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2월 4일 기자회견을 가졌다고 한다.

 

“부정경관 파면 5천7백여 명 - 수도청 관하”

 

경찰관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장택상 총감이 취임 이래 파면된 경관이 수도청 관하에서만 5,773명이 1946년 1월부터 1947년 12월 말 사이에 숙청되었다는데 매일 평균 7명의 파면자를 낸 셈이다. 이에 대하여 장 총감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건전한 민주경찰을 확립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부 직업정치배들은 경찰을 자가 수중에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모략과 중상을 하나 건전한 민주경찰 노선으로 매진하고 앞으로도 비민주적 경찰은 단연 숙청할 방침이다. (<동아일보> 1948년 2월 5일)

 

5천7백여 명이라면 수도청 인원 전체에 맞먹는 숫자다. 6천 명 규모의 조직에서 2년 동안 파면자 숫자가 6천 명이라면 그 조직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일까? 낚시터에 고기가 많다는 말을 “물 반 고기 반”이라고 과장하기도 하는데, 그 2년 동안 수도청 경찰관 노릇 한 자들 중 절반이 범죄자였단 말 아닌가. 범죄를 목적으로 한 조직이 아니고는 범죄자 비율이 이렇게 높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수도경찰청이 범죄조직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파면자 통계가 2월 초순에 나온 게 웬 일일까? 거대한 경제현상처럼 집계가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전년도 말까지의 통계가 나온다면 연초에 나오는 게 정상이다. 한 달이 지난 뒤에 이런 통계를 내놓는 것이 무슨 까닭일까?

 

경찰개혁 문제가 유엔위원단에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일으킨 잘못된 문제들을 다 감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택상은 어마어마한 파면자 수를 내놓으며 “그 문제 일으킨 놈들은 다 잘랐습니다. 이제 깨끗한 수도경찰청이 되었습니다.” 하고 있는 것이다. 수하 경찰관의 절반이 범죄자가 되어 파면당하도록 수도청을 조직하고 이끈 자신에게 책임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는 모양이다.

 

유엔위원단 제1분과위의 자비(시리아)만이 아니라 제2분과위의 잭슨(오스트레일리아)도 공정한 선거를 위해서는 경찰의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고 있었다. 1948년 2월 7일자 <경향신문> “5월 중에 총선거를 실시” 기사 중 “서울 UP특파원 스탠리 리치 제공 조선”이란 바이라인 아래 이런 내용이 있다.

 

위원단 대변인의 담(談)에 의하면 잭슨 호주대표는 조선의 여론이 일종의 선거를 행하기를 요구는 하고 있으나 이는 남조선 경찰 제도를 어느 정도 근본적으로 변경하고 위선 레이크석세스로부터 이에 관한 권한을 확보하는 것을 조건으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잭슨 대표는 조선인 대표와 협의하고 있는 제2분과위원회의 위원장인데 자유선거를 실시하려면 남조선 경찰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2월 초에 들어 유엔위원단은 1차 활동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조선인 초청 협의 일단락 - 금일 전체회의 개최 - 조위 업무 결정적 단계에”

 

3일 전체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던 유엔조위에서는 재작 2일 군정청 안[재홍], 조[병옥] 양씨와의 협의를 하고 주목을 끄는 전체회의를 금 4일로 연기하였음은 기보하였거니와 작 3일에도 하오 3시부터 제2분과위원회를 열고 조선 인사와의 협의를 계속하여 장건상 씨를 초청하여 협의하기로 되었는데 불참으로 협의치 못하였다.

 

서면으로 제출하는 의견서는 앞으로도 계속 접수하여 조선민족의 자국의 독립을 향한 구상을 규찰(窺察)할 것이거니와 초청 협의는 이것으로 일단락을 짓고 선거법도 유엔조위의 법률고문 슈라이버 박사가 그 동안 입의 4씨 및 중앙선거위원 등을 초청하여 연일 선거법 세칙 문제에 관하여 토의하여 왔는데 선거법 세칙 문제에 관한 토의도 지난 2일까지의 회합으로 완료하였다 하며 이에 대하여 소식통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회합에서 토의한 선거법 세칙은 입의에서 제정한 선거법과 대동소이하다고 한다.

