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오전 국회 제37차 본회의에서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이 인준되었다. 재석 197인 중 찬성 110표, 반대 84표였다. 국회가 열리기 전에 이미 예상되고 있던 결과였다.

 

“총리 문제 명일로 최후결정 단계 - 무조건 승인할 기세 - 의원 간 양보 태도 농후”

 

명2일 국회에서는 신 총리 승인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오전 10시부터 제37차 본회의를 개회하기로 되었다. 이날 대통령은 신 총리를 지명하여 국회에 제출하기로 되었는데 금번은 국회 내외의 공기로 미루어보아 대통령이 지명한 인물이 그대로 통과되리라고 관측하고 있다. 즉 지난 30일에 열렸던 제36차 국회본회의를 계기로 국회의원 간에는 당파관념과 자아고집을 포기하고 정부수립을 촉진시키고자 초당파적 입장에서 “이번엔 대통령이 지명하는 인물이면 무조건 승인할 운동을 전개하고 당일 정오 국회 산업노동위원회 회의실에서 64명의 찬성자를 획득하고 동 석각에 이르러 국회 각도대표자는 백표 이상을 확보하기 위하여 동 운동을 추진시키고 있다 한다.

 

한편 한민당에서도 자당의 확집을 버리고 총리문제에 있어서는 각자의 행동자유를 묵인하였다 하는데 30일 오후에 이 의사를 이화장에 전달하였다 한다. 이로써 총리 즉결 운동은 착착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 무소속 측에서도 기보한 바와 같이 조소앙 씨를 총리에 고집하지 않는 만큼 2일의 국회에서는 대통령이 누구나 지명하든지 무난히 통과되리라고 보고 있다. 이로써 정부수립의 최대 난관이던 총리문제는 이제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1일)

 

해방 당시 임정에서 이범석의 직책은 광복군 3개 지대 중 제2지대장으로서 별로 두드러진 것이 아니었지만, ‘청산리대첩’의 후광을 가진 그는 사령관 이청천에 버금가는 위망을 갖고 있었다. 귀국 후 그가 벌인 조선민족청년단(족청) 사업을 1948년 1월 18일 일기에 소개했다. 이청천이 이끌던 대동청년단(대청)이 독자적 이념을 갖지 않은 행동조직에 불과한 데 비해 족청은 미군정의 지원 아래 상당한 독립성을 가진 하나의 세력으로 자라났다.

 

이범석의 국무총리 기용은 족청을 이승만의 친위세력으로 삼는다는 양해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윤영을 먼저 지명한 것은 이범석의 길을 닦아주기 위한 술수로 해석된다. 김성수와 조소앙을 내세우는 한민당과 무소속구락부의 예봉을 꺾어놓고 나서 이범석을 내세웠을 때, 지나친 비협조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조직적 반대가 없을 것이고, 각개 의원은 족청이란 독자세력을 가진 이범석을 반대하는 데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헌법에 국무총리의 임면에는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고, 국무위원의 임면은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동의로써 이뤄진다고 되어 있었다. 국무총리 임명이 인준을 받은 이제, 대통령은 국회의 간섭 없이 국무총리의 동의만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국무총리의 동의만 필요하지, 부통령의 동의는 필요 없었다. 8월 4일자 <경향신문> “대통령의 내상 임명에 부통령의 태도 자못 강경” 기사 중 “만약 이 대통령이 부통령의 의사를 무시하고 기어코 장모 씨로 내무장관을 임명하게 될 때는 이 부통령은 사임이라도 할 강경한 태도로 나아갈 것으로 관측”된다는 말이 있다. 장택상의 내무장관 임명설이 떠돌고 있었고 이시영 부통령은 이에 반대 입장이었는데, 이 시점에서 사임도 고려할 정도라면 여간 강경한 것이 아니다. 본인에게 전혀 없는 뜻을 기자가 만들어낸 것 같지 않다.

 

1948년 6월 24일 일기에서 노덕술, 최운하 등 수도경찰청 간부들의 고문치사 및 사체유기 사건을 조병옥과 장택상 사이의 파워게임으로 설명한 바 있는데, 7월 하순에 터져 나와 지금 한창 진진하게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7월 25일자 <동아일보>에 “고문치사? 수도청의 관계관 구금” 기사가 나온 데 이어 7월 27일자 <경향신문>에 “드러난 수도청 고문치사 사건 전모 - 장살(杖殺) 후 사체유기 - 수사과장 등 어제 송청”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기사 중 경무부 조병설 수사국장과 이만종 부국장의 기자회견 내용에 이런 대목이 있다.

