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후보 사퇴 직후 “다시 안철수를 생각한다.”란 제목의 글을 <프레시안>에 보냈더니 “문재인, 안철수에게 이용당해야 산다.”란 제목 하나를 더 붙여줬다. 일리 있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얼른 들었고, 좀 더 생각하니 요점을 정말 잘 짚은 제목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이제 와서야 안철수와 문재인 사이의 협력관계가 분명하게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문재인의 할 일에 대한 생각을 적었던 그 글에 이어 안철수의 할 일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고 싶다. 아직도 내게 하나의 불가사의로 남아있는 안철수의 마음속을 더듬어보는 데 생각의 바탕을 둔다는 점은 전번 글과 마찬가지다.

 

항우(項羽) 생각이 난다. 자신을 항우에 견주는 것이 안철수에게 불쾌할지 모르나, ‘힘’의 상징으로서 항우의 통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항우는 ‘새 정치’를 요구하는 시대를 살면서 그 요구에 부응하려는 노력에서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 큰 성과를 거둔 사람이었다.

 

‘새 정치’의 요구는 전국시대에 제자백가의 사상을 통해 표출되었다. 춘추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신분질서의 변화, 그리고 국가의 대형화와 그 합리적 경영이 그 요구의 대표적 내용이었다. 이 요구에 부응하는 데 먼저 큰 성과를 거둔 것이 법가의 법치 사상이었고, 진시황은 이 사상을 발판으로 천하 통일을 이뤘다.

 

그러나 진시황의 법치는 창업, 즉 정복사업에는 유효했지만 수성, 즉 장기적 운영에는 결함이 있었다. 그래서 통일 후 불과 십여 년 만에 제국이 무너지고 말았다. 십여 년 전 이 사회에서 ‘법치’를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풍조에 경각심이 들어 진시황의 법치 이야기를 짤막한 글로 쓴 일이 있다.

 

“황제의 꿈 : 人治와 法治”

 

전국시대 진(秦)나라가 부국강병을 이루고 천하통일에 이르는 데는 법가(法家)의 법치주의가 큰 몫을 맡았다. 제민(齊民)의 원칙 아래 귀족의 세력을 억눌러 절대왕권을 세우고 엄정한 상벌로 효과적 국민동원을 기했던 것이다.

통일을 이룬 뒤 시황제(始皇帝)는 법치주의를 천하에 확장하려 했다. 황제의 호칭을 시황제로부터 2세 황제, 3세 황제로 나아가도록 한 것도 황제의 인격을 배제하고 철저한 법치를 내세우려는 상징적 조치였다.

 

몇 해 전 프랑스의 젊은 중국사학자 장 레비가 시황제를 소재로 <황제의 꿈>이라는 소설을 써 공쿠르상(역사 소설 부문)을 받은 바 있다. 이 소설에서 시황제는 인간의 불확실성을 싫어해 자신을 중심으로 기계와 로봇의 세계를 쌓아나가는 편집광적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의 극단적 법치를 풍자한 것이다.

 

시황제가 구축한 정교한 통치체제는 그가 죽자마자 파탄을 드러냈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일화로 악명 높은 환관 조고(趙高)가 황제의 죽음을 숨긴 채 황제의 뜻을 가장해 황제의 작은 아들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며 자신에게 대항할 만한 인물을 몰살시킨 것이다. 얼마 후 통일 이전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봉기가 각지에서 일어나자 지도력을 잃은 제국은 삽시간에 와해되어 버렸다.

 

조고의 발호는 극단적 법치의 폐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통치의 메커니즘이 완전히 형식화돼 있었기 때문에 황제 측근에서 정보를 장악하고 있던 일개 환관이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 천하를 뒤흔들 수 있었던 것이다. 태자 부소(扶蘇)가 조작된 자결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던 것이 시황제가 만든 통치체제의 성격이었다.

 

시황제는 통일의 위업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죽은 뒤에도 영원히 유지될 체제를 만들려 했다. 불로장생의 선약(仙藥)을 찾은 것과 같은 욕망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바로 체제의 파탄으로 이어진 사실은 그 체제가 법치의 원칙 못지않게 그의 개인적 지도력에 의존해 왔음을 반증해 준다.

