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이 반포되고 대한민국 정부 조직 작업이 진행되는 한편에서 통일건국 추진세력도 통일독립촉진회(통촉) 조직을 진행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4월의 평양회담을 앞두고 결성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통협)의 확대-강화를 시도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드러난 문제는 유림의 반발이었지만,(1948년 5월 24일, 7월 10일 일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문제도 많았을 것 같다. 통협의 진로가 순탄한 전망이었다면 유림이 같은 불만을 가졌더라도 그토록 격렬한 표현은 삼갔을 것이다.

 

통일건국 추진세력의 진로는 유림을 떼어놓고 통촉으로 방향을 바꾼 뒤에도 순탄치 않았다. 통촉이 7월 21일 결성된 후 8월 1일까지 선임된 간부진의 면면을 보면 몇 달 전의 통협보다 훨씬 빈약한 감이 있다. 평양회담 후 이북에 주저앉은 민련의 주요 인물들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8월 5일 제1차 중앙상무위원회가 경교장에서 열렸지만, 주석 김구가 결석한 이 회의에서는 유엔 파리총회 대표단 파견 등 준비되었던 안건조차 처리하지 못했다.

 

8월 11일자 <조선일보>에 통촉의 지리멸렬한 상황을 지적한 기사가 나왔다. 중립적 언론에서도 통촉의 행보를 석연치 않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남조선 신정부 수립에 따르는 정계의 동향은 미묘한 바 있어 여당 격으로 신당운동이 대두하고 있는 반면에 기성정당 단체에도 불원하여 재편성이 예상되는 바인데 세칭 중간파의 연맹체인 통일독립촉진회가 분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즉 동 촉진회는 제2차 남북협상 지지파와 현상유지파와 남조선신정부 참여파의 3파로 분열될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 단적 표현으로 김규식 박사는 별항과 같이 UN총회에의 파견대표를 거부했고 제2차 남북협상조차 부인하고 이에 참여한 자를 처단할 것까지 언명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는 전혀 부지의 사실이라고 언명하였는데 기실은 제2차 남북회담의 개최 경위는 6월 29일부터 7월 4일까지 평양에서 제1차 회담에 참여 했던 민연 산하 제 정당 단체 대표는 공식 비공식 여하를 불구하고 참여했으며 한독당 대표만 불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북조선 측으로부터 김일성 김두봉 양씨의 6월 10일부 서한으로 양김 씨에게 제2차 회담을 6월 23일 만주에서 개최하자고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 박사는 회한으로 남조선 현실에 감하여 북행이 곤란하니 북조선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남조선 국회에 남겨둔 의석 백 명을 파견하여 이를 중심으로 남북회담에 대행하여 통일책을 협의하자는 것이었다. 이로 보아서도 김 박사가 제2차 남북회담 개최에 관하여 공사한의 접촉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은 민중에 대한 기만이라 하여 동 촉진회 간부 측에 물의가 되어 있으며 또한 UN참여 문제도 김구와의 주장과는 모순되고 있음을 여실히 입증하였다.

 

더구나 통일촉진회 구성에 있어서도 7·80정당 단체를 망라 운운하나 기실은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추진에 있어 독로당 유림 등과 대립되자 이 계열을 제외하고 통촉을 결성했으나 근민 민주한독당 등은 형식상으로 1·2개인을 포섭한데 지나지 않으며 간부인 선거에 있어 상무위원 13명의 명단은 과연 남북통일을 운위하고 각 정당 단체를 망라하였다는 기구의 대표인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으며 양김 씨의 비서진에 불과하다는 것이 또한 일부에서 지적 비난이 되고 있다. 여하간 이렇게 통촉은 확고한 당면목표가 없이 오늘날에 이르러 분열위기에 직면한 것이며 그의 금후 귀추가 주목되는 바라 한다.

 

기사 끝에서 통촉에게 “확고한 당면목표”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통렬한 지적이다. 통촉의 노선은 남북 어느 쪽의 단독건국에도 반대하는 것이었는데, 남북 모두 정부 수립이 맹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어느 쪽에라도 참여해서 다음 단계에서라도 통일건국의 길을 바라보려고 했다. 홍명희, 이극로 등 흠 잡을 데 없는 민족주의자들이 이북 정부 수립에 참여한 것도 그런 뜻이었고, 조소앙이 평양회담 후 이남 정부 수립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도 그런 뜻이었다.