 

입국 이후 여러 방면으로 협의를 마친 조위의 4일 전체회의는 소련의 입국거부 고집에 대처할 결정적인 유엔조위의 대책이 조선 민중의 대표적 인사들과 협의한 결과를 참작하여 결정될 것이므로 조선 전 민족의 주목을 끌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2월 4일)

 

2월 4일 전체회의에서 몇몇 위원의 발언에 대한 이런 보도가 나왔다.

 

“중-비 대표 총선거를 주장 - 외인 기자가 본 조위 전체회의 내용”

 

[주 서울 AP특파원 로버츠 제공 합동] UN조선위원단은 4일 소련 측의 입경거절 문제를 토의하였는데 석상 중국대표 유어만(劉馭萬) 씨는 남조선 선거를 역설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총선거가 근근 실시되지 않는다면 이 아세아국가에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조선인은 너무도 오랫동안 정부를 갖지 못하였다. 본 위원회는 미군 점령 하에 있는 남조선에 있어서의 선거를 추진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필리핀 교체대표 루나 씨는 동씨와 동일한 견해를 표명하고 남조선은 전 인구의 3분지2를 포괄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프랑스대표 폴 봉쿠르 씨는 동위원회는 좀 더 사태를 연구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며 UN소총회는 조선에 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씨는 동경 상해 및 남경의 프랑스당국자와 조선 사태에 관하여 협의코 2일 서울에 귀착하였던 것이다.

 

한편 시리아대표 자비 씨는 동위원회는 모든 문제를 일체 소총회에 회부할 것을 주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재로서는 선거를 위한 자유로운 분위기를 운위하기가 곤란하다. 남조선 지역에 있어서의 선거를 즉시 실시할 것이냐에 대하여는 상당히 광범한 반대가 있다. 나는 본위원회가 UN에 대하여 남북조선 정치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감정을 표명하기 위한 공동회담의 개최를 건의할 것을 제시하는 바이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6일)

 

위에 일부 인용한(2월 7일자 <경향신문>에서) “서울 UP특파원 스탠리 리치 제공 조선” 바이라인 기사는 2월 7일자 <조선일보>에도 게재되었는데, <경향신문> 기사에 없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5일의 회의가 끝남에 있어 남조선 즉시선거를 희망하고 있는 나라는 필리핀뿐이며 중국대표 유어만(劉馭萬)도 이 제안에 어느 정도 찬성이며 그는 소총회가 조선 문제를 담당하기에는 너무나 약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다. 위원단 대변인은 회의경과에 관하여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캐나다 인도 엘살바도르 각국대표는 대체로 위원단이 그의 조사결과를 소총회에 보고하고 훈령을 요청하라는 호주대표 결론을 지지하였다. 소총회의 대표를 파견할 것인지는 6일에 표결될 것이며 기술적으로는 미결이나 동 제안이 가결될 것은 거의 확실시된다. 그리고 위원단은 비공식으로 5월1일을 선거실시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위원들의 의견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중국과 필리핀대표는 소총회에 보고할 필요도 없이 바로 남조선 총선거 실시를 주장했고, (2) 소총회 보고를 지지한 위원 중에 일부는 그 보고를 요식적인 것으로 여긴 것 같으며, (3) 시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대표처럼 총선거 실시를 위해서는 여건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 위원도 있었다.