 

권력 운용의 난맥상이 드러날 때마다 사람들은 인치(人治)가 법치(法治)로 바뀌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물론 유린돼 온 법치의 원칙은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법치의 원칙은 훌륭한 정치를 보장하는 만병통치의 선약(仙藥)이 아니다. 법치 원칙 회복과 함께 지도력 육성과 도덕성 강화를 위한 꾸준한 노력을 우리 사회는 필요로 한다.

 

법치는 시대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응답이 되지 못했다. 진나라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통일 이전의 제후국 할거상태를 복원하는 복고적 변화가 일단 천하의 추세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진나라의 통일에 대한 극단적 반작용일 뿐, 타당한 변화 방향이 아니었다. 천하제국 건설은 시대의 요구였다. 다만 진시황이 시도한 것 같은 기계적이고 엄격한 법치 체제보다 유기적이고 유연한 체제가 필요했다.

 

이 방향에 누구보다 먼저 효과적으로 접근한 것이 항우였다. 초나라 명문 자손인 항우는 초나라 왕실 후예를 찾아 회왕(懷王)으로 모셨다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의제(義帝)로 추대했다. 전국시대 이전 주(周)나라 천자의 역할을 복원한 것이다. 그리고 전국시대 각국의 후예와 진나라 공격에 공이 큰 장수들을 의제의 이름으로 제후에 봉하게 했다. 이것 역시 민심을 달래고 지방 세력을 만족시키기 위한 복고적 조치였다.

 

그러나 기원전 206년에 항우가 구축한 체제는 구체제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었다. 천하제국 건설이라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 자신이 맡은 ‘패왕(覇王)’의 역할이다. 춘추시대 5패(五覇)의 고사를 제도화함으로써 정신적 권위의 표상 황제와 현실적 권력의 담당자 패왕의 2원 구조로서 안정된 제국 체제를 지향한 것이다. 에도 시대 일본의 천황-장군 체제와 같은 이 2원 구조는 당시의 중국 상황에 꽤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항우 자신도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명문가 자제로서 항우가 어릴 때부터 글과 검술과 병법을 익힌 것은 그의 궁극적 경쟁자 유방과 대조되는 사실이었다. 개인적 능력에서 항우가 유방(劉邦)보다 월등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유방이 한신(韓信)을 등용할 때 한신이 한 말에서 알아볼 수 있다.

 

한신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용감하고 사납고 어질고 굳세기가 항왕(項王, 항우)과 견주어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자 한왕(漢王, 유방)이 오랫동안 대답 않고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항우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한신이 두 번 절하고 치하하며 말하기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또한 대왕께서 항왕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은 일찍이 그를 섬겼기에, 청컨대 항왕의 사람됨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항왕이 성내어 큰소리로 꾸짖으면 천 사람이 모두 엎드리지만, 어진 장수를 믿고서 병권을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의 용기일 따름입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경스럽고 자애로우며 말씨도 부드럽습니다. 누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나 자기가 부리는 사람이 공을 이루어 마땅히 봉작(封爵)해야 할 때에 이르러서는, 그 인장(印章)이 닳아 망가질 때까지 차마 내주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아녀자의 인(仁)일 뿐입니다. 항왕이 비록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어 여러 제후들을 신하로 삼았지만, 관중에 있지 못하고 팽성에 도읍하였습니다. 또 의제(義帝)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자기가 친애하는 차례로 왕과 제후를 삼은 것은 불공평한 일입니다. 제후들은 항왕이 의제를 옮겨 강남으로 쫓는 것을 보고,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그 임금을 쫓아내고 자신들이 좋은 땅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항왕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학살과 파괴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천하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원망하고 백성들이 친밀하게 따라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강한 위세에 위협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항왕이 비록 패자라고 불리나 사실은 천하의 인심을 잃은 것입니다. (...)” (<사기>(정범진 외 옮김, 까치 펴냄) “회음후열전”)

 

