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0월 10일 새벽에,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 책임장교 박 소령이, 필자에게 급히 연락하였다.
"강 조무원, 트럭을 한 대 마련했으니 김성칠 선생 부인을 모시고 빨리 대구로 떠나시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직 확실한 것은 모르지만, 고향인 영천으로 중양절 차례를 지내러 가셨던 선생이, 괴한한테 피습을 당하셨다고 해요."
"돌아가셨습니까?"
"그것도 잘 모르겠어. 대구까지 가보아야 알겠으니 급히 가보오."
선생은 1951년 3월초에 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을 그만두셨으나, 위급한 일을 당해서는 전임 예우를 해주는 것 같았다.
그 시절에 필자는 동 위원회의 조무원이었다. 신분은 준위 대우 문관이었으나 현역군인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24시간 사무실을 지켜야만 했다. 외출 때에는 꼭 '자료수집' 또는 '업무연락'이라는 증명서를 가지고 나가야 했고, 이것이 없으면 헌병대에 연행되었다.
따라서 이날도 즉시 대구까지의 출장증명서를 만들어가지고, 약속된 장소에서 사모님을 만나뵈었다. 트럭은 금융조합연합회 부산지부의 차인 듯했다. 사모님은 젖먹이 아기를 안고 운전석 옆에 앉으시고, 필자와 금융조합의 직원 한 사람은 짐칸에 올라앉았다. (강신항 "사람답게 사는 길" <역사 앞에서> 336쪽)
10월 9일 새벽에 돌아가신 소식이 이튿날까지도 불확실하게 부산에 전해져 있었고, 10일 오후 5시가 넘어 대구에 도착한 뒤에 확인되었다. 그때 내가 어머니 등에 업혀 있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는 들은 일이 없다. 강 선생님의 글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리 형제들이 자랄 때 어머니는 다분히 방임적인 태도를 취하셨지만, 한 가지 엄격하게 단속하신 일이 있다. 아이들이 화날 때 걸핏 쓰던 "너 죽어!" 소리를 일체 못하게 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때이른 죽음 때문에 '죽음'이란 말을 꺼리신 게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었지만, 상서롭지 못한 말이 입에 붙지 않게 하려는 삼가는 자세를 어머니나 아버지나 매우 중시하셨던 것이라고 나중에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일기 중에도 상서롭지 못한 표현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데, 1950년 12월 15일자에 하나의 예외가 보인다.
미 대통령 트루먼이 UN군은 여하한 사태에 당면하여도 절대로 한국에서 철퇴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하여 모두들 얼마쯤 안도의 빛을 보인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켜서 마침내 외세를 끌어들이고, 그 결과는 외국 군대가 언제까지나 있어주어야만 마음이 놓이지,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다는 이 나라의 몰골에 술이라도 억백으로 퍼마시고 얼음구멍에 목을 처박아 죽어버리고 싶은 심경이다.
왜 이렇게까지 마음이 어두우셨을까? 그 며칠 전 일기에 평소 부러워하지 않던 사람들이 부럽게 여겨지는 심경을 적은 것이 눈에 띈다.
삭풍 불어치는 황혼의 서울 거리에 서서 일찍 이 순간처럼 서생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낀 적은 없었다. 높은 지위에 나아가서 화려한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옛날 친구들의 모습이 그리 부럽게 생각된 일은 없건만, 그들은 이제 힘들이지 않고 그들의 아들딸들을 안전지대로 옮길 수 있으려니 생각하니 그들의 신기루 같은 권세나마 부럽게도 여겨지는 오늘 저녁이다. (1950년 12월 12일)
결국 12월 18일에 서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전사편찬위원회 덕분이었다. 트럭 한 대와 찦차 한대가 김상기 선생, 이용희 선생과 우리 가족에게 주어졌는데, 갓난아이였던 나 때문에 어머니가 찦차를 타고 연상의 김 선생님 부인이 트럭 뒤칸에 타게 된 것이 무척 미안했다는 어머니 회고를 들은 일이 있다.
그렇게도 고마운 전사편찬위원회에서 아버지는 1950년 11월 하순에서 1951년 3월 초순까지 상임위원을 맡고 계셨는데, 일기에 위원회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 것은 11월 19일자 끝에 "전사편찬회 일을 보아달라는 교섭이 있었다." 한 줄뿐이다. 12월 31일과 3월 1일 사이는 일기가 중단되었고, 3월 8일 일기에 "척푼이 없은지 일 주일에 아내의 짜증만 늘어가니 세상이 민망스럽기만 하다." 대목에서 아마 3월 1일자로 위원회를 그만둔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이 들 뿐, 위원회 이야기도 없고 그만둔 이야기도 없다. 위원회와 관련된 강신항 선생님의 회고는 이런 내용이다.