 

통촉 참여자들은 현실이 요구하는 정부 수립의 과제를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고한 당면목표”를 가질 수 없었고, 민족주의자 동지들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좁은 길을 고른 것이다. 좁은 길 안에서도 합쳐지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7월 21일 통촉 결성대회에서 김규식의 치사 중 이런 대목이 있었다.

 

“어제 남조선 국회에서 대통령이 선출됐는데, 나는 과거에 나의 성명과 같이 반대도 안하고 참가도 아니하는 동시에, 그것나마도 잘돼나가기를 바라며, 그것이 정부가 아무렇든 간에 외국인의 군정부보다는 낫게 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북에 또 하나 정부가 선다면, 그 북정부와 남정부가 한데 합하여 우리가 살길을 얻기 바란다. 여러분은 앞으로 속히 다같이 중간이고 좌이고 우이고 할 것 없이 문자 그대로 통일을 완수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해주기를 바란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 남북협상>(서중석 지음, 한울 펴냄) 245쪽에서 재인용)

 

김규식의 단독정부 반대는 소극적 반대였다. 바람직한 길이 아니기 때문에 참가하지 않지만 적극적 반대는 하지 않고, 그 길을 통해서라도 최선의 결과를 얻기 바란다는 뜻이다. 8월 11일자 <조선일보> 위 기사 뒤에 실린 김규식의 기자회견 내용 중 이런 문답이 있다.

 

문: UN총회에 통촉 대표로 참석한다는데 언제쯤 출발할 것인가.

답: 이 문제는 통촉 결성대회에서 결의되었지만 제1차 중집회의에서 나는 남조선의 민중대표가 가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역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수반대표로 선임하였으나 기후 제1차 상위회의 석상에서 거부하는 의사를 표시했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문: 그러나 김구 씨는 부산에서나 인천에서 귀하가 파견된다고 언명하였는데?

답: 그것은 제1차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것만 알고 그 후 내가 불접수한다고 말한 것을 몰랐던 까닭일 것이다.

 

유엔총회 대표 파견은 통촉의 가장 중요한 투쟁방법으로 제기되어 있었다. 경력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김규식이 맡을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가고 싶지 않았다. 왜였을까?

 

그 뒤의 상황 진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유엔총회 개회에 임박해 통촉에서는 9월 23일 리 사무총장 앞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뒤이어 한독당에서 김구 주석의 명의로 별도의 편지를 유엔 임시위원단 앞으로 보냈다. 두 편지의 내용과 성격을 서중석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서한에서 통촉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은 유엔 총회가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를 결의한 1947년 11월 14일부의 정신을 관철할 것, 유엔 총회에서 한국문제의 정당한 해결을 얻기 위하여 한국인의 의사를 충분히 청취할 것, 본회는 유엔 총회에 절대다수의 한국인의 통일 열망을 대변하고 있는 본회의 대표를 참가시킬 것을 강력히 요청함 등을 주장하였다. 매우 온건한 주장이었는데, 김규식이 서명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며 그와 같이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독당에서는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에 의해 한독당 주석 김구의 명의로 9월 29일 또 한 통의 서한을 유엔 임시위원단에 보냈다. 그 서한에는 미-소 양군은 즉시 철퇴하고 그 진공기간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유엔에서 치안을 책임질 것, 남북지도자회의를 초집하여 남-북을 통한 임시중앙정부 수립방안을 작성할 것, 유엔 감시하에 절대 자유분위기를 보장하고, 새로운 남-북 총선거를 시행할 것 등이 쓰여 있었다. 철저한 유엔 중심의 통일방안으로, 남의 정부에서는 물론이고 소련과 북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 남북협상> 263-264쪽)

 

김규식은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결의만이 아니라 1948년 2월 26일 소총회 결의도 존중하고, 소총회가 결의한 ‘가능지역 선거’를 통해 성립된 대한민국 정부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면서 통일운동에 그 정부의 역할도 요구하는 그의 입장은 정부 참여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조소앙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정부 밖에서 민련과 통촉을 통해 자기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었다.

 

1947년 여름의 미소공위 좌초 이래 1년 동안 많은 정치인들이 건국방안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현실조건의 변화가 컸기 때문에 입장의 변화도 부득이한 것으로 대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김규식은 이례적으로 일관된 입장을 지킨 소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의 입장이 당시의 변화를 비쳐볼 수 있는 거울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김규식이 어떤 일에든 감정적 반응을 보인 일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8월 10일 북조선정권 수립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신경질적인 것이었다고 서중석은 평했다.

