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위원단 제2분과위는 서면 접수를 기본으로 하면서 몇몇 중요 인물은 위원회에 출석시켜 토론도 가지기로 했다. 1월 26일 오전에는 이승만이, 오후에는 김구가 위원단 전체회의에 초청되었다.

 

“2 영수와 초(初)회담 - 작일 2분위 4차 회의에 초청, 이 박사와 김구 씨의 의견을 청취”

 

초회의 이래 제3주에 들어간 UN조위는 26일 오전 10시반부터 가·호·불·인·비·중·시 등 7개국 대표 전원 출석 하에 덕수궁에서 제2분위 제4차 회의를 열고 조선인의 의사를 청취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날 최초로 이승만 박사와 회담하였다. 즉 제1분과위원회는 오전11시부터 이승만 박사를 초청하여 비공개리에 동 오후1시15분까지 2시간15분간 회담하였는데 동 회의 내용은 별항과 같다. 그리고 오후에는 1시반부터 김구 씨와 회담하였고 27일에는 오전10시부터 김규식 박사와 회담하기로 되었다. 이로써 제2분위는 조선 정치요인과 회담을 개시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27일)

 

이승만은 회담 직후 기자들과 이런 문답을 나눴다.

 

(문) UN위원단과 회담한 후의 감상은?

(답)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내가 생각하는 바나 별로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문) 제2분위와 회담한 내용은?

(답) 상세한 것은 별항과 같다. 나는 남북통일을 위하여 UN과 협의하여 먼저 남조선 총선거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UN과 미국이 협조하는 것이요 우리와도 협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문) UN조위의 북조선 입국거부에 대한 동 조위의 태도는?

(답) 그것은 나로서는 말 못하겠다. UN조위가 대책을 강구할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27일)

 

유엔위원회는 1월 27일 오전에 김규식을 초청했고 오후에는 여운홍을 초청했다. 그 사이에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와 백영엽 재남 평북도민회장이 함께 회담에 참석한 시간이 있었는데, 이북 사정을 진술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성수도 27일 초청 예정이었는데 29일로 미뤄졌다. 그런데 1월 29일 제2분과위가 유엔위원회 공보 제20호를 발표했다.

 

“조선인과의 협의는 의견 청취가 목적”

 

유엔조위는 29일 공보 제20호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공보 20호 “조위 제2분과위원회의 초청을 받은 인사 중 1인이 자기가 분과위원회에 진술한 의견은 동 분과위원회의 의견과 동일 회의에 출석한 조위 대표들의 의견에 합치하였었다고 기자단에게 발표하였다고 보도된 것을 조위 제2분과위원회는 알게 되었다. 제2분과위원회는 보도된 바의 이러한 발표가 동 분과위원회 구성원들의 입장을 그릇 표시한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자 한다. 제2분과위원회가 현재 내밀(內密)로 협의를 하고 있는 그 목적은 각계의 조선인 여론대표들의 의견을 알기 위함이다. 동 분과위원회는 자신의 의견을 발표치 않았으며 따라서 동 분과위원회의 초청을 받은 인사가 여하한 발표를 하더라도 그 책임은 전적으로 발표한 그 인사에게 있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30일)

 

위원단은 그 인사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바로 짐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독자들도 바로 짐작했을 것이다. 유엔위원들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제멋대로 선전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이승만은 1월 31일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

 

“내가 유엔 제2분과위원과 회담한 후 서울 어떤 신문에서 내가 한 말이라고 기재하여 내 의사가 유엔 제2분과위원들의 의사와 합치했다고 한 것은 전연 오전(誤傳_이다. 내가 이런 말을 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엔대표들이 자기들이 의사를 발한 일이 없었으니 내 의사가 어찌 합하고 합하지 않을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해 신문기자가 내 말을 오해한 것이 분명하니 나의 뜻한 바는 유엔의 목적이 총선거로 독립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은 다 우리와 같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한인공산분자들이 유엔위원단원에 대해서 의혹과 우려를 주게 했으므로 이런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 (<동아일보> 1948년 2월 1일)

