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생 편지에서 늘 생각할 거리를 많이 찾습니다만,
요즈음은 딱딱한 생각거리는 좀 접어두고 싶네요.
"해방일기" 이후를 내다보며 일보다 생활 생각을 더 하며 지내고 있거든요.
혹시 내게 짚어서 물어보시는 게 있다면 힘껏 대답하겠지만,
그밖에는 가벼운 생각 떠오르는 대로 적겠습니다.
 
석사논문부터 자기 스타일로 만들고 싶었다니,
이 선생은 글 쓰는 재미를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었군요.
나는 늦게야 그 재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조너선 스펜스를 1987년에 만나본 뒤에야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학술문헌에서 문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우쳤지요.
논문을 좋은 글로 쓰려는 의식적 노력은 그 때 시작되었고,
그 노력의 최대 결실이 박사논문이었죠.
그게 연구논문이 아니라 소설이라고 심사위원 한 분이 주장할 때,
서양사 전공의 심사위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래서 그런지... 동양사 논문 심사해 달라고 해서 고생깨나 할 각오를 했는데... 막상 펼치니까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지더라고요."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었던 거 같아요.
어머니가 자녀 교육에 '자유방임'을 표방하고 상당 수준 실천도 하셨지만,
나를 문과 아닌 이과로 보내려는 세뇌공작 하나만은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한민국 환경에서 문과 쪽 공부해서는 좋은 꼴 못 볼 거로 생각했다고 나중에 실토하셨죠.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 글쓰기 소질을 드러낸 일이 아주 없지는 않을 텐데,
그 측면은 조금도 격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교수 노릇 할 때까지 내 글쓰기는 편지와 논문뿐이었고,
담을 내용 잘 담는 정확성만이 글쓰기의 목적이었죠.
좋은 글을 어려서부터 많이 읽으면서 컸지만,
그런 글을 쓰는 건 나랑 종류가 다른 인간들의 몫이라고만 생각했죠.
그러다가 스펜스의 글을 읽으면서,
좋은 글 쓰는 것을 학문의 중요한 목표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박사논문 쓸 무렵부터 신문-잡지 글을 쓰기 시작했죠.
몇 해 동안은 학술문헌의 응용 정도로 생각하고 정확성 하나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러다가 "분수대" 집필을 하면서 글쓰기의 넓은 마당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짧은 글 정교하게 쓰는 능력을 바탕으로 맡게 된 일이었는데,
몇 해 하는 동안 글쓰기의 의미를 폭넓게 깨우치게 된 것이었죠.
아직도 "페리스코프"에 활용하기 위해 그 때 글을 더듬어보고 있는데,
글쓰기 중 문장력의 밑천은 그 작업을 통해 확보한 셈입니다.
그 후에는 몇 해 동안 번역 작업을 통해 문장력을 계속 다듬을 수 있었고요.
 
5년 전 저술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한 이래 무척 만족스럽게 일을 해 오고 있습니다.
'문장력' 외에 '컨텐츠'와 '유머감각'이 밑천이 되어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글쓰기의 컨텐츠를 '교양'이라 할 수 있겠는데,
내가 시도해 온 '역사에세이'에서는 일반교양과 전문교양으로 나눠 생각할 수 있겠죠.
일반교양 방면은 어렸을 때 독서환경 덕분에 쉽게 어느 정도 갖출 수 있었고,
전문교양 쪽은 전공 공부 시작한 이래 꽤 효과적으로 쌓아온 셈입니다.
공부가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유럽에 가서야 확실히 깨닫게 되었지만,
사실 학생 시절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죠.
그래서 민두기 교수 인정 받는 데 연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고요.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덕분에 학문적 기준을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없었던 거죠.
다만, 유럽 가기 전에는 그런 생각과 기질에 죄의식이랄까, 불안한 마음이 있었어요.
나는 "바담 풍" 하더라도 후배들에게는 권할 자신이 없었죠.
그런데 그런 생각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편해진 겁니다.
 
문장력과 컨텐츠만으로 잘할 수 있는 일은 저술보다 번역이죠.
저술 단계로 나서게 된 것은 유머감각에 자신감을 얻은 덕분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유머감각이란 세상을 대하고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10년 전에 나는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으로 여기고 있었어요.
세상 사람들에게 가치있는 메시지를 내놓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음이 극에 이르면 양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이치랄까,
스스로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보니 새로 바라보는 시각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본 한국사> 집필을 시작했죠.
남의 글 번역이나 해드리며 양식을 축내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보여드릴 만한 글, 힘 닿는 대로 내놓으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내놓고 보니,
나 같은 사람이 나 같은 입장에서 보는 관점에서도 가치를 찾아주는 분들이 있데요.
그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계속 열심히 쓰다 보니,
이런 사람에게도 맡을 만한 역할이 있었구나,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기에 이르렀습니다.
 
저술 작업 하는 동안 어머니의 말년을 모시다가 떠나보내 드렸습니다.
내 유머감각을 가장 집약적으로 발휘한 데가 이 몇 해 동안 어머니와의 관계였고,
그 위치에서 어머니의 존재가 내 유머감각을 키우고 다듬는 벼룻돌 역할을 해주신 거죠.
예전 일들에는 이런저런 불만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막판 어버이 노릇은 정말 끝내주셨습니다.
 
세상과 나 자신을 어둡게 보는 동안 많은 인연을 떠나 살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인연을 쫓아다니며 되살릴 일은 많지 않겠지만,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데서 위안을 찾습니다.
요즘 "해방일기" 이후의 생활을 생각함에 있어서는,
글쓰기의 의미에서 컨텐츠보다 유머감각에 치중하는 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독자와의 관계를 지면(및 화면)을 벗어나 포괄적 인간관계로 확대하는 거죠.
강연도 좋고... 옛날 서당 훈장 같은 자리에 서고 싶어요.
좁은 곳을 찾는 습성은 여전하지만,
좁은 곳에서라도 이만큼 열어놓고 살 생각 하는 게 어딥니까.
 
오늘은 넋두리만 한참 늘어놓았네요.
이 선생과 나 사이에 공유하는 게 적지 않은데,
이런 넋두리를 통해 다른 점을 확인하는 게 도움 되기 바랍니다.
 
김기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