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1월 1일자 <경향신문>의 각계 인사 신년사 중 선생님 글은 이렇게 끝맺은 것이었죠.

 

“(...) 우리는 중대한 국제적 난국에 맞닥뜨리어서 민족적으로 새로운 일대결심을 요한다. 일제시대에 있어서 일본만 넘어지면 저절로 잘 살 수 있는 줄로 그리고 있던 꿈같은 세상은 완전히 깨어져 버렸으니 우호국의 원조를 받으면서도 자력건설의 길을 걸어 나아가지 아니하면 사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 달 만났을 때 지금의 난국에서 외부 문제와 내부 문제, 어느 쪽을 더 크게 보는가 여쭈었는데, 선생님은 내부적 문제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년사에서는 “중대한 국제적 난국”을 앞세웠습니다. 그 선후경중(先後輕重)을 좀 더 설명해 주시지요.

 

안재홍: 난국의 직접 원인은 외부 문제에 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몰락은 전쟁 패배 이전에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한 필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퇴각이 우리 민족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연합국의 승전 덕분이었으므로 일본을 대신해 연합국의 힘이 우리 민족의 진로를 어느 정도 좌우하게 된 것은 지금 단계에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힘이 충분하지 못해서 연합국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일본인에게 억눌려 있던 시절에 비하면 우리 힘을 잘 키워나갈 수 있는 여건을 해방으로 얻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해방으로 얻은 여건이라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날수록 확인하게 됩니다.

 

인간 세상에 모순이 없을 수 없지요. 과거 일본 군국주의에도 모순이 있었고 현재 연합국의 국제관계에도 나름의 모순이 있습니다. 최대의 모순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대립이죠. 그런데 어쩌다가 조선이 그 대립의 최전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조선을 자기편에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비록 선의에서 출발한 것이라도, 결과에 있어서는 민족 분단을 촉발하는 것이니, 지금 조선의 국제적 난국은 해방 전보다도 더 위험한 것입니다.

 

원인이 외부에 있다 하더라도 난국 극복의 길은 내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 조건을 우리 힘으로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미국과 소련이 어떤 태도로 나오더라도 민족의 통일성을 우리 힘으로 지키겠다는 뜻이 우선 세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미국이나 소련에 붙을 경우 자기 개인과 자기편의 득실이 어떨까 주판알을 퉁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현실적 해결을 위해서는 내부 문제를 크게 보는 겁니다.

 

김기협: 선생님을 비롯한 합작파가 미소공위 성공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셨지만, 미-소 대립이 현재 국제적 모순의 초점인 이상 그 성공은 원래 바라기 어려운 것이었군요. 유엔위원단이 이제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좌익에서는 위원단의 설치 자체가 미국의 일방적 조치라며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미국의 조선위원단 설치 제안과 나란히 소련의 조기 동시철병 제안이 나왔는데 미국 제안이 채택되고 소련은 위원단의 존재를 부정하고 보이콧으로 나왔죠. 좌익의 위원단 거부는 소련 입장을 따르는 것이고요. 동시철병 제안 자체는 나름의 타당성을 가진 것이었다 하더라도 만들어진 위원단을 보이콧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일까요?

 

안재홍: 소련은 유엔의 권위가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유엔에서 미국 제안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돈 많은 나라라는 데 있어요. 그 점에서 소련은 경쟁이 안 되죠. 조선위원단 보이콧은 그 불만을 표시하는 하나의 전술적 조치입니다.

 

좌익이라 하더라도 소련 입장의 전술적 조치까지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는 것은 민족의 입장을 등지는 자세입니다. 소련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유엔은 지금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어 있어요. 유엔 전체가 그렇듯 조선위원단에도 미국의 입김이 꽤 작용할 겁니다. 그렇지만 모든 회원국이 소련 주장처럼 미국의 괴뢰는 아니에요. 조선위원단의 사명 수행이 우리 민족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합니다.

 

좌익이 모두 유엔위원단을 거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로당이 소련 방침을 따르고 있지만 근로인민당(근민당)은 합작의 정신을 버리지 않고 있어요. 다만 여운형 씨 비운 자리가 크게 느껴집니다. 그분이 없으니까 중도 좌파의 존재가 뚜렷이 느껴지지를 못하네요.

