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안철수 캠프 옆 건물 옥상에서 한 청년이 안철수의 후보 사퇴에 항의하며 자해소동을 벌인 일이 있었다. 어느 텔레비전방송에서는 현장생중계까지 했다고 한다.

 

지난 22일 그보다 훨씬 조용하게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었다. 완주군 용진면의 한 아파트 13층 옥상에서 유 아무개 씨(53)가 ‘두 후보는 반드시 단일화를 해 달라’는 플래카드를 남기고 베란다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다. 그가 투신 전 아파트 베란다에 걸어놓은 플래카드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훌륭한 분들이라고 생각하는데 뜻을 모아주시고 한 분은 수레를 끌어주시고 한 분은 밀어주시면서 행복한 복지국가를 만들어 주십시오. 땀을 흘려 일하고도 힘들게 살아가는 농민을 보살펴 주십시오.”

 

목숨으로 항의하고 목숨으로 호소하는 일이 너무 많다 보니 유 씨의 죽음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런 일로 투신까지 한다는 것이 ‘비정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의 뜻을 중하지 않게 여기는 마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치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가볍게 지나치지 않기 바란다. 정치란 것이 많은 사람의 행복과 불행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유 씨처럼 특별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도 정치처럼 많은 사람을 괴롭힐 수도 있고 편안하게 해줄 수도 있는 일이 세상에 많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 많은 얘기가 오고가지만 그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약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의 심성 때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 후 그를 생각하며 이런 글을 썼다.

 

목숨으로 항의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애쓴 분이 있었다. 그런 세상을 거의 다 만들어놓았다고 생각해서 목숨으로 항의하려는 사람들을 말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런 세상이 아직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분은 자기 목숨을 끊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순수한 피해자의 죽음보다 그런 죽음이 더 애통하다, 내게는.

 

하나의 죽음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낸 것은 역사상 드문 일이다. 그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내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아직도 그 밑바닥까지 알지 못한다.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그 개인을 위한 눈물이라기보다 이 사회를 위한 눈물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할 뿐이다. 내 눈물의 의미도 모르면서 어찌 다른 사람들의 눈물에 담긴 의미를 재단하겠는가.

 

슬퍼하는 자는 슬퍼하게 하라.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99-100쪽)

 

안철수의 사퇴 때 “저는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가 내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남겼다. 예상 밖의 빠른 결단을 내릴 때 그의 마음속에 유 씨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을지 여부를 나는 알 수 없다. 며칠 전 그의 의중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글을 썼지만, 이런 대목까지는 내가 ‘차마’ 재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중요한 일을 해명하면서 “차마 그렇게는” 하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내 눈길을 끄는 일이다. 유가의 기본 덕목인 어질음[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설명이 ‘불인지심(不忍之心)’이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리는 마음은 사실 유가만이 아니라 모든 도덕의 출발점이다. 문명의 가장 본질적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차마 그렇게는” 하는 심성을 가진 사람은 큰 역할을 맡을 수 없는 곳이 한국 정치판이라는 데 있다. 남들이 차마 못하는 짓도 끄떡없이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이라야 살아남을 수도 있고 행세할 수도 있는 곳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역사를 통해 그런 심성을 가진 사람으로 큰 존재감을 남긴 사람이 누가 있었는가?

 

이 법칙 아닌 법칙에 예외처럼 보이는 사람이 노무현이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이다. 장인의 좌익 경력으로 공격을 받으며 “그렇다고 내가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항변할 때 그 말에는 “차마 그렇게는”이 함축되어 있었다. 목숨을 버릴 때도 장차 겪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차마 그렇게는”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여성대통령’론이 나오면서 ‘여성성’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데, 나는 이 ‘불인지심’을 여성성의 중요한 측면으로 본다. “독해야 대장부”란 말이 있지 않은가. 차마 못할 일이 많은 사람은 남을 이끌기는커녕 자기 한 몫 해낼 능력도 없다는 말이다. 인간관계를 경쟁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험난한 근대세계에서 여성이 유독 불인지심을 지킨 것은 차별 때문에 경쟁에서 비켜서 있던 위치 덕분일지 모른다. 그러나 무절제한 경쟁의 폐해를 인류가 깨닫고 있는 탈근대 상황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잘 지켜온 여성의 공로가 두드러지게 된다.

 

안철수의 ‘착한 마음’이 대선 판도를 좌우하게까지 된 형편을 보면 우리 사회도 앞만 보며 달리던 근대적 상황을 많이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10년 전 대선에서 노무현이 득세한 데도 그의 불인지심이 은연중에 세상의 변화를 느끼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끌어들인 효과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정책에서도 이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경제성장’ 하나만 놓고 싸우던 시절이 아니다.

 

며칠 전의 글에 “문재인, 안철수에게 이용당해야 산다”란 제목이 붙어 나왔다. 본의 아닌 제목이지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점이 잘 담긴 제목이다. 남들 못하는 일을 해내는 잘난 대통령은 그만 보고 싶다. 이명박으로 충분하다. 남들 하는 일도 못하는 게 많은 못난 대통령을 보고 싶다. 안 그래도 될 일에 목숨 던지는 못난 사람의 뜻도 마음에 걸려 하는 못난 대통령을 보고 싶다. 그래야 유 씨도 편안하게 눈을 감을 것이다. 유 씨의 명복을 빈다.

 

 

원고를 일단 보내놓고 앉아 생각하니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 몇 자 덧붙인다. 이 글이 행여 유 씨의 죽음을 미화하는 것으로 비쳐지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항의든 호소든 죽음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예전에 어느 시인이 생명사상이란 것을 내걸고 “죽음의 굿판” 운운 하며 직접 비판한 데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 표현이 나오게 한 원인을 걱정하기만도 바쁘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