 

“김구 씨와의 공동성명(7월 19일)에 충분히 지적, 발표한 바도 있지만, 북조선의 일은 지금도 전혀 모르며, 소위 제2차 남-북 협상인지 하는 사한이나 공한의 통지를 개인으로나 또는 따로 받은 일이 없다. 그러므로 본연맹 산하단체이고 맹원들이 참가한 일이 있다면, 나로서는 누가 어느 때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고 또는 위임장이나 대표증을 발행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북조선에 따로이 정부가 서는 데 본맹 산하단체나 개인은 심사 처분하기로 되었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 남북협상> 258쪽에서 재인용)

 

4월의 평양회담을 잇는 제2차 남북지도자회의가 7월 초순에 열렸는데 김구와 김규식은 참가하지 않았다. 평양회담 이후 현실화된 남조선 정부 수립 작업에 대응해서 북측도 정부 수립에 나서려는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평양회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이 주장한 ‘전조선 정치회의’ 소집을 북측에서 외면한 상황을 이신철은 이렇게 설명했다.

 

1차 지도자협의회에서는 단독선거가 성공할 것에 대비해 공동성명서 마지막 조항에 단독선거와 그 결과 수립되는 단독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삽입했었다. 2차 지도자협의회 결정에서도 이 조항을 근거로 단독정부를 인정할 수 없음이 천명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공동성명서 3항에서 규정한 전조선 정치회의를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북측은 3항의 규정 중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 선택했다. 3항을 다시 상기해보면, 이 조항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외국 군대 철수 후 제정당 공동명의의 전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주의임시정부 즉시 수립”이라는 부분과, 임시정부 주도 아래 “총선에 의한 조선입법기관 선거 후 조선헌법 제정하고 통일적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부분이다. 앞부분은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었고, 뒷부분은 북측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북은 앞부분은 정세 변화로 실현할 수 없지만 뒷부분은 실천해야만 한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북한 민족주의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88쪽)

 

남쪽의 ‘총선거’는 이북의 100개 선거구를 보류해둔 채 ‘가능지역’의 200개 선거구에서 시행되었다. 북측에서는 이것보다는 ‘총선거’에 가까운 선거를 통해 전 조선의 최고인민회의를 만들고, 그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겠다고 나섰다. 제2차 지도자협의회가 끝난 이튿날인 7월 6일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상임회의와 북조선민전 중앙위원회를 거쳐 7월 9~10일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헌법 시행과 최고인민회의 선거 실시가 결정되었다.

 

북측의 선거 ‘가능지역’은 남측보다도 좁았다. 그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 ‘불가능지역’의 선거까지 시행할 방침을 세웠다. 공작원들이 유권자에게 일일이 투표와 서명을 받는 ‘지하선거’였다. 비밀선거, 직접선거 등 선거의 기본 원칙이 지켜질 수 없는 선거였지만, 부득이한 상황에서 민의 수렴을 위한 최선의 노력이라는 명분이었다.

 

7월 15일부터 시행된 지하선거의 결과는 해주에서 8월 23~25일간 개최된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채택된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 대표 선거 총화에 관한 결정”으로 공식화되었다. 이 결정에 따르면 유권자 8,681,746명 중 6,732,407명이 투표, 77.48%의 투표율이다. 이 선거로 선출된 대표자 1,080명 중 1,002명이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고, 여기서 360명의 조선최고인민회의 남조선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들은 8월 25일 선거로 선출된 212명의 북조선 대의원과 함께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했다.

 

남조선 지하선거는 선거의 기본 원칙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해 줄 수 없는 선거였다. 5-10선거도 문제가 많은 선거였지만 지하선거의 문제점은 그와도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신철이 <북한 민족주의운동 연구> 101쪽에 올린 “표 4”에서 1,080명 대표자가 남로당 137명을 비롯해 민독당 53명, 근민당 62명, 인민공화당 68명, 전평 66명, 전농 70명 등 꽤 고르게 갈라졌다는 사실, “표 3”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55퍼센트를 점했다는 사실 등을 보면 지하선거에 5-10선거보다 나름대로 뛰어난 점이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기본 원칙 준수 여부 외에도 선거의 정치적 성공을 가름하는 여러 조건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