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만에 메일 받고 반갑긴 반가웠는데, 그 동안 뜸한 걸 서운해 한 기억은 없네요. 이 말씀 듣고 이 선생이 서운할진 모르겠지만. 전번 메일 주고받은 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거든요. 상주 노릇도 상주 노릇이고, 아무래도 평소 생각 않던 것까지 생각하게 되는 게 많아서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상태로 지냈습니다.
 
그런 계기로 생각에 잠기다 보니 일 생각보다 생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더군요. 내친 김에 오늘 이 선생께 쓰는 편지에도 일, 공부보다 생활 얘기를 더 많이 쓰고 싶네요.
 
엊그제 전주 가서 하룻밤 쉬고 돌아왔어요. 박영재 선생님이 전주에 자리 잡았죠. 박사학위 받은 후로는 선생님보다 형님처럼 모시고 지내게 되었는데, 근래 무척 적조했어요. 해방일기 때문에 정말 보고 싶은 사람들, 봐야 할 사람들 잘 못 보고 지냅니다. 두어 주일 전에 돌아와 있다고 연락 주시기에 이번엔 맘 먹고 전주로 찾아갔습니다.
 
학위논문 제출 앞둔 분에게 박 선생님 얘기 꺼내고 보니 내 논문 심사받던 일 생각나네요. 당시로는 너무 독창적 스타일의 논문이라서 통과에 문제가 있었어요. 심사위원 중 한 분은 은근히 나를 꺼리는 분이었는데, 그 사실이야 늘 분명히 하고 있었고 심하게 억지 쓰는 스타일이 아닌 분이라서 조금 더 힘들게 해주시는 정도려니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엉뚱한 분 하나가 싸매고 나서서 절대 도장 찍어 줄 수 없다고 설치는 바람에 내 논문을 호의적으로 평가해 주던 심사위원들이 입장 난처하게 되었죠.
 
한 분은 퇴직한 지 여러 해 되는 선생님이었고 또 한 분은 서양사 전공이신지라(동서교섭 분야라서 서양사 선생님도 한 분 모셨죠.)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기가 어색한 입장이고, 박 선생님이 총대를 멜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어요. 결국 통과가 되고 나서 생각하니 이 양반이 무슨 재주로 그 필사적 반대를 잠재웠는지 무척 궁금했어요. 엊그제 한 잔 하다가 생각이 나서 여쭤보니까 덤덤하게 대답해요. "둘이서 대화를 좀 나눴죠."
 
충고 한 마디. 학위논문 심사할 때 외부 심사위원 정하는 데는 본인 의견도 참고로 하는 것이 관례죠. 학문적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은 피하도록 하세요. 상식적 기준을 너무 믿다가 혼나는 수가 있어요.
 
내 논문에 과학사 분야 내용도 꽤 들어 있었기 때문에 과학사 전공자로 심사위원을 모실까 하는 의견이 있었어요. 그에 관한 내 의견을 물을 때 너무 양심적인 척했어요. 과학사로 심사위원 올 만한 분들은 다 나랑 가까운 분들인데... 그래서 명청교체기와 서학에 관한 연구실적을 낸 사람 하나를 얘기했죠.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학자 행세를 수십 년간 해 온 사람이라면 진짜 이상한 짓은 할 리가 없겠지, 하는 생각으로.
 
같은 분야를 자기랑 다른 식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가워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 학자지상정이라고 나는 생각했어요. 어느 방식이든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문제점을 비판하더라도, 방식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힘들여 쓴 논문을 놓고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 없다"는 이유로 "이건 연구논문이 아니라 소설"이라고 우기는 데야... 심사받은 사람이 조너선 스펜스가 아니기 망정이지...
 
박 선생님 얘기 하다가 옆으로 한참 샜는데, 논문 심사과정의 그 풍파가 그 후 내 작업을 펼쳐나가는 데 꽤 작용을 했어요. 학계 풍토의 제일 마음에 안 드는 측면을 호되게 겪고 보니 학계에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진 거죠. 그래서 과학사학회 회장을 맡아야 할 때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무릅쓰고 고사했죠. 동양사학계의 논문 심사과정에서 그런 수모를 당한 사람이 우리 학회 회장을 맡는다는 건 우리 학회에 너무 미안한 노릇이라... 그리고 (학술논문 쓰는) 연구작업으로 끌리는 마음도 다 접어버렸습니다.
 
전주 간 데는 박 선생님 만나는 게 물론 1차 목적인데, 2차 목적은 은퇴할 곳을 살피는 데 있었어요. 어머니 모시는 일 때문에 한국에 오래 머물게 됐고, 풀려나면 연변에 돌아가 그곳에서 여생을 지낼 생각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생각이 바뀌어 왔어요. 한국에서 계속 지내는 쪽으로. 그 편이 일도 더 보람있고 생활도 더 편안한 측면이 많을 것 같아요. 아내도 양해해 주고.
 
그런데 기왕 한국에서 오래 지낼 거면 수도권에서는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에요. 해방일기 일하며 지내려니 인구밀도 높은 데서 지낼 필요가 별로 없어요. 일산 살면서 서울에 한 달에 두 번 나갈 정도니까. 처음에는 자연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서 강원도 쪽을 열심히 쳐다봤죠. 그런데 한참 생각을 굴리다 보니 인구밀도가 너무 낮은 곳을 바라보는 게 현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너무 치우친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차츰 중도적 방향으로 생각이 돌아옵니다. 광역시 아래 급 도시가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전주, 청주, 원주, 춘천 같은.
 
조용한 데서 지내더라도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을 계속해야겠죠. 처음에는 서당 훈장 같은 역할로 생각을 시작했어요. 산골에 아직 마음이 쏠릴 때는 폐교를 활용한 문화공간에 얹혀 지내는 길을 생각했죠. 그런데 차츰 그렇게까지 별난 짓 않고 지내는 쪽을 더 생각하게 되었어요. 중급 도시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제도와 시설을 활용하는 쪽으로.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강연 맡을 기회를 찾고, 시민강좌 같은 것도 만들 수 있겠죠. 이제 공부를 더 넓히는 노력은 그만두고, 함께 사는 동시대인들과 널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쪽으로 노력을 모으고 싶은 겁니다.
 
생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참에 전주에 자리 잡은 박 선생님 연락을 받자 전주 구경을 하고 싶었죠. 전 같으면 서울 오시는 길에 나가서 술 한 잔 함께 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분 역시 외래인으로서 정착한 모습을 보며 현장에서 조언도 얻고 싶었습니다. 그분도 나를 함께 술마시기 좋은 사람으로 여기니까 조언 제공에 열과 성을 다하실 수밖에. 그래서 불과 하룻밤 다녀오는 사이에 내년 중 전주로 옮겨갈 가능성이 30퍼센트 이상으로 높아졌습니다. (아! 전주중앙회관 가까이 산다는 것만 해도 행복의 조건 중 하나야!)
 
오랜만에 쓰는 편지라 골치아픈 공부 얘기는 제쳐놓고 당장 골몰해 있는 생활 얘기만 적었어요. 다음 주쯤 틈 내서 문자향이 좀 더 나는 글월을 보내겠습니다.
 
김기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