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봄 <밖에서 본 한국사>를 내고 바로 이어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하면서 한국근현대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뉴라이트 측 주장을 반박하다 보니 그쪽에서 노리는 주류 학계의 약점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2010년 망국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망국의 의미를 깊이 있게 서술한 책이 별로 없다는 점이 아쉽게 생각되는 바람에 <망국의 역사> 작업을 하게 되었고, 그 작업의 아쉬움이 다시 <해방일기>로 나를 몰고 왔다.

 

학부 시절 한국사에 궁극적 관심을 갖고도 중국사를 전공으로 택한 것은 고공비행을 좋아하는 취향 때문이었다. 그 후 과학기술사 영역을 취하면서 문명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살피는 방향으로 취향을 잘 살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터득한 시각을 좋은 일에 한 번 써보겠다고 한국사 개관에 손댄 것이 <밖에서 본 한국사>였는데... 그로부터 5년째 한국사에 매달려 있다.

 

<해방일기> 작업의 완성이 시야에 들어오면서부터 다음 작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취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중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두 과제는 그리 벅차게 여겨지지 않는다. 더 욕심을 내는 것은 "동아시아의 20세기"다.

 

그러면서도 한쪽으로는 한국근현대사에 그 동안 닦아놓은 발판을 그냥 버리게 되지는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해방공간 이후의 대한민국사 분야에서 작업을 계속할 가능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해방일기> 같은 고밀도 작업을 더 계속하고 싶지는 않고, 작업에 쓰는 시간과 노력의 3분의 1 정도로 꾸준히 해나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가닥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선거 결과를 보고... 이대로 떠날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승부의 원인에 사람들은 매달려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피상적인 문제에만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승부 자체보다 더 걱정스러운 지표들에 생각이 잘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생각하니 역사를 고려에 넣지 않는 데 큰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한국 사회에 대한 걱정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중에 역사적 배경과 조건을 충분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 같다.

 

나 자신도 그렇다. 지금 상황을 바라보며 내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근년에 현대사 공부를 바짝 한 덕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공부가 없었더라면 나도 패배에만 마음이 얽매여 갈피 못 잡을 울분만 토하고 있었을 것이다. 승부 자체보다 그 바닥에 깔려 있는 이 사회의 문제들로 바로 눈실을 돌릴 수 있는 것은 그 공부 덕분이다.

 

바둑의 기초가 웬만큼 된 사람에게 전문기사들이 흔히 주는 조언이 있다. 큰 곳보다 급한 곳을 먼저 찾아서 두라는 것이다. 살아가며 일하는 데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세계 문명의 흐름을 깔끔하게 정리해 내서 "와~ 저 동네에도 저런 선수 있었네." 소리 듣고 싶은 것은 말하자면 큰 곳이다. 급한 곳이란, 내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 내 존재를 떳떳이 지키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다. 내가 속한 사회가 백년 동안 겪어온 고통과 혼란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 데 끼어들지 않고 어디 가서 뭘로 잘난 척한단 말인가.

 

어차피 다음 작업 시작은 8개월 뒤의 일이다. 지금까지 해 온 작업방식을 표준으로 놓고 어떤 조정을 가할지 생각해보는 보는 데서부터 구상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두 달 정도 구상을 다듬어놓으면 서서히 준비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 기간을 1948~2018년의 70년으로 생각해 본다. 1년 작업으로 10년씩 처리해 가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1987년까지의 독재기 39년을 4년에 처리할 수 있으니 2017년까지는 그 성과를 사회에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꼭 해내고 싶다. 그 뒤는 그 때 가서 다시 생각할 수도 있겠다.

 

10년이면 120개월, 에세이 한 꼭지로 두 달씩 다룬다면 60꼭지가 필요하다. 때에 따라 긴박하거나 중요한 시기에는 한 달씩 다루도록 할 경우 70꼭지 남짓 될 것 같다. 1년 52주 중 집필기간을 40주 안쪽으로 한다면 웬만큼만 건강과 체력을 유지해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3년째 <해방일기> 작업으로 대한민국의 구조적 문제에 작용하는 요소들이 대략 파악되어 있다. 세계사의 흐름도 무난한 설명이 가능하다. <해방일기>보다는 읽기에 쉽고 재미있는, 그리고 보다 체계적인 서술이 가능할 것 같다. 아직까지 내 약점으로 남아있는 경제방면에 대한 공부가 특별히 유의할 과제이지만 큰 걱정은 않는다.

 

40년 기간을 서술하는 4년간의 작업을 우선 당면 과제로 생각한다. 그 기간 동안 먹고 살 일도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좀 있으면 <해방일기> 인세가 쏟아져들어오기 시작할 테니까.

 

문 후보가 당선되었더라면 이런 작업에 공적 지원을 받을 가능성도 있었을 걸, 아쉬워하다가 생각하니 웃기는 생각이다. 그랬더라면 이런 작업 할 생각도 잘 안 들었을 텐데.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