이 대화는 유방이 한왕의 봉작을 받아 한중에 들어가 있으면서 아직 항우에게 대항해서 출병하기 전에 있었던 것이다. <사기>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에 따르면 기원전 206년 1월에 항우가 진나라 수도였던 함양에서 제후들에게 봉작을 내렸고, 4월 제후들이 함양을 떠날 때 의제가 팽성을 자신에게 내어주고 강남의 침(郴)으로 옮기도록 했다. 유방이 항우의 조치에 처음으로 맞서서 관중으로 출병한 것이 그 해 8월의 일이었고, 항우가 의제를 죽인 것은 10월의 일이었다. 그래서 한신이 “의제를 옮겨 강남으로 쫓는 것”을 이야기했지만 의제를 죽인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항우가 의제를 죽인 것은 바로 몇 달 후(기원전 205년 1월) 유방이 항우에게 전면전을 선포하는 명분이 되었다. 그 시점까지 유방은 관중 진출이 “함양을 함락시키는 장수를 관중의 왕으로 삼는다”는 의제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지, 항우의 패왕 체제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며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있었다. 유방의 도전으로 시작된 초한쟁패(楚漢爭覇) 내내 의제 시해(弑害)는 항우의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왜 항우는 의제를 죽였을까? 항우가 교만하고 흉포한 사람이라서? 항우의 패망 이후 많은 역사가와 문필가들이 그를 흉악무도한 인물로 그려 왔기 때문에 실제와 다른 모습이 후세에 전해졌다. 한신이 인정했듯, 그는 “용감하고 사납고 어질고 굳센” 품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의제가 항우에게 어떤 죽일 이유를 주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의제가 회왕 시절 취한 조치 하나에서 짐작할 수 있는 점이 있다.

 

원래 항우 군대의 지도자는 항우의 숙부 항량(項梁)이었고, 항량이 세력을 이룬 뒤 남의 양치기를 하고 있던 초나라 왕실 후예를 찾아 회왕으로 옹립한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항량이 진나라 군대와 정면대결을 벌이다가 전사했는데, 이 대결을 무모하다며 말리던 송의(宋義)를 회왕이 중시하여 상장군을 삼고 항우를 그 아래 두었다.

 

초나라 총사령관이 된 송의가 처음 맞은 전투가 거록 전투였다. 여러 반란군이 거록에서 연합하여 진나라 군대에 맞서고 있었는데, 송의는 46일간 진군을 멈추고 참전을 회피하며 거록 전투로 진나라 군대가 약화된 뒤에 진격한다는 전략을 주장했다. 불만을 품은 항우가 송의를 죽인 다음 거록으로 진군해서 용맹무쌍한 활약으로 연합군의 승리를 가져왔다. 전투 후 연합군 장수들이 무릎걸음으로 항우에게 나아와 인사를 드렸다고 하니, ‘패왕’의 권위는 이때부터 세워진 것이었다.

 

항우는 송의의 약삭빠른 계략을 미워한 것이었다. 진나라의 폭정을 뒤엎기 위해 나란히 기병한 동지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우리 편 득실을 따지며 대의(大義)를 외면하는 잔꾀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거록에서 항우 덕분에 곤경을 벗어난 연합군 장수들은 그의 용맹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그의 의리에 대한 경의도 함께 품었을 것이다.

 

그런데 회왕은 진나라를 무너뜨리라는 시대의 요구에 당당히 응하려는 항우보다 약삭빠른 송의를 중용했다. 왕이 임명한 상장군을 무단히 처단한 것은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회왕은 항우를 송의 대신 상장군에 임명함으로써 사태를 무마했지만 항우에게는 회왕에 대한 불신의 마음이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회왕에게는 왕으로서 자기 권위를 행사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었을 것이고, 진나라 멸망 후 항우가 구축하려는 새 체제에 어떤 식으로든 저항할 길을 찾았을 가능성이 있다.

 

진나라 복멸(覆滅)이라는 시대의 과제에 온 힘을 기울인 항우의 자세는 새 정치 실현의 과제에 전력으로 임하는 안철수의 자세와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눈치를 본 송의와 그를 중용한 회왕의 태도는 지난 총선에서 다수 국민의 여망을 저버린 민주당 일각의 행태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새 시대를 함께 열어갈 파트너로 보지 않은 항우의 판단에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항우는 유능하고 부지런한 인물이었다. 그의 최대 약점이 된 의제 시해도 나름대로 변명할 길이 있는 일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런데도 그가 실패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그보다 약 백년 후에 살았던 사마천이 의제가 아니라 항우를 본기에 올린 것은 항우의 정당성을 어느 수준 이상으로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이 “항우본기” 끝에 붙인 논평 중 항우의 실패 이유를 논한 부분을 옮겨본다.

