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두 번째 새해를 맞는 시점에서 이남과 이북에는 서로 다른 체제가 틀을 잡고 있었다. 이북에서는 1년 전에 세워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중심의 자치정권이 총선거를 통해 본궤도로 올라서고 있었다. 이남에서는 미군이 그대로 정권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조선인의 참여를 늘리기 위한 ‘조선인화’(Koreanization)를 추진하고 있었다.

 

애초에 미-소 조선 분할점령의 목적은 다음 단계로 예정되어 있던 신탁통치가 실현될 때까지 짧은 기간 동안의 질서 유지였다. 그런데 두 나라 사이의 연합국 협력관계가 무너지는 데 따라 조선 처리 방침에 대한 합의가 기약 없이 늦춰지면서 점령통치가 길어졌다.

 

소련은 점령통치 연장에 능동적으로 대응했다. 점령지역 조선인의 자치 수준을 단계적으로 높여가면서 점령군의 역할을 줄여나갔다. 점령 당초 인민위원회 자치활동을 지원-육성하는 방향을 잡은 이래 그 정책이 계속 발전해 온 것이다.

 

반면 미국은 조선인의 자치를 억압하는 정책으로 점령을 시작했다. 일본인의 통치기구를 그대로 두고 미군이 일본인 대신 통치자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점령 초기에는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았고, 몇 달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에는 일본인 통치에 협력하던 친일파 성향의 조선인들을 채용했다.

 

점령통치가 짧은 기간에 끝났다면 통치방법의 이 차이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1년이 지나자 미국의 억압적 통치방법이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제건설의 부진을 경제원조로 때워나가려 했지만 응급수혈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자라났다. 1946년 가을의 전국적 소요사태로 파탄이 드러났고, 남조선 통치는 경찰력을 비롯한 야만적 폭력에 더욱더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조선인의 자치 발전 여부가 미-소 군정의 성패를 갈랐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1946년 가을부터 ‘조선인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조선인화’는 본질적인 것이 못 되었다. 권력은 미국인이 그대로 쥐고 있으면서 조선인으로 구성된 입법부와 행정부를 필요한 범위 내에서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1946년 10월말의 선거를 통해 12월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출범시켰으나 진정한 대의기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입법의원이 의결한 법령에 군정장관과 주둔군사령관의 승인이 있어야만 효력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거라는 것도 선거의 기본요건을 갖추지 못한 엉터리 선거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선거’로 뽑힌 의원과 주둔군사령관이 임명한 같은 수의 관선의원으로 구성되었다. 대표성이 없는 기구였다.

 

입법의원이 개원 직후 반탁 결의안을 채택한 데서 그 정치색을 알아볼 수 있다. ‘반탁’은 극우반공세력이 미소공위를 통한 건국의 길을 거부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전형적인 파스시트 수법이다. 신탁통치를 감수하겠다는 의견을 무조건 민족반역자로 몰아붙임으로써 반대세력 탄압의 명분으로 삼는 세력이 입법의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미소공위, 즉 연합국 합의를 통해 순조로운 건국의 길을 찾고자 하는 일반 민심은 입법의원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었다.

 

허울이나마 선거를 통해 구성된 입법의원에 비해 행정부는 조선인의 민의로부터 더 격리되어 있었다. 각 부처의 장을 조선인으로 임명했지만 애초에 부처장으로 있다가 ‘고문’ 명목으로 뒷자리에 앉은 미군 장교들이 실권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게다가 조선인 부처장들도 표준적 조선인이라 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 통치기구에서 친일파가 자리를 얻은 것처럼, 미군정에서 자리를 얻는 조선인들은 ‘친미파’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친미파가 미국을 받드는 자세는 친일파가 일본을 받들던 자세와 닮은꼴이었다.

 

입법 측면에서도 행정 측면에서도 미군정은 조선인 자치를 근본적으로 발전시킬 뜻이 없었다. 그러나 소련 점령 하의 북조선에 비해 자치 수준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미국이 ‘민족자결주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평판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치 강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일제시대의 식민통치를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입법의원은 분명히 일제시대 중추원보다는 발전한 형태였다.

 

행정부에는 ‘남조선과도정부’란 이름을 붙여 모든 요직을 조선인에게 맡기는 방침을 세웠다. 민정장관을 그 수반으로 했다. 총독부체제와 비교하면 민정장관은 정무총감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최고통치권자인 주둔군사령관의 위상을 천황과 같은 것으로 볼 때 군정장관은 총독에, 민정장관은 정무총감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런 틀은 조선인 깔보기가 일본 식민통치보다도 더 심한 것이다. 하지 사령관 위에는 맥아더가 있었고 맥아더 위에 미국정부가 있었다. 총독부와 미군정의 내부 구조로 보면 정무총감과 민정장관이 같은 위상이지만, 그 옥상 구조를 보면 일본제국 내 조선총독부의 위상과 미제국 내 조선군정청의 위상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미군정 민정장관은 총독부 정무총감보다 실제 정책 결정권이 훨씬 작고 약한 자리였다.