 

문: 수도청 책임자는 이 사건을 아는가?

답: 알 것이다. 2월 3일 당시 경무부장이 직접 장 총감을 불러 고문 사실을 물었는데 그때 장 씨는 극력 부인하였다.

 

문: 사건 단서의 경위는?

답: 고문치사 했다는 노덕술의 진술로 취조에 착수했으나 장 청장의 부인으로 지금까지 내사해 왔던 것이다.

 

문: 책임자의 책임규명은?

답: 당연히 인책 사직해야 될 것이다.

 

‘책임자’란 장택상을 말하는 것이다. 노덕술이 “빨갱이 하나 죽여도 아무 문제없다”고 이 사건을 떠벌렸기 때문에 사건 발생 직후에 조병옥이 장택상에게 물어보았던 것이고, 장택상이 잡아떼니까 ‘내사’만 해 온 것인데 조병옥이 장택상 공격의 무기로 들고 나온 것이다.

 

7월 26일 경무부 수사국의 담화 발표와 기자회견이 있자 즉각 시내 도처에 수사 담당자들을 비방하는 벽보가 나붙었다고 한다. (<동아일보>1948년 7월 28일 “부패 경관 숙청”) 그리고 수도청 부청장 김태일은 이튿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26일 경무부 수사국장 동 부국장의 담화는 남조선의 엄연한 국립경찰을 파괴하고 신정부 수립을 목전에 두고 혼란을 일으킬 악질적 모략분자의 소행이라고 보는 동시에 동 담화는 전적으로 허위 날조임을 언명한다. (<동아일보>1948년 7월 28일 “고문치사는 무근”)

 

수도경찰청 간부가 상급기관 핵심 부서를 “악질적 모략분자”로 몰아붙이다니, 가관이다. 김태일은 7월 25일에 취조 중인 노덕술을 신원을 책임질 테니 잠깐 보내달라고 했고, 노덕술은 그 길로 도주, 잠적했다. 장택상이 정말 꼼짝 못하게 됐다. 핵심 피의자부터 빼돌려놓은 다음 처리 방법을 협상하려 했을 텐데, 진술과 증거를 다 확보해 놓고 노덕술이 도망하자마자 터뜨려 버렸으니... 장택상이 범인들을 비호해 온 사실이 그대로 들통 나 버렸다.

 

미군정 하의 남조선은 경찰국가가 되어 있었다. 이남의 경찰 인원은 해방 당시의 세 배로 늘어나 있었다. 이승만은 일찍부터 경찰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생각을 갖고 경찰 간부들과의 스킨십 확보에 공을 들여왔다. 이제 권력을 쥔 그에게 경찰은 권력을 휘두르는 데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될 참이었다. 경찰을 장악하는 자는 형식적 위계에 관계없이 이승만 권력체제의 제2인자가 될 수 있었다.

 

7월 31일자 <동아일보>에 “이 부통령과 부수사국장 요담”이란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이만종 부국장이 “이시영 부통령의 수차 요청에 의하여” 7월 30일 정오부터 한 시간 동안 만났다는 이야기다. 이시영이 왜 만나자고 했는지, 만나서는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경찰을 포괄한 내무부장관 자리에 장택상이 앉는 것을 이시영이 극력 반대한 이유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김태일 수도청 부청장은 노덕술을 풀어준 일 등을 이유로 7월 28일 경무부에서 정직처분을 받고 그 이튿날 경무부 사문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29일 “수도청 부청장 정직처분 - 금일 사문위원회 회부”) 그런데 그 날 이승만은 김태일을 불러서 만났다. (<동아일보> 1949년 7월 30일 “김성수 씨 등 대통령 요담”) 이승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족히 알아볼 수 있다.

 

결국 장택상은 외무부장관에 임명되고 내무부장관은 윤치영에게 맡겨졌다. 이승만의 심복 윤치영은 8월 2일 한민당에서 탈당했다. 당시 한민당 의원이던 노일환의 국회 발언을 문제 삼아 한민당의 당리당략적 편견을 비판한다는 이유였다. (<서울신문> 1948년 8월 3일) 경찰 경력의 장택상이 외무부로, 자칭 외교전문가 윤치영이 내무부로 가게 된 상황을 <경향신문> 논객 우승규는 이렇게 꼬집었다.

