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엔트로피”

 

"엔트로피는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이 열역학 제2법칙이다. '엔트로피'는 통상적인 말로 정확히 바꾸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굳이 갖다댄다면 '평형'이나 '안정' 비슷한 것이다. 열역학 원리로 사회 현상을 설명하려 하는 사회열역학에서는 인간 사회의 자연적 변천이 특권의 해소와 계급의 소멸을 향해 간다는 비유로 엔트로피의 법칙을 제시하기도 한다.

 

쉬운 말로 "물은 아래로 흐른다"고 하는 것도 엔트로피 법칙의 한 표현이다. 중력의 작용을 받는 물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여지를 가지고 있다면 평형성이 부족한 상태다. 흐르고 흘러 바다나 호수에 들어가든, 웅덩이에 고이든, 더 낮은 곳을 찾을 수 없을 때 엔트로피는 최대가 된다. 말하자면 물의 흐름은 엔트로피를 늘려 가는 과정이다.

 

'평형'이니 '안정'이니 하면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실인즉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은 곧 죽음의 방향이다. 사람을 비롯해 생물체가 살아있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비교적 낮은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더 늘어날 여지가 없는 상태가 바로 '죽음'이다.

 

평형과 안정이 없는 사회는 사람들을 괴롭게 만든다. 그래서 평형과 안정을 늘리려고 많은 사람들이 애쓴다. 그러나 평형과 안정이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사회의 역동성이 사라져 버린다. 공산권 붕괴 과정에서도 드러난 일이다.

 

우리 사회는 엔트로피 수준이 꽤 낮은 편이다. 남한 사회만 봐도 그런데, 북한까지 넣어 민족 전체를 본다면 평형과 안정을 늘려갈 여지가 엄청나게 많다. 물에 비유하자면 높은 폭포를 앞둔 강물과 같다. 앞으로 당분간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큰 변화를 겪어갈 장래가 눈앞에 닥쳐있다.

 

지금까지의 냉전체제는 물이 낭떠러지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댐이었다. 이 댐이 무너지며 폭포의 위력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정주영 씨의 소떼가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도, '총풍'을 빌미로 북한 측이 남한 정치권을 갖고 노는 듯한 모습도, 이 폭포의 낙차가 큰 데 말미암은 일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억지로 막아온 흐름이기 때문에 한번 터지면 큰 파괴력을 보일 수밖에 없다. 급격하고 심대한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도 가져다주고 고통도 가져다줄 것이다. 이 폭포의 잠재적 에너지가 터빈을 돌려 생산적인 용도에 쓰일지, 아니면 배를 뒤집어버리고 말지, 사회 전체의 큰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남북 관계의 전개는 좁은 이해관계를 떠나 대국적 자세로 임해야 할 과제다.

 

1998년 말에 쓴 글인데 2009년 초에 이 자리에 다시 올린 일이 있다. ("경제는 말아먹어도 좋다. 또 다른 '파국'만은…")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는 것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에서 다시 올린 것이었다. 그때 덧붙인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10년 전 급격한 남북 관계 변화의 전망을 폭포에 비유하면서, 폭포 대신 그런 대로 헤쳐 나갈 만한 급류로 그 낙차를 소화할 수 있기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동안 부시와 네오콘 때문에 낙차를 많이 줄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물러선 이제 지금부터라도 엔트로피의 급격한 증가에 대비하는 자세를 갖춰야 할 텐데 이명박 정부는 "기다리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라며 직무유기 전략으로 버티고 있다.

 

엔트로피의 비유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남북관계의 변화가 한국 사회에 엄청나게 큰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내다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부시와 오바마의 교체가 이 변화에 획기적인 고비가 되리라는 것도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그런 판국에서 택하는 '기다리는 전략'이란 파국을 기다리는 전략일 수밖에 없다. 오바마가 명언한 북한 지도자와의 대화 용의를 놓고 "선거 때 무슨 소린들 못 하겠냐?"고 하는 것은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해야 할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다"고 해야 할지.

 

이제 세 번째 이 글을 꺼내고 있는 것은 남북관계의 또 한 차례 전환의 계기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으로 한국 정부가 북한에 대한 오랜 적대정책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2009년에는 오바마 대통령 취임으로 미국의 북한 봉쇄정책에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남북관계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던 이명박의 퇴장을 계기로 그 동안 억제되어 있던 변화가 다시 시작될 단계에 와 있다.

 

한반도 분단은 냉전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고도 분단 문제가 바로 해소되지 않는 것은 분단이 내면화되어 관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한도 북한도 분단과 대결에 적합한 체제를 굳혀놓고 있었기 때문에 분단을 강요하는 외부의 압력이 사라져도 내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결 상태를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분단 상태의 관성이 내부에 있다 하더라도 바뀌어버린 외부 환경과 계속 마찰을 일으킨다면 조만간 관성이 소진되게 되어 있다. 냉전 종식 후 중국 및 러시아와의 교류 확대 등 변화를 겪는 동안 남북관계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 입장인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에 이 변화도 한 몫 했다. 그에 관한 색깔론이 전처럼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과 임동원의 햇볕정책이 등장했고, 2000년의 6-15선언이 이뤄졌다. 그 직후 미국에 부시 행정부가 들어앉지 않았다면 남북관계가 지금 어느 단계까지 와 있었을까.