 

이승만이 일으킨 구설수는 구설수일 뿐이었다. 반면 유엔위원회에 제출한 김구의 의견은 엄청나게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김구는 1월 28일 자신의 의견서를 공개했다. 1월 29일자 <서울신문>에 전문이 게재되었는데,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1. 우리는 신속한 총선거에 의한 한국의 통일된 완전자주적 정부만의 수립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현 군정의 연장이나 또는 임시적으로 군정을 연장시키는 우려가 있는 소위 남한 단독정부도 반대하는 것이다.

 

2. 총선거는 인민의 절대 자유의사에 의하여 실시할 수 있게 되기를 요구한다. 북한의 선거가 소련군정의 세력을 등지고 공산당이 비민주적으로 선거를 진행한 것과 같이 남한에서도 미군정 하에 모 1개 정당이 농단할 것이다. 말로만 자유로운 선거를 할 수 있다고 성명하고 형식적으로만 선거를 진행한다면 이것은 반대하지 아니할 수 없다.

 

3. 북한에서의 소련의 입경 거절로 인하여 완전 자주독립의 통일적 한국정부를 수립하는 과업을 UN이 포기하거나 혹은 그 과업에 사호라도 위반되는 다른 공작을 전개하려 한다면 반드시 불행한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4. 현재에 남조선에서 이미 구금되어 있으며 혹은 체포하려는 일체 정치범을 석방하기를 요구한다. 남한에서만이나 북한에서만의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양 지역에서 동시에 석방하기를 주장한다.

 

5. 미소 양군이 즉시 철퇴하고 한인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입장에서 민주적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케 하자는 소련의 주장은 원칙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부 수립 후에 철퇴하자는 미국의 주장도 무리한 것은 아니다. 그 절충안은 미소 양군을 즉시 철퇴시키고 한국의 치안책임을 UN이 담당하는 것이다.

 

6. 남북 한인 지도자회의 소집을 요구한다. 미소 양군이 철퇴하는 대로 즉시 평화로운 국면을 조성하고 그 평화로운 국면 위에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하여 조국의 완전 독립과 민족의 영원 해방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공동 노력할 수 있는 방안을 작성하자는 것이다.

 

지난 11월의 각정당협의회(정협) 노선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김구는 11월 말 이래 정협 노선을 포기하고 이승만의 이남 총선거 노선을 받아들이면서 민족대표자회의(민대)를 국민의회에 통합시키는 데 주력해 왔다. 장덕수 암살사건의 여파로 인해 이 통합 작업이 난항을 겪다가 1월 중순에 와서 통합대회도 열지 못한 채 형식적 통합의 절차만 밟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십여 일이 지나는 동안 두 조직의 진정한 통합이 이뤄질 전망은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는 유엔위원단에 대해 이승만과 다른 입장을 밝힌 것이다. 전국학련, 여자국민당, 국민청년대, 청년조선총동맹, 독촉국민회, 서북청년회, 조선민주당 등 우익 단체들이 벌떼처럼 비판에 나섰다. 그분이 그럴 리가 없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든가, 지금까지 해 오신 주장과 어긋나지 않느냐는 지적이 주였다.

 

그런 가운데 가장 신랄한 비판은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한협)에서 나왔다. 반탁세력 일부가 제2차 미소공위에 참여하면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임협)을 결성했는데, 최근 이름을 한협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 주축인 한민당이 장덕수 암살을 계기로 김구에게 적대적 태도를 굳힌 흔적을 느낄 수 있다. 한민당의 자체 논평은 이 시점에서 따로 없었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30일)

 

“철병과 남북회담설은 소련 주장을 대변 - 김구 씨 민족진영 이탈?”