 

미군 준장이 맡던 민정장관 자리 하나를 조선인에게 주는 것이 미군정 ‘조선인화’의 최대치였다. 실권이 없고 상징성만 있는 자리인 만큼 이 상징성을 잘 살릴 인물로 미군정이 영입한 것이 안재홍이었다. 안재홍은 민족주의자로서 반공 성향이기는 하지만 미군정 주변에 꼬여들고 있던 정략적 ‘반공주의자’들과 달리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미군정의 대다수 조선인 간부들이 일반 조선인들에게 ‘통역정치’의 손가락질을 받던 풍조에서 벗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선인화’의 상징성을 최대한 부각시킬 수 있었다.

 

안재홍의 민정장관 기용은 1946년 여름 이래 계속되어 온 미군정의 좌우합작 지원의 흐름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좌우합작위원회로부터 입법의원의 관선의원 추천을 받고 김규식을 입법의원 의장에 앉힌 일과 함께 미군정이 중도파를 ‘조선인화’의 전면에 내세운 방침을 보여준다.

 

그 동안 미군정과의 밀착관계를 통해 세력을 키워온 한민당 세력은 이 방침에 경계심을 일으켰다. 실제로 경찰과 군정청의 인사개혁을 중도파에서는 주장해 왔고, 1946년 10월의 소요사태를 계기로 미군정이 이 주장을 받아들을 조짐도 많이 보였다.

 

이런 마당에 안재홍이 민정장관에 취임하자 한민당 쪽에서는 “1개월이 넘지 않는 동안 이 자를 쫓아내고 말겠다”느니, “그 위인이 군수 하나도 못 내어보고 꼼짝 못하고 쫓겨나게 만들겠다”느니 하는 장담이 나왔다. 실제로 한민당에 동조하는 과도정부 간부들이 안재홍의 업무에 많은 제약을 가했다.

 

미군정의 중도파 등용에 한민당보다도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이승만이었다. 1946년 12월부터 1947년 3월까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이승만은 미군정의 좌우합작 지원을 용공정책으로 매도하며 공화당 극우파의 환심을 사려 했다. 민주당 지지자인 하지 사령관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다시피 했다. 격분한 하지는 이 무렵의 한 편지에서 이승만을 ‘개새끼’ 수준의 욕으로(son of bitch) 지칭하기까지 했다.

 

1947년 초 마셜 장군이 장관에 취임한 국무부가 미소공위를 지지하는 노선이었기 때문에 미군정의 좌우합작 지원정책이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내내 중국 특사로 활동한 마셜은 장개석 정부의 개혁을 강하게 요구하며 맹목적 반공 지원을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중국에서 공산당의 통일전선 노선 앞에 허약한 국민당 ‘반공주의’의 모습을 살펴온 그로서는 조선에서도 맹목적 대결보다 미소공위를 통한 절충을 바람직한 노선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냉전을 몰고 온 미국의 대 공산주의 대결정책이 그의 이름을 딴 ‘마셜플랜’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마셜플랜의 배경이 된 ‘트루먼독트린’에 트루먼의 이름이 이미 쓰이지 않았다면 마셜플랜도 ‘트루먼플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지 모른다. 마셜플랜에 앞서 독일의 패전 책임을 가혹하게 추궁한 미국 정책이 ‘모겐소플랜’이란 이름으로 불린 것도 당시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의 본인 의사와 관계없는 일이었다. 모겐소나 마셜이나 정책 수행 주무장관으로서 그 시기 미국의 대외정책에 이름을 남긴 것이다.

 

트루먼독트린은 1948년 3월 12일 트루먼의 의회 연설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스와 터키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막대한 원조를 의회에 요청하는 연설이었다. 미국은 이미 연합국부흥기구(UNRRA)를 통해 대규모 해외원조를 실행해 왔는데, 이제부터 ‘반공’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기준으로 원조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 터키와 비슷한 취지로 조선에도 대규모 원조를 제공할 가능성이 바로 떠올랐다. 딘 애치슨 국무차관이 3월 25일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이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언명했다.

 

트루먼독트린은 남조선의 분단건국과 이승만의 권력 장악을 향한 길을 뚜렷하게 만들어주었다. 트루먼독트린이 나온 몇 달 후까지도 국무성과 미군정 등 미국의 미소공위 관계자들은 미소공위 성공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러나 1947년 7월에 접어들며 난항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자 일전직하 파탄의 길을 치닫는다. 조선 문제의 유엔 상정이라는 미국의 대결정책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트루먼독트린이 대 조선 정책에 확정적으로 적용되는 데 몇 달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1948년 4월 21일 이승만은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귀국했다. 10개월 전 정읍에서 분단건국 가능성을 처음 꺼낼 때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꺼냈다. 좌우합작을 지원한다고 하지 사령관을 용공분자로 몰 때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미국이 대 공산주의 대결정책을 국가 기본정책으로 내건 이제 그의 분단건국 주장이 선지자의 예언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정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몇 억 달러 규모의 대 조선 원조는 마치 그의 지혜 덕분에 만들어진 하늘의 선물처럼 보이게 되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