 

내무에 조병옥이냐? 장택상이냐? 몇 날 동안을 두고 항간에서는 멋대로들 떠들어오다가 막상 조각 뚜껑을 여는 마당에 조-장 양씨가 모두 미끄러진 것을 보고 우리는 놀랐다. 더구나 기상천외로 윤치영 씨가 임명되었다는 호방(呼榜)을 듣고 나선 두 번 놀랐다.

 

대체 이 대통령은 무엇을 보고, 또 누구의 천거로 초대 조각에 있어 이런 조각을 하는 것이냐? ... 하고 사회 각계는 물론 심지어 병문(屛門)-행랑(行廊)-주방(廚房)에서까지 기이경동(奇異驚動)의 희희(唏唏)하는 소리가 들려 나왔다. 윤 내무는 언필칭 국제외교법을 연구했다고 말한다. 더구나 지난번 총선거 때엔 입후보 선전삐라에 이것을 유일한 자가(自家)의 보도(寶刀)인 양 내세웠다. 그리하여 씨는 세간에 외교가로서 제1인자인상 싶은 인상을 주었다. (...) (<경향신문> 1948년 8월 8일 “초대 이범석 내각의 해부 - 각료들의 인물로 본 전도(前途)의 전망”)

 

이승만은 경찰 장악력을 가진 장택상을 내무부장관에 앉히고 싶었다. 한민당에 등을 대고 있는 조병옥은 장택상만큼 고분고분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장택상은 너무 평판이 나쁜데다가 경찰로는 최악이라 할 고문치사 사건의 배후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눈 딱 감고 임명하려 하니 부통령 사임설까지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심복 윤치영에게 내무부장관을 맡겼다. 경찰을 직접 장악하겠다는 뜻이었다. 제 딴에 열심히 키워놓은 경찰을 윤치영에게 넘겨주라니 조병옥이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몽니를 부린다. 그런데 조병옥은 뛰어난 싸움꾼이다. 대의명분을 싸움에 이용할 줄 안다. 경찰 지휘권 이양 과정의 갈등을 그린 1948년 8월 31일자 <민주일보> 기사가 길기는 하지만 뜯어보면 참 재미있다.

 

경찰행정권 이양문제를 싸고 과정(過政) 조 경무부장과 신정부 윤 내무장관 사이에는 일종의 확집(確執)이 있는 듯한 공기가 있어 일반의 주목을 끌어 오던 바 수일 내 윤 장관은 “경찰행정은 이양 완료되었다”고 공식 발표를 하는가 하면 한편 조 부장은 “이양 완료란 허위발표”라는 반박담화를 발표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의아를 느끼게 하여 오더니, 30일에 이르러 양 고관은 드디어 정면으로 충돌하여 조 부장은 “윤 장관은 이양받을 용기(容器) 준비 없다”고 하고 윤장관은 “조 부장은 과거 군정 3년에 무엇을 하였느냐?”고 서로 매도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경찰계에는 물론 일반의 큰 주목거리가 되어 있다.

 

◊ 조 경무부장 담화 : 본 문제에 대하여 사실을 왜곡한 담화가 계속적으로 보도되어서 일반사회로 하여금 경무부에 대한 의아를 가지게 하고, 타방 국립경찰의 명령계통을 혼란케 하며 경찰의 사기를 저하케 하는 결과를 초치함은 천만한 인사이다. 원래 행정권 이양이란 과도기의 행정상 진공상태를 제거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정부와 군정 당국 사이에는 용의주도한 행정이양 원칙이 합의 결정되었는바, 그 주요한 부문으로서는

 

(1) 8·15는 대한민국 정부 존재를 국내·국외에 선포하여 군정이 소멸되는 동시에 군정이양을 인수할 그 정부를 인정한다는 것,

 

(2) 대한민국 급 미국 대표들은 군정 이양에 관한 교섭을 개시하여 그 합의를 볼 것,

 

(3) 각 부처의 신부(新部) 책임자들은 미인 고문 연석 하에 행정사무인계에 관한 개별적 협의를 거친 보고서를 미군주둔군사령관에게 제출하고 그 선포로써 행정권 이양의 효력이 발생한다는 것 등이다.

 

경무부 내에서는 전기 원칙에 준거하여 경찰행정 이양수속에 만반 준비를 하여 왔던 것으로 지난 24일 내무부 경무부 책임자들은 미인 고문 연석 하에 경찰사무 인계에 관한 사무를 교섭하여 우선 인계에 관한 원칙의 합의를 보고 조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무인계에 관한 조선인 및 미 주둔사령관에 대한 보고절차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내무부장은 24일부로 경찰권의 이양이 완료되었다는 공식발표를 하였고, 여하간 내각조직 이후 4주일의 시간을 통하여 경찰행정권을 받을 용기(容器)와 받을 사람, 즉 조직과 인사 등 긴절한 문제는 신비의 영역에 부치고 오로지 경찰의 붕괴작용을 유치하고 경찰조직 및 인사가 홍수같이 발표되었던 것이다.

