 지도자의 모습이 실은 자기가 써준 연설문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 것 같다.
황장엽은 1980년대에 대한 회고를 담은 제6장 제목을 “권력의 중심에서”로 했다. 그에게 득의의 시절이었고, 1979년 10월에 세워진 주체사상연구소가 그만의 권력기반이 되었다. 1980년대에 그는 당 과학교육비서와 국제비서란 요직을 지냈으나 연구소를 잠시도 자기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87년 주체과학원 청사를 용악산국립공원 밑의 좋은 부지에 지을 때의 회고에는 기쁨이 넘쳐난다. 그 무렵 김정일로부터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이 땅에서 가장 수재라고 소문난 사람들만 뽑아 황 박사 직속으로 두고 이론을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듣고 기뻐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선전부의 지원을 받는 사회과학원 학자들이 계속 나와서 주체사상연구소를 집요하게 중상비방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사회과학원에서 이론적으로 잘 무장된 학자들만을 뽑아 그들의 사상개조를 실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사회과학원에서 가장 실력 있고 주체과학원을 반대하는 데 앞장서 온 7~8명의 학자들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그러자 원장인 양형섭이 조직부를 찾아와서 이렇게 하면 사회과학원은 망한다고 우는소리를 했다. 하지만 조직부 간부과에서는 이 지시는 황 비서의 지시가 아니라 김정일 동지의 지시이기 때문에 반대했다가는 큰 문제가 된다고 위협하여 양형섭을 쫓아버리듯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학위를 받은 20여 명의 수재들을 엄선하여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오직 국제비서인 나에게만 소속된 집단을 만들어, 비밀유지를 위해 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이라고 명명하고 철학, 경제학, 정치학의 3개 분실을 두었다. 그들에게는 당 중앙위원회 직원으로서 온갖 혜택을 누리게 하는 한편, 학자로서의 특별대우를 받도록 하면서 노력동원에도 면제되는 특권을 주었다.
사회과학원에서 주체과학원으로 온 학자들은 한 달도 안 되어 자신들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러자 사회과학원에서는 그들을 변절자라고 비방하기 시작했다. 자료연구실 학자들의 실력은 급격히 향상되었으며, 이들은 비단 김정일이 요구하는 일만을 하는 게 아니라 주체과학원 학자들의 이론수준을 높이는 데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위 책 265-266쪽)
주체과학원을 만들면서 경쟁기관인 사회과학원의 알짜 인재들을 빼 오다니, 그것도 주체과학원 반대에 앞장선 사람들에게 “소환장”을 보내다니, 정말 악랄한 수법이다. 사회과학원장 양형섭이 누구인가. 김일성의 고종사촌 매부다. 김정일 후계구도가 확정되기 전까지 가장 강력한 김일성의 측근 중 하나였다. 김정일을 등에 업고 사회과학원을 초토화하면서 왕년의 권력자 양형섭을 물 먹이는 장면이다. 어찌 신이 나지 않겠는가.
제6장에서 황장엽은 주체사상연구소를 발판으로 얼마나 자기 활동이 신나게 펼쳐졌는지 적기 바빠서 당시의 정세 변화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중국의 개혁 개방”이란 제목의 절이 하나 있는데(261-267쪽), 진짜 중국에 관한 이야기는 두 쪽도 안 되고 주체사상연구소 이야기만 잔뜩 들어있다. “나는 북한도 하루빨리 개혁 개방으로 나가야겠다는 강한 충동을 받았다.”느니, “나는 틈틈이 국제부 요원들과 주체사상연구소 연구원들에게 변화하는 중국의 실상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정신을 일깨워졌다.”느니 하는 말은 회고록 쓸 때 생각나서 끼워 넣은 듯 뜬금없이 들린다. 아무 알맹이가 없다.
<황장엽 회고록>에서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1980년대 북한의 최고위급 인사 한 사람이(그것도 조선로동당 국제비서라는 사람이!) 세계정세 변화에는 별 관심 없이 주체사상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실을 더 중시한 다른 정치인들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황장엽 같은 인물이 득의의 시절을 보낸 것을 보면 당시 북한에서는 지배체제 정립에 바빠 현실 정책 생산이 뒷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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