 

유엔조선위원단의 사명은 조선 독립의 길을 순탄하게 닦아줌으로써 세계평화를 굳건히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위원들의 실제 판단은 자국 형편,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 좌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과 필리핀은 미국의 원조와 정책에 크게 의존하는 나라들이었다. 시리아는 미국의 이스라엘 독립 지원 정책에 불만을 가진 나라였다. 프랑스는 미국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국제관계에서 미국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착잡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과 관계가 나쁘지 않으면서도 미국과의 관계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나라들이었다. 자국 형편에 크게 좌우되지 않고 본래 사명에 충실할 수 있는 그런 나라들이 많았다면 유엔이 제 구실을 훨씬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위원단 안에만이 아니라 1948년의 세계 전체에 그런 나라가 몇 되지 않았다.

 

결국 유엔위원단은 3월 12일에 ‘가능지역 선거’를 4대 2(기권 2)로 의결하게 된다.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 인도가 찬성,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가 반대, 시리아와 프랑스가 기권이었다. 찬성 4개국 중 3개국은 자국 형편에 따라 찬성이 예상되는 나라들이었는데, 인도의 찬성이 뜻밖이었다. 그래서 모윤숙이 대한민국 “건국의 어머니”, 메논이 “건국의 아버지”란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1948년 1월 30일자 <경향신문>에는 “남조선 단독선거는 소 측 소망 허용 결과 초래”란 제목으로 미국 <스크립스 하워드>지의 사설을 소개한 기사가 실렸다. 인용된 사설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조선문제에 관한 분의(紛議)는 이제 결정적 단계에 이르렀다. 소련은 UN조선위원단의 북조선 소련점령지대 입경을 거부함으로써 고의로 총회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만일 UN조선위원단이 남조선에만 단독선거를 실시한다면 이는 소련의 북조선 노예화 및 남조선에 대한 적색침투와 함께 조선을 분해하려는 크레믈린의 소망을 허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총회의 결의는 전 조선의 총선거의 실시와 이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을 명확히 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합법적 도의적 그리고 전략적 견지에서 UN위원단은 소련측 거부에 의한 위원단의 사무상 장해를 소총회에 보고하는 동시에 지시를 요청해야 할 것이다.

 

한편 소총회는 동 위원단에 대하여 소련군 당국의 방해로 말미암아 저지당할 때까지 동 위원회 사무를 진행시키도록 지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폭력이 행사되는 경우에는 소총회는 소련에 의한 UN의 권한무시 거역행위를 공공연히 선언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후에는 안전보장이사회 내 소련 측 거부 행사로 말미암아 강요되는 미국 기타 연합국의 여하한 조치도 조선의 자유와 국제권한을 옹호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논조로 보아 우익 신문이 분명하지만, 남조선 단독선거가 북조선의 분리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이승만은 그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었던가? 몇 주일 후 3-1절에 단독선거 추진 세력이 연 중앙정부 수립 결정안 축하 국민대회의 이승만 연설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남조선에 정부 수립이 되면 남북 분열을 영구히 인정하는 것으로 남북이 병행할 수 없으므로 총선거는 지지할 수 없다는 말이 있으나 이것은 사리에 당치 않는 말이다. 사람의 몸에 한편이 죽어가는 경우에는 살아있는 편이라도 완전히 살려서 죽은 편을 살리기를 꾀할 것인데 다른 방책 없이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면 살아있는 편까지 마저 죽여 버리자는 것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2일)

 

이런 것 보면 이승만, 참 말은 잘한다. 비유가 정말 그럴싸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싸해도 비유는 비유일 뿐이다. 현실과 겉도는 비유는 사기꾼의 벌이를 도와줄 뿐이다.

 

해방을 맞은 조선 민족은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살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일어날 자리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고 있어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었다. 건국을 늦추고 분단을 피한다 해서 민족의 숨이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문제 많은 사람이기는 해도 결코 바보는 아니었다. 미국 기자가 알아보는 현실을 그가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엉터리 비유로 현실을 가려 가며 분단건국으로 일로매진한 것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욕심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욕심을 채울 때 덩달아 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를 떠받들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