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 연재 중인 황재옥의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을 유심히 읽고 있다. 필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이 글이 북한 문제와 한중 관계의 최고 전문가 여러 사람이 참여한 최근 답사의 보고문이기 때문에 개인의 기록이라도 다른 참여자들 의견이 간접적으로라도 포함되어 있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월 25일의 제5편 “일본이 찾아 중국이 이용하는 광개호토대왕비”를 보면서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 10년 전 왜곡된 언론보도를 바탕으로 이 사회의 과잉민족주의가 들끓었던 ‘동북공정’ 이야기가 10년 전의 모습 그대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 일반인들은 10년 전의 이야기를 별 생각 없이 그대로 갖고 있을 수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당시의 논의에 어떤 허점이 있었는지 웬만큼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함께 다니는 중에 동북공정 이야기가 나왔다면 그 허점에 대한 생각을 말해주는 이가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렇게 10년 전 이야기가 그대로 나왔을 리가 없다.

 

황재옥의 글 중 아래 내용만 뽑아놓고 따져보겠다.

 

우리 고대사와 관련하여 최근 중국은, 저우언라이의 발언과는 정반대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단군조선은 존재하지 않았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중국인이 세운 고조선이다. 한사군은 중국의 영토였고, 그 영토 안에 세워진 고구려와 이를 계승한 발해는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 따라서 그 역사는 중국사에 귀속된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시 조선족은 한족과 융합됐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왜곡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2004년 고구려 유적에 이어, 발해유적도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그들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역사공간을 동북3성 지역에 구축, 이를 대중에게 전도하고 있는 것이다. (...)

 

중국의 이러한 움직임이 혹시라도 통일 이후 한반도와의 영토분쟁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하여 선제공격 또는 '굳히기' 차원에서,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고구려와 발해의 정체성을 밝히는 연구를 좀 더 체계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중국의 동북공정 정책에 대해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남북이 협력하고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도 앞으로 검토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의 어깨가 무겁다.

 

첫 줄에서 “중국은” 우리 고대사와 관련하여 어떤 주장을 하고 있다고 황재옥은 말하는데 국가가 역사 사실에 대한 주장의 주체로 나설 수 있나? 중국 국가주석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인민대표대회에서 그런 결정을 했다는 것인가? 중국의 일부 학자나 언론에 그런 주장이 나왔다 해서 그것을 그 국가의 행위처럼 침소봉대하는 것은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국가주의적 발상이다.

 

10년 전 한국 언론의 동북공정에 대한 왜곡보도에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그 하나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벌인 사업처럼 꾸민 것이다. <프레시안>에 실린 글 중에도 이 사업이 후진타오의 ‘지시(指示)’를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는데, 그 근거자료를 내가 확인해보니 ‘지시’가 아닌 ‘비시(批示)’였기에 지적한 일이 있다. ‘지시’를 내리는 것은 주체적 행위다. 반면 ‘비시’는 주체 아닌 상급의 위치에서 승인해 주는 것이다. 하급 기구가 이런 사업을 하겠다고 보고할 때 중앙에서 그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의사표시다.

 

또 하나는 사업비를 뻥튀긴 일이다. 동북공정 5년 예산액이 총 1500만 위엔(당시 한화 22억원)이란 사실이 명백히 밝혀져 있는데도 한국 언론에서는 동북공정이 3조원 규모의 대사업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런 바탕 위에서 황재옥이 위 글에서 말한 것처럼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고구려재단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5년 예산 22억원의 사업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연 예산 70억원의 기구를 만들다니, 길 가다가 발등 밟혔다고 칼을 꺼내 휘두른 셈이다.

 

사업비의 착각은 ‘동북공정’의 정체 혼동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원래의 동북공정은 중국이 서북공정에 이어 변방지역의 경제개발을 위해 추진한 거대사업이었다. 정확한 규모는 모르지만 아마 3조원 규모는 되었을 것이다. 한편 ‘역사침략’으로 규탄받은 동북공정은 변방지역의 역사와 지리를 조사하는 변강사지(邊疆史地) 작업의 일환이었다. 프로젝트의 원 이름은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다. 그런데 한 번 일어난 착각을 관계자들이 일부러 방치한 느낌이 든다. 언론은 선정적 기사거리를 뽑아내기 위해. 그리고 한국의 고대사 연구자들은 고구려재단 같은 밥상에 숟가락 얹어놓기 위해.

 

황재옥이 “참으로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왜곡”이라며 스스로 정리해 내놓은 “최근 중국의 주장” 내용을 세밀히 들여다본다.