 

경찰행정상 인계의 지연되는 이면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장관은 그 인계의 지연됨이 경무부장에게 있는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여 지난 28일 경성역에서 거행된 제주응원대의 송별식에서 경무부장에게 지연의 책임을 지우고 본인을 군정연장자 즉 반역자로서 체포하겠다고 폭언을 발하고 그리고 그 귀결은 본인이 알 바 아니나 동 장관은 지난 28일 각의에서 “경무부장을 반역자로 체포하자”는 발의를 하였다는 바, 이는 해방 직후 건준(建準) 도배가 일제행정기관을 접수하던 정신과 태도의 전철을 밟아온 것으로 생각한다.

 

경무부로서는 하루바삐 그 행정 이양을 하도록 만반준비 되었고 그런 의도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경무부 유일 최대한 관심은 그 이양방법에 있어서 치안에 이상이 없도록 하려는 그 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찰관의 이양이 완료될 때까지는 국립경찰의 지휘권은 경무부장의 장중(掌中)에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경찰이나 일반은 인식하라.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 경찰이나 군대에 지휘자가 두 사람 있을 수 없다. 각종의 정보와 과거 3년간의 치안책임자의 판단으로써는 앞으로 닥쳐올 2, 3개월의 치안사업은 용이한 것도 아니다. 바라건대 정부는 경찰 인계에 있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정부 보호를 위한 충성스럽고 능률 있는 경찰을 재편하기를.

 

◊ 윤 내무장관 반박 : 한편 조 경무부장의 담화발표가 있은 30일, 윤 내무부장은 조 부장의 담화에 격분한 어조로 책상을 두드리며 이를 반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대체 이양받을 용기가 없느니 인물이 없느니 함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언사는 대한국민으로서 감히 있을 수 없는 폭언이다. 경찰행정의 이양에 있어서 나는 임시 편법으로 내가 공안국장으로 이에 당하고자 한 것만으로도 증명되는 것이다. 그들은 군정 3년에 우리 민족 앞에 무엇을 해 놓았다는 말인가? 그 태도부터 불유쾌하기 짝이 없다. 여하간 조부장의 금번 담화를 나는 일소에 붙인다." 윤 장관이 국무회에서 조 부장을 군정연장자 즉 반역자로 규정하여 체포한다고 하였다는 데 대해서는 “어떤 놈이 그 말을 전하였으리라는 것도 나는 짐작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 공방전의 여파 속에 윤치영의 인품과 아울러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성격까지도 여실히 보여주는 상황이 벌어졌다. 9월 6일 국회에서 조병옥을 “민족반역자”로 매도한 발언을 따지자 윤치영은 자기가 그런 말을 한 일이 없고 언론에서 지어낸 말이라고 우겼다. 중앙청과 국회 출입기자단이 즉각 연명으로 아래와 같은 항의문을 국무회의와 국회에 제출했다.

 

“8월 31일부 도하 각 신문에 보도된 경찰권 이양에 관한 조 경무부장과 귀관의 담화에 대하여 귀관이 6일에 국회에서 행한 답변은 심히 유감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귀관은 조 경무부장을 반역자라고 한 것은 신문기자의 무한한 날조보도라고 말함으로써 이에 대한 일체의 책임을 신문기자에게 전가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불행한 사실입니까? 전 민족이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행정권 이양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한두 기자도 아니고 다수한 기자를 앞에 두고 귀관의 공공연한 담화가 한낱 신문기자의 날조보도로 그 책임이 전가된다는 것은 오직 조국독립과 민주건국의 성스러운 일념에서 분투하고 있는 우리 신문인 전체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신생정부의 책임 있는 장관으로서 취할 바 아니며 더욱이 일반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으므로, 여기 그 전말을 밝히는 동시에 이에 대한 귀관의 책임 있는 조치를 엄숙히 요망하는 바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 경무부장은 6월 30일, 신문기자단 회견석상에서 “윤 장관은 제주응원대 송별석에서 경무부장에게 경찰권 이양 지연 책임을 지우고 군정연장자 즉 반역자로 체포하겠다고 폭언을 발하고 28일 각의에서는 경무부장을 반역자라고 체포하자고 발의하였다”는 공식담화를 발표하였던 것입니다.