 

김기협: 며칠 전(2월 2일) 유엔위원단에 출석해서 단독으로 두 시간 동안 면담하셨죠. 회의 분위기가 어떻던가요? 책임감이라든가, 능률이라든가, 미소공위와 비교해서 어떻던가요?

 

안재홍: 예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아주 좋더군요. 능률면에 있어서도, 조선 사정에 대한 이해가 미소공위 위원들보다 아무래도 못하겠지만, 대체로 진지한 노력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미소공위 경우는 잘 돌아갈 때는 잘 돌아가다가도 뭐가 하나 틀어지면 일부러 손을 놓아 버릴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유엔위원단 위원들은 그 임무를 부여받은 지 몇 주일 안 된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놀랄 만큼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책임감에 있어서도 전체적으로 미소공위보다 확연히 낫습니다. 미소공위 위원들이 상부의 지령만 쳐다보는 것과 달리 자기 나라를 대표해서 주체적 판단을 하려는 노력이 분명하죠.

 

굳이 비교를 한다면 크고 안정된 나라 대표일수록 국제무대에서의 역할도 더 믿음직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호주, 캐나다, 프랑스 대표들의 자세가 아주 든든해 보였어요. 인도의 메논 의장도 분위기를 잘 이끌고요. 중국 대표의 역할이 조금 불만스러웠는데, 불안정한 국내 사정이 이런 데도 영향을 끼치는 건지.

 

김기협: 유엔위원단의 조선인 면담 중 김구 선생의 ‘전향’이 관심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최근까지도 이승만 씨의 남조선 총선거 주장에 따르는 듯했는데, 갑자기 김규식 박사가 제창해 온 남북회담 주장에 호응한 거죠. 소련의 북조선 입경 거부라는 상황 아래 단독선거를 서둘러 하자는 종래 반탁세력의 대오에서 김구 선생이 이탈, 선거를 늦추더라도 남북회담을 통해 남북한 총선거를 해야 한다는 중간파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선생님도 위원단 면담에서 밝혔습니까?

 

안재홍: 나는 정치인이 아니라 행정책임자 자격으로 위원회에 출석한 겁니다. 남조선과도정부의 조직과 기능, 그리고 남조선 사회의 제반 상황에 대한 보고를 했을 뿐, 정치적 주장을 내놓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위원 한 분이 총선거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답변을 사양했습니다.

 

보고 중 선거와 관련된 내용은 선거법 관계뿐이었어요. 입법의원에서 제정한 선거법과 중앙선거위원회에서 작성한 시행세칙에 대해, 그것은 미군정이 실시할 선거를 위해 준비한 것이지 유엔위원단이 감시할 선거를 위해 제정,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김기협: 남조선 단독선거라도 서둘러 실시할 것이냐, 늦어지더라도 남북 총선거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느냐 하는 문제가 정치권을 넘어 온 민족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민정장관의 직책을 떠나, 한 개인으로서 선생님 의견은?

 

안재홍: 지난 30개월간 나랑 이야기를 나눠온 김 선생이 내 생각을 모를 리가 없는데, 독자들에게 직접 설명해 드리라는 뜻이겠죠? 그렇게 하죠.

 

이승만 박사와 한민당 쪽에서는 총선거를 빨리 실시하지 않으면 숨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데, 이제 그쪽에선 논리고 나발이고 없어요. 자기네 편들지 않으면 아무나 역적으로 몰아붙입니다. 며칠 전 한협(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위원회) 성명서 보세요. 김구 선생이 자기네와 다른 길을 바라본다고 해서 그렇게 떠받들던 분을 사정없이 매도한 걸 보세요. 제정신이 아닙니다.