 

지난 26일 김구 씨는 유엔위원단과의 협의에서 남북총선거와 남북요인회담 그리고 미소 양군이 철퇴한 후에 남북총선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기자에게 말한 바 있었는데 각 정당 단체에서는 이것은 결국 군정을 연장시킬 것이며 공산주의자들의 주장과 동일하다 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 성명서: 저 마의 38선을 제거하고 남북을 통한 총선거를 행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은 우리 삼천만 동포 전체의 절실한 요구이다. 유엔총회의 결의도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민족 전체의 요구에 합치되는 것으로서 우리의 절대 환영하는 바이니 그 실현이 하루라도 속하기를 바라마지않는 바이었다.

 

저 공산당 좌익계열에서 앵무새와 같이 소련의 주장을 암송하여 미소 량군이 동시철병한 후에 남북 요인이 회담하여 정부수립문제를 해결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소련을 조국으로 아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지마는 그렇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언설을 행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바로서 그들도 결국 모스크바 방향을 지향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니 우리는 계선을 명백히 하여야 할 것이다.

 

김구 씨는 신문기자들에게 말하기를 “미소 양군이 철퇴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 상태로서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다. 양군이 철퇴한 후 남북요인이 회담을 하여 선거준비를 한 후 총선거를 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구 씨의 이 주장은 유엔총회에 있어서의 소련대표의 주장과 꼭 일치한 것으로서 소련은 조선의 김구에게서 그 충실한 대변인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소련의 주장은 유엔 총회에 있어서 43대 0으로 패배한 것으로서 조선의 독립 결의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외국군대의 철퇴 남북요인의 회담 후의 총선거정부 수립 듣기에 퍽 달콤하고 좋은 듯한 논(論)이다.

 

그러나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에 이것은 조선 전체를 소련에 넘겨주는 것이라고 하여서 민족진영에서는 전체적으로 반대하고 또 김구 씨 자신도 반대하고 세계의 민주주의적 제 국가도 단호히 반대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한독당의 위원장인 김구 씨가 가장 중요한 이 시기에 그와 같은 발언을 하였다는 것은 결코 조변석개적 일시적 과오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고 심사숙고의 결과라고 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그는 그의 자살적 행동으로서 참으로 해괴할 일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동씨가 평소 주장하여 오던 민족주의적 입장과는 판이한 것으로서 결국 조선을 소련의 위성국가화하려고 하는 의도를 표현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금후에는 김구 씨를 조선민족의 지도자로는 보지 못할 것이고 크레믈린 궁의 한 신자라고 규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유감으로 생각하지마는 사실은 어디까지든지 사실로 인식하고 그에 대처해 나가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한독당은 이 한협 성명서를 “한민당 선전”으로 간주하고 담화문으로 반박했다.

 

“한협 성명에 한독당 반박”

 

한독당에서는 김구 씨의 의견서에 대하여 공박한 한민당 선전에 대하여 여좌한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1. 북한으로부터 입경 거부의 정식 통지도 없는 이때에 남한의 단독조치를 부르짖는 것은 한민당이 본래부터 통일정부를 희망치 않았음을 대중 앞에 고백하는 바이다.

 

2. 금일 미소 양군철퇴를 반대하는 그들은 전일의 주장과 모순됨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미군정을 희망하고 있다.

 

3. 김구 선생의 주장은 UN이 치안책임을 진 뒤에 철퇴하라는 것이다. 한국의 통일을 성공할 수 있는 첫 조건은 한국을 미소 양국의 세력범위에서 분리시키는 것이다.

 

4. 정치관계로 죄명을 쓰고 있는 이들은 정치범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입장은 북에 있는 정치범 석방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5. 남북 요인의 회담을 주장하였으나 한민당의 중상모략과 남로당의 무성의로 인하여 역효과를 보게 되어 일시 보류하였으나 미소 양군이 철퇴할 자유로운 환경이 될 때에는 이것을 다시 한 번 소집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외인의 주장에 앞서 먼저 통일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

 

6. 한민당에서는 자기 이해로 타산하여 민족영수를 모략한다. 우리는 민족진영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이런 모략을 분쇄하여야 한다.

