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비유를 떠올리는 걸 보니 감성 면에서 나보다 풍성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참 좋은 비유입니다. 그 비유를 발판으로 나도 더 생각할 방향이 있는 것 같네요.
 
지리적 거리 때문에 사태의 충격이 덜하진 않겠죠. 나는 스스로 세상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이번 일은 무심히 넘길 수 없군요. 평소에도 잘 나다니지 않지만, 투표날부터 집에 틀어박혀 아내 얼굴만 쳐다보며 며칠 지냈습니다.
 
그래도 안쓰러운 마음에 이정우 교수에게만 위문편지를 보냈는데, 오늘아침 답장을 받고 채팅 비슷하게 몇 차례 메일을 주고받았죠. 그러면서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좀 밝아졌고, 이 선생에게 메일 쓸 생각도 났어요. 이 선생과의 메일을 블로그의 "뭘 할까?" 카테고리에 올리는 것도, 앞으로 할 일에 관한 의논 상대로 이 선생을 생각하는 까닭이니까요.
 
<대한민국 실록>을 떠올렸습니다. <해방일기>를 끝낸 뒤 그 관성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마 전부터 들고 있었는데, 확실한 목적의식을 갖고 그 일을 생각하게 된 겁니다. 이 교수는 역사학도 아닌 입장에서도 그런 일에 스스로 매달리고 싶다고 하더군요. (미련한 친구... 누가 경제학 하랬어? ^^)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민족사회에 '운명'처럼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국가가 어떤 병에 걸려 어떤 증세를 보여 왔는지, '병력'을 작성해야겠습니다. 어떤 명의를 장차 만나더라도 병력을 제대로 작성해 놓지 않으면 진단도 처방도 어렵겠지요.
 
<해방일기>가 승정원일기나 비변사등록 차원이라면 이제 실록 차원으로 대한민국사 서술을 시도해 보고 싶어요. 20매 내지 40매 크기의 에세이에 익숙해져 있는데, 한 꼭지로 한 달가량을 서술하고 매주 두 꼭지를 목표로 삼으면 1년에 90꼭지가량? 7년반가량을 소화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10년쯤 하면 2010년대까지 서술할 수 있지 않을지? 1차 목표를 1987년까지로 한다면 5년쯤 걸릴 것 같네요.
 
<동아시아의 20세기>는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원하는 결과를 봤다면 대한민국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방향으로 공부를 풀어가게 되었기 쉬운데, 병세가 호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시병에 더 묶여 있어야겠어요. 혹시 나중에 이 선생 같은 분이 그런 작업 하게 된다면 참고로 삼을 수 있도록 논고 작성할 기회는 계속 살피겠지만 내 손으로 큰 매듭 지을 욕심은 버려야겠습니다. <유럽은 어떻게...>와 <중국은 어떻게...>는 어차피 큰 매듭을 생각한 일도 아니고 이미 해놓은 공부를 정리하는 거니까 그냥 내 손으로 해낼 틈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요.
 
<대한민국 실록>에 관해서도 이 선생 의견 얻을 수 있기 바래요. 이 선생이 직접 다루는 분야는 아니지만 역사 공부의 의미를 나랑 비슷하게 생각하는 분의 의견이라면 어느 분야의 일에 관해서라도 값지게 받아들이니까요. 작업 목적에 대해서든, 실행방법에 대해서든.
 
그런데 앞서 편지에서 "그러면서도 유교 국가에 선뜻 손을 들어주기도 때이른 감이 듭니다." 한 말씀에는 토를 달고 싶어요. 과거에 비슷한 관점을 적용시킨 사례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보인 일이 있다 해서 그 관점을 꼭 내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 당시에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장본인이 그 관점 자체일지, 아니면 관점 자체에는 좋은 점이 많았는데도 시대상황의 다른 요인이 결과를 망친 것인지 따져볼 여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김기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