 

소련의 입경 거부 때문에 생긴 문젠데, 왜 소련의 태도 때문에 우리 할 일을 못해야 합니까? 김두봉 씨, 김일성 씨 등 이북 지도자들의 거부라면 문제가 다르지만. 대화를 청해야 해요. 이북 지도자들이 거부한다면 그때는 나도 이남 단독 시행을 반대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북 지도자들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소련의 태도만으로 남북 총선거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김기협: 아직 나오지 않은 신문기사 얘기를 꺼내는 게 미안합니다만, 2월 8일자 <동아일보> “한독 민독 양당 선거파 합작” 기사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남조선 선거 문제로 동당(한독당)에서 탈당할 기색이 보이고 있는 모 중앙위원 담에 의하면 과반 민독당에서 남조선만의 총선거에는 불참할 것을 결정한 이래 동 결정에 반대하고 남조선에 총선거가 실시될 때에 이에 참가할 것을 강조하여 동당에서 탈당한 몇몇 간부들은 앞으로 한독당에서 탈당할 몇몇 간부들과 합작하여 안재홍을 중심으로 신당을 조직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선생님이 홍명희 선생과 함께 하는 민독당은 남북협상을 통한 남북 총선거를 주장해 왔고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독당은 최근에 같은 방향으로 돌아섰습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몇몇이 두 당에서 이탈할 것은 예측할 만한 일인데, 선생님을 그런 움직임의 주동자로 지목한 것이 뜻밖이네요. 무슨 근거라도 있는 보도인가요?

 

안재홍: <동아일보>가 진짜 사람 잡네요. 아무 근거 없는 낭설입니다.

 

그런 낭설이 나올 만한 빌미를 굳이 찾는다면 남조선 총선거가 실시될 경우 참가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이견이 있죠. 남북협상파 대다수는 그럴 경우 거부하자는 주장인데 나는 그때 가서 판단할 일이라고, 상황에 따라서는 이남만의 총선거라도 참가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에요.

 

이남만의 총선거를 피하기 위해, 남북 총선거를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길을 모두 꽉꽉 막아버리는 것도 성실하지 못한 자세입니다. 사람들은 비장한 ‘배수진(背水陣)’에 괜히 마음이 끌리는 경향이 있는데, 배수진도 이치에 맞고 상황에 맞아야 치는 거죠. 신립(申砬) 장군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쳐서 어떤 결과를 맞았습니까?

 

김기협: 남북협상파의 입장은 종래의 좌우합작 노력에서 이어진 것입니다. 그 입장이 그 동안 큰 힘을 얻지 못하다가 이번에 김구 선생이 호응하면서 크게 부각된 것을 보면 그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 절감할 수 있죠. 선생님은 그분을 지도자로 극진히 받들어 한독당에 들어가기까지 했다가 미소공위에 대한 입장 차이로 갈라져 나오는 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 곡절은 김구 선생의 입장 변화에 기인한바가 컸고요. 이번에 그분이 취하는 입장이 다시 바뀔 여지는 없을까요?

 

안재홍: 사람 일인데, 두고 봐야죠. 하지만 도로 바뀌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그분이 원래의 설 자리를 찾은 거니까요.

 

그분이 그 동안 원래 자리를 잃고 흔들린 것은 무엇보다 한민당 쪽 사탕발림에 넘어간 때문이에요. ‘임정 직진론’이니 뭐니 해서 임정 법통을 백퍼센트 세워드릴 것처럼 설레발을 치고 정치자금도 갖다드리고 하니까 한민당을 이용 상대라도 가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이제 선생께서 잔교(棧橋)를 불살라 버린 셈입니다. 아까 말한 한협 성명서, 그것도 실제로는 한민당에서 나온 거거든요. 한민당도 선생을 완전히 포기한 겁니다.

 

김기협: 김구 선생이 이승만 시와 결별한 데는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보는 미군정의 시각으로 인해 국민의회와 민대의 통합이 원활하지 못한 사정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관측됩니다. 그리고 한민당이 이번에 김구 선생과 깨끗이 갈라서는 이유도 그분에게 암살 배후의 책임이 있다고 믿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그분에게 책임이 있는 일일까요?

 

안재홍: 수사 중의 사건을 놓고 피의자의 혐의를 누설하는 못된 행태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근절되어 있겠지요? 나는 민정장관으로서 경찰이 그런 짓을 못하도록 막기에 여념이 없는 터에 내가 스스로 누설할 수야 없지요. [목소리를 낮춰서]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