 

여사한 조 부장의 담화 직후 기자 일행은 귀관을 장관실로 방문하고 이에 대한 귀관의 의견을 물었던 것입니다. 동 석상에서 귀관은 흥분된 언조로 그러나 신문지상에 보도된 그대로 조 경무장관을 반역자라고 확인하는 동시에 군정 3년간에 있어서 그들의 죄상을 폭로하여 달라는 것까지 부연하였던 것이다. 신생정부의 책임을 맡은 귀관에게 국민의 일원이요, 보도의 중책을 맡은 신문기자가 무엇 때문에 날조기사를 쓴단 말입니까. 더욱이 귀관의 담화는 한 기자, 한 신문도 아니요 도하의 각 신문이 같은 내용으로 보도하지 않았습니까?

 

불리한 처지에서도 물러가지 않는 책임수행의 정신이야말로 과거 군정 3년에 통절히 느껴온 신생정부에 대한 국민의 요망인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백보를 양보하여 귀관이 조 부장에게 반역자라고 신문기자에게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귀관의 책임은 면제된 것이 아닙니다. 제주도응원대 송별석상에서 또는 각의에서 반역자라고 말하였다는 조부장의 공식성명에 대한 귀관의 태도가 표명되지 않은 이상, 귀관이 반역자라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표명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본기자단은 언론의 권위를 위하여 귀관의 무책임하고도 회피적인 태도에 항의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귀관의 선처하기로 속히 사회에 표명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경향신문> 1948년 9월 9일 “조 씨 반역자 문제, 책임전가는 부당”)

 

윤치영 얘기 꺼낸 김에 이 무렵 터진 일 하나 더 내놓자. 9월 8일자 <성조지>에 실린 윤치영의 인터뷰 기사 내용이 전해졌는데, “2주일 이내에 전 북조선을 점령할 수 있는 강력한 국방군을 창설하기 위하여 금후 최소 3년간 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48년 9월 11일 “미군 3년간 주둔을 요청 - 윤 내무장관 담 <성조기>지 보도”)

 

이에 대한 당시 몇 사람 국회의원의 논평을 훑어본다. 제헌국회에 민족주의 기운이 그리 강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 상식에도 대략 부합하는 반응에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윤치영이란 인간은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먹은 인물인지, 그런 인물에게 최강의 요직을 맡기는 이승만의 속셈은 무엇인지,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서울 11일발 조선] 9월 8일부 성조기에 보도된 내무부장관의 국방군 창설을 위하여 미군이 3년 간 계속 주둔하기를 요청하였다는 보도에 대하여 윤 장관은 이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데, 국회에서는 그 진부를 철저히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국회의원의 반향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조헌영 씨 : 윤장관이 그런 말을 안 했으리라고 믿는데, 말한 사람과 듣는 사람 간에 오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중대한 문제인 만큼 언급할 수 없다.

 

◊ 박윤원 씨 : 자주독립은 외군이 하루바삐 철퇴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고 보는데, 외군의 주둔을 원한다는 것은 남북통일을 방해하고 민족을 분열시키는 일방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며 특권계급정치의 발동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 장홍염 씨 : 신생 대한민국의 내무장관으로서 그러한 발언을 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 발언이 진언이라고 하면 이는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매국행위라고 인정한다. 그것은 UN결의에도 90일 이내에 철퇴하기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3년을 요청한 것은 언어도단의 매국행위이기 때문이다.

 

◊ 노일환 씨 : 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UN결정의 90일보다 다소 지연된다는 것은 시인한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방송(放送)정치가 아니고 책임정치이므로 정부 측에서는 마땅히 필요한 주둔기간을 민중 앞에 명시하고 그 기간 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인민과의 약속을 실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막연히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청하거나 혹은 윤 장관과 같이 3년간의 장기간 주둔을 요청하여 자기의 정치적 실패를 무력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전 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교란하는 군국주의의 재현을 꿈꾸는 침략사상의 노골적인 표현이니 그 발언에 대해서는 민족 장래를 위하여 철저히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윤재욱 씨 : 윤 장관이 그러한 발언을 안 했으리라고 믿는다. 만약 사실이라면 책임을 져야 하는 동시에 철저히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김인식 씨 : 그런 발언을 안 했기를 원하는 바이나 만약 했다면 그야말로 반민족행위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호남신문> 1948년 9월 14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