 

"단군조선은 존재하지 않았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중국인이 세운 고조선이다. 한사군은 중국의 영토였고, 그 영토 안에 세워진 고구려와 이를 계승한 발해는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 따라서 그 역사는 중국사에 귀속된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시 조선족은 한족과 융합됐다."

 

단군조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중국인이 세웠다는 주장, 한사군이 중국의 영토였다는 주장은 중국에서만 나온 주장이 아니다. 한국 학자들에게서도 꽤 나왔고, 나 자신 대체로 동의하는 주장들이다. 고구려 멸망 때 조선족이 한족과 융합됐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 때 ‘조선족’이 누구였지?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그 주장의 논거를 연장시키면 신라든 고려든 조선이든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친 한민족국가가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 될 수 있다. 이 ‘지방정권론’은 미숙한 연구자들이 어설픈 애국심을 앞세워 조공의 의미를 왜곡한 자기중심적 해석인데, 그런 미숙한 연구자들은 어느 사회에나 있다. 우리나라에도 많다. 유물사관에서 겨우 벗어나고 있는 중국에서 그런 풍조가 좀 더 두드러진 편이고 그런 사정을 당시에 나는 이렇게 해설했다.

 

중국‘동북공정’의 ‘고구려사 왜곡’ 사태의 진상을 살피기 위해 마다쩡(馬大正)이 주도해 온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 등 관계분야의 성과물을 검토해 보니 마다쩡이 총주편(總主編)을 맡은 “중국변강통사총서(中國邊疆通史叢書)”로 여러 권의 책이 나온 가운데 “동북통사(東北通史)”가 있었다. 작년 초에 나온 이 책이 이른바 동북공정 중 역사분야의 출발점으로서 기본지침을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을 몇 장 들춰보지 않아도 두 가지 문제점이 바로 드러난다. 하나는 동북공정의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널리 일으켜 온 바 패권주의 성향의 중국중심주의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문제는 학술적인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서술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서술을 일일이 예거할 필요도 없다.

 

집필자 20여 명 중 3분의 1이 넘는 숫자가 내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던 B대학 소속이어서 조선족 작가 류연산 선생에게 물어보니, “그런 학교가 있기는 있습니다.” 하면서 웃는다. 연변대학 사학계의 김성호 교수는 동북공정이 물의를 빚은 뒤에야 관계회의에 초청받아 최근 참석한 일이 있다며, 동북사의 진짜 연구자들인 연변대의 역사학자 등은 배제된 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연줄로 연구비를 딴 예가 많다고 한다. (...)

 

1천5백만 위엔도 여기서는 적은 돈이 아니다. 3분의 1만 역사 분야에 땡겨온다 하더라도 1년에 1백만 위엔을 쓸 수 있는데, 이곳 연구자의 연봉이 대개 5만원을 넘지 않으니 수십 명을 전업으로 쓸 수 있는 자금이다. 이 돈을 바라고 몰려든 연구자들 중에는 모자라는 실력을 넘치는 충성으로 때우려고 ‘민족모순’을 일부러 자극하려는 경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동북공정과 관련, 가장 논란이 된 것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고구려사 왜곡’이다. 근대역사학이 들어온 뒤 중국 학자들에게는 중국의 역사를 부풀려 보려는 경향이 있어 왔고,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金毓黻의 “東北通史”(1941)에서 그 관점을 정리해 놓았는데, 지금의 동북공정에서는 그 관점을 답습하는 수준일 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계급모순을 민족모순에 앞세우는 정책 아래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 성향이 억제되어 있다가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시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대중화주의를 들고 나온 동북공정의 역사부문 담당자들은 거센 역풍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방향과 서술방향은 대폭 조정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국측의 강력한 항의와 반발이 이 역풍을 촉진하기도 했지만, 이런 류의 대중화주의는 중국의 학계와 사회 내에서도 원래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2004년 9월 9일 “3조원과 22억원”)

 

2004년 설립된 고구려재단이 2년 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통합되어 사라질 때, 나는 그 설립의 문제점이 충분히 반성된 결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불쑥 황재옥의 글에서 10년 전과 똑같은 동북공정 비판과 함께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성” 이야기를 보니 자다가 홍두깨 맞은 기분이다. 고구려재단을 또 하나 만들자는 얘기인가?

 

<프레시안>이 황재옥의 기행문을 연재하는 데는 그 한 사람의 식견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와 함께 여행한 여러 전문가들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전해주기 위한 목적도 곁들인 것으로 기대했다. 이 기대가 착각이라면 그런 착각을 한 독자들이 나 외에도 많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