 

역사학에는 가정법(if)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부시 행정부가 들어앉지 않았다면”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좀 부끄럽기는 하다. 그런데 부시는 워낙 황당한 인물이었다. “도덕적으로 완벽” 운운 하는 이명박을 놓고 한국 상황에 환멸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는데, 부시 때문에 많은 미국인들이 느낀 환멸감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냉전 상태를 국지적으로 복원하려는 네오콘 전략의 득세가 미국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부시처럼 황당한 인물의 등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사고(accident)였다. 북한 등 몇 개 나라를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한 것은 어떤 문법에도 맞지 않는 ‘말 안 되는 소리’였다. 네오콘 문법에조차 맞지 않는 소리였다.

 

한국인에게 ‘악의 축’이란 말에서 ‘악(惡)’이 주목을 끈다. 그러나 서양인에게는 ‘축(軸)’이 더 주의를 끄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일본 등 ‘추축국’을 가리킨 말이기 때문이다. 냉전이 끝난 세상에서 평화의 자연스러운 정착을 거부하며 대결 상황을 지향한 네오콘 노선을 과장해서 대표한 것이 부시의 이 말이었다. 나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부시가 한 이 말에 대한 오바마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시의 시대가 끝날 때 나는 남북관계 전환의 결정적 계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세상에, 이번에는 부시 뺨치는 이명박이 이쪽에서 나설 줄이야!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이었던 인명진 목사가 최근 “이 정부에 대해서 내가 부담스럽게 책임을, 죄의식을 느끼고. 이런 정권을 내가 도왔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하는 말을 했는데, (“박근혜 새누리당, 부패와 통합했다.”) 이명박 정부가 어디까지 막 갈지는 모든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남북관계 퇴보는 이명박 정부의 막 가는 행보 중에서도 압권이었다. 그 악수와 무리수를 하나하나 짚어볼 필요도 없다. 5년 전 상황과 지금 상황을 비교해 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얼마나 손해를 보고 있는지만 생각해 보면 된다.

 

아 참! 우리가 지금 남북관계의 부담 때문에 얼마나 손해를 보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한 독자들도 많을 것 같다. 그런 분들에게는 내가 설명하려고 애쓰기보다 이종석의 책 <통일을 보는 눈>(개마고원 펴냄)을 권하겠다. 그 책의 서평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 목숨 바쳐서 통일’, 섬뜩한 얘기는 그만!")

 

저자는 이 책에 두 가지 소망을 담았다고 한다. 하나는 통일의 필요성을 젊은 세대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설명이다. 분단이 고정된 뒤의 세상만을 살아온 젊은 세대일수록 민족의식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들을 납득시키려면 민족주의에 의지하지 않는 설명이어야 한다.

 

또 하나의 소망은 진보-보수에 관계없이 수긍할 수 있는 설명이다. 충분한 근거 위에 합리적 설명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용적 기준으로 우리 사회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것이다.

 

저자 개인에게는 나름대로 민족의식도 있고 정치이념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의식도 이념도 내세우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노력에 대해서는 합격점을 주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본다.

 

이종석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요직을 맡은 인물이라 해서 그까지 색안경 끼고 보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가 민족주의보다 합리주의를 앞세우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도 그 사실을 여지없이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그 점을 다소 불만스럽게 생각하지만,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는 매우 가치 있는 입장이라고 인정한다.

 

진행 중인 선거에서 남북관계에 대한 정책노선이 큰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해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종래의 보수-진보 구도에서 크고 작은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이 ‘뜻밖의’ 거취를 발표하는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진영 정비의 비중이 큰 상황이다. 남북관계처럼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주제를 떠올리기 힘든 분위기다. 진지한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색깔론이 선거판을 뒤덮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크게 실망하지도 않는다. 이명박 정부를 이어받겠다는 박근혜 진영에서도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전향적 자세를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그 쪽이 내세우는 자세가 어느 정도의 진정성을 가진 것인지도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다. ‘경제민주화’와 ‘줄푸세’를 묶어놓는 그 의식수준이 남북관계에 관해서라고 차이가 있겠는가.

 

문제는 경제민주화에 있어서나 남북관계에 있어서나 시대를 역행하는 자세에 있다. 이 점에서 박근혜의 자세는 이명박과 다를 것이 없다. 유시민이 일전에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박근혜의 뛰어난 점이 ‘의전’에 있다고 말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이명박과의 큰 차이는 그것뿐이다.

 

왜 새누리당은 시대를 역행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흔히 ‘기득권’으로 설명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1%의 기득권이 어떻게 45%의 지지를 모을 수 있는가? 분단 상태의 ‘관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분단과 대결을 편안하고 이롭게 여기는 마음이 수십 년 분단 상태 속에 빚어지고 굳어져 있다. 세대에 따른 투표 성향의 차이도 중요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론에서 ‘폭력’의 의미를 중시했다. 사물의 본성을 벗어난 상태를 폭력상태로 규정하고 폭력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본성의 발휘를 운동의 원인으로 본 것이다. 예컨대 무거운 물체는 아래쪽에 있는 것이 그 본성이기 때문에 낙하운동이 일어난다고 했다.

 

한반도 상황을 엔트로피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따른 것이다. “폭력이 폭력을 낳는다”는 말대로 분단이라는 극심한 폭력상태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분출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 에너지가 생산적 용도에 쓰일지, 파괴적 역할을 맡을지 14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결정이 되지 않고 있다. 며칠 후의 선거에서 그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오래된 글을 다시 꺼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