 

[항우가] 천하를 분할하여 왕, 후를 봉하니 모든 정령이 항우에게서 나왔으며 자신을 패왕이라고 칭하였다. 그 왕위가 비록 끝까지 가지는 않았으나 이는 근고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그러다가 항우가 관중을 버리고 초나라를 그리워하고, 의제를 쫓아내고 스스로를 세우며 왕후들의 반란을 원망하기에 이르자 상황은 어렵게 되었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것을 스승삼지 아니하며, 패왕의 공업이라고 하고는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하고 다스리려고 하다가 5년 만에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 몸은 동성에서 죽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책망하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는 끝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결코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라는 말로 핑계를 삼았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사기> 위와 같은 판본. 단 밑줄 친 부분은 필자가 고쳐 옮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고 자신의 지혜를 앞세웠다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그는 자기 기준에 집착했다. 자기 공로로 진나라를 무너뜨렸으니 자신에게는 음식과 기후가 익숙한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공로가 큰 자신이 (자기 기준으로)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이 나쁜 놈으로 보였다. 그리고 아무리 황제라도 새 시대를 열어갈 자격이 (자기 기준으로) 없으면 가차 없이 제거했다.

 

의제는 초나라 왕실 후예라는 혈통 외에 아무런 자격이 없는 지도자였다. 마침 초나라 사람인 항우가 천하를 평정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 왕실 후예 아닌 그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송의를 중용한 일을(그가 취한 조치로 유일하게 기록에 남아있는 일) 보면 자질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의제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에 비하면 보통사람이었다. 진나라를 무너뜨린 공로로 항우가 천하를 이끌어간다면 그런 보통사람들이 잘 살게 해주는 것이 그의 할 일이었다. 황제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면 좋은 보좌관을 붙여주어 자신과 보조를 맞출 수 있게 해주어야 했다. 의제가 정말 보통 넘게 못난 사람이었다면 그의 잘못을 천하 사람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를 제거해야 했다. 그런데 항우는 자기 기준에 따라 의제를 처리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늘이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한탄했던 것이다.

 

해하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그의 비통한 노래는 <패왕별곡>으로 널리 알려졌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건만 (力拔山兮 氣蓋世)

시운이 불리하여 추(騅, 항우의 애마) 또한 나아가지 않는구나. (時不利兮 騅不逝)

추가 나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騅不逝兮 可奈何)

우(虞, 항우의 애첩)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좋을까? (虞兮 虞兮 奈若何)

 

천하를 잃는 마당에 그의 생각은 애마와 애첩에게 묶여 있었다. 사마천은 논평에서 그가 “관중을 버리고 초나라를 그리워”한 점을 지적했다. 항우는 천하 다스리는 일을 자신의 권리로 생각했지 의무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의무를 위해 자기 라이프스타일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만 생각했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감이 지나친 사람은 참을성이 없다.

 

지난 열흘 동안 안철수의 움직임을 애타게 기다리며 그가 어떤 생각으로 움직임을 늦추고 있는지 수시로 생각이 떠올랐다. 박원순에게의 양보 이래 나는 그의 현명하고 과감함에 거듭거듭 탄복해 왔다. 단일화 방법 논의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걱정시킬 때도 그의 지혜와 용기에 대한 내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난 열흘 동안에도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걱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기 기준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감이 지나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자기 스타일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닐까? 열흘의 시간을 그가 나름대로 유용하게 썼고, 지금이 움직이기 시작할 좋은 타이밍이라고 그는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평론가 중에는 이 열흘의 차이가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줄였다고 보지 않는 사람이 없다.

 

1년 전 박원순에게의 후보 양보를 놓고 나는 안철수가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경지를 택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군자불기, 참 좋은 자세다. 그런 자세가 정치계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늘어나기 바란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그런 자세로만 일관하는 데는 현실적 효용성의 문제가 있다. 평시에는 욕심 없는 초연한 자세를 지키더라도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특정한 그릇 노릇을 해야 한다.

 

안철수는 앞으로 20년간 정치에 종사할 뜻을 밝혔고, 그 뜻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뛰어난 지혜와 용기로 한국 정치에 매우 큰 공헌을 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항우 같은 일대의 영웅도 지나친 자신감 때문에 (그의 기준으로는) 졸렬한 인물인 유방에게 천하를 빼앗기고 만 일을 유심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안철수는 자기 기준으로 자기 판단에 의해 문재인 후보 지원활동의 기점을 12월 5일로 잡았다. 그러나 이후 두 주일 동안의 활동에서는 자기 자신을 버릴 줄 아는 태도를 보여주기 바란다. 이번 선거의 승패만이 아니라 앞으로 20년간 한 중요한 정치인의 가치가 걸려있는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