 

7. 김구 선생은 애국운동을 위하여 모욕당하는 것을 개의하는 바 아니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1일)

 

유엔위원단에 밝힌 김구의 의견은 분명히 일반의 예상과 다른 것이었고, 그로부터 일어난 파장이 신문 지면에 크게 나타났다. <동아일보>는 2월 1일자부터 5회에 걸쳐 아무 신분 표시 없는 김희경이란 필자의 글 “김구 선생님에게 올리는 글월”을 연재했다. 한 여성 숭배자의 목소리를 빌려 한민당의 공격을 쏟아 부은 것이다. 그 도입부만 옮겨놓는다.

 

“이번 유엔위원단과 협의하신 결과 선생님께서는 미소 양군의 철퇴와 남북요인회담에 의한 통일선거를 주장하셨다고 하는데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미소 양군의 철퇴와 남북통일의 선거! 이 얼마나 우리의 갈망하는 일입니까마는 백만으로 기도해도 이것이 안 되니까 만부득이해서 남한만이라도 전국적 총선거를 하자고 한 것이 아닙니까. 한데 선생님이 오늘날 반동분자들의 구두선을 그대로 되풀이하여 우리의 독립전선에 이상을 야기하셨으니 이런 기막힐 일이 또 어대 있단 말이오.”

 

한편 <경향신문>에는 2월 3일부터 4회에 걸쳐 ‘고쟁생(苦諍生)’이란 필명의 필자가 쓴 “3영수 협의론”을 연재했다. 선정적인 <동아일보> 연재물과 달리 문제의식이 투철한 칼럼이었다. 필자는 김구의 주장을 비판하지만 <동아일보>나 한민당의 비판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한 대목을 옮겨놓는다.

 

“김구 선생은 한국의 통일된 완전 자주적 정부 수립을 위해서는 인민의 절대 자유의사에 의하여 전국을 통한 총선거가 실현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미소 양군이 즉시 철퇴하되 철퇴 후의 소위 진공상태의 치안은 미소 양국 대신에 UN이 책임져서 남북에 현존한 군대 혹은 반 군사단체를 해산하여서 일단 평화로운 국면을 조성하면 UN도 그 감시의 목적을 달할 것이요 한인도 자유스러운 선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UN 소 대표가 무조건으로 금년 정월까지 동시 철퇴하자고 주장한 것에 비해 볼 때 철퇴 후의 진공상태 기간의 치안책임을 UN이 져야 한다는 점이 다르고 보니 이것을 곧 소련 주장과 동일시하는 한협의 견해는 망단(妄斷)이라 할 것이다. 요는 UN이 소위 진공상태의 치안을 책임질 능력이 있느냐가 문제이다. UN이 그러한 능력 내지 권한을 가졌다면 우리는 김구 선생의 의견을 절대 지지하겠다.

 

그러면 UN은 과연 그러한 권한을 가졌을까. 필자의 과문으로서는 아직껏 연합국헌장에 규정되어 있는 국제경찰군이 설치된 것을 듣지 못하였고 필자의 우견으로써는 그러한 조직은 불선(不尠)한 시간과 곡절을 겪은 뒤에 실현될지 말지 한 한 개의 구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UN기구를 일국의 형성에 비겨 볼 때 세계적 여론을 추진력으로 한 외교적 절충력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기구에다 치안적 책임을 지운다는 것은 대상의 과대평가라 할 것이다.”

 

유엔의 성격과 그 한계에 대한 인식이 놀랄 정도로 현실적이다. 이런 수준의 인식은 당시 조선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드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고쟁생(苦諍生)’, ‘쓴소리꾼’이란 필명도 예사롭지 않다. 내 검색능력으로 그가 과연 누구였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이 필자는 1947년 4월 7일부터 15일까지 7회에 걸쳐 <경향신문>에 “총선거의 환경과 태세”라는 제목으로 남북협상파를 비판하는 글을 싣기도 하는데, 일반적인 단독선거 제창자들과 수준이 다른 그의 논설에는 음미할 점이 많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