50년 11월 24일에 선생께서 국방부에 들어가 함께 일을 해보자고 말씀하셔서, 1950년 12월초부터 국방부의 문관(군속) 신분으로 일을 하게 된 곳이 국방부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였다. 구성은 위원장, 부위원장, 위원 다섯 분, 조무원 2명이 모두 문관이었고, 현역은 책임장교와 운전병뿐이었다. 선생은 동 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서 실질적인 업무 책임자였다.
동 위원회는 작전경과나 전투상보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항에 관하여 실록의 기초사료를 만들듯이 문헌, 일지, 통계 등을 작성하고 있었다. 애당초 창덕궁 안에서 발족하였으나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가 실질적으로 업무를 시작한 것은 51년 1월 하순이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51년 3월에 동 위원회 상임위원을 그만두고 대학 강의에만 전념하시었다. 선생께서 동 위원회를 떠나신 이유를 필자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동 위원회에 계셨다는 것을 그렇게 영예롭게 여기시지는 않는 것 같았다. ("사람답게 사는 길" 344쪽)
강 선생님께 말씀으로 들은 회고로는 위원회 업무를 자료 수집과 정리에 국한시킬 것을 아버지는 강경하게 주장하셨는데, 홍보 용도의 전쟁사 서술이 위원회에 요구되자 그만두셨다는 것이다. 강 선생님은 학부생이던 자신을 위원회 조무원으로 아버지가 넣어주지 않았다면 전쟁에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아버지가 자신의 은사일 뿐 아니라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는 말씀을 여러 번 했다.
준위 대우의 청년에게 위원회가 생명줄 노릇을 했다면 대령 대우의 상임위원 가족에게도 위원회는 역시 생명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위원회 덕분에 부산 피난이 가능했다. 그 생명줄을 아버지가 잡은 것은 한쪽을 편드는 홍보 용도의 전쟁사 편찬을 거부하고 자료 수집과 정리에만 위원회 기능을 국한시킨다는 조건 위에서였다. 그런데 그 기준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줄을 놓아버리신 것이다. 12월 15일 일기에 적은 "죽어버리고 싶은 심경"을 다시 느끼셨을 것이다.
그분은 결국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지만, 살고 싶은 의지가 강하지 않은 상태에 처해 계셨으리라고 짐작된다. 1951년 3월 1일 두 달 만에 일기를 다시 적으면서 "피란 생활 두세 달에 꺾여버린 이 붓을 다시 잡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음을 기뻐한다"고 썼지만 일기는 4월 8일 이후로 다시 중단되어 있었다. 일기 쓰기는 전쟁 중 그분이 가장 강한 의지를 갖고 진행한 작업이었는데, 돌아가시기 전 반년 동안 다시 쓰지 못한 것은 한국의 장래를 암담하게 보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고향 선산에 묻힌 후 산소를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도 고향 방문을 권하지 않았다. 참혹한 기억이 배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196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 아버지 고향을 찾아가 그곳에 살고 있던 기범 형님을 만나고 아버지 산소에 절을 올렸다. 욱이 누님은 1981년 계명대학에 부임한 후 대구 부근에 사는 곳을 처음으로 찾아가 만났다. 또 한 분 이복 누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기범 형님은 내가 계명대학에 갈 무렵 고향을 떠나 부산에 가서 살다가 내가 계명대학을 떠난 직후 세상을 떠났다. 혼자서 아이 셋을 키우고 있던 욱이 누님은 내가 찾아갔을 때 무척 어려운 형편이어서 얼마동안 힘 닿는 대로 도와드리며 지내다가 온 가족이 여호와의 증인에 입교하면서 소원해졌다. 작은 아들의 고등학교 진학을 교련 때문에 포기하는데, 내가 진학을 너무 강하게 권하다가 관계가 불편해진 것이었다. 큰 아들이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어 살림이 자리 잡혀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측면에서는 뒷골이 그리 땅기지 않았다. 내가 대구를 떠난 후로는 형님의 유가족도, 누님 가족도 별 왕래 없이 지냈다. 그들과의 관계를 굳이 꺼려서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내 마음이 어두워져 사람을 가급적 보지 않고 살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 장례 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소식을 알고 찾아온 형수를 대하니 고맙고 미안했다. 내가 지내기 힘들다 해서 나보다 더 힘든 사정을 겪어온 이들마저 외면하고 지낸 일이 반성이 되었다. 형수와 조카딸 경구를 우리 집에 데려다 쉬게 하자 형수도 서운한 마음이 금세 다 풀린 듯 다시 만난 것을 기뻐했다.
발인 전날 형들과 형수에게 제안했다. 아버지 묘를 폐하고 유골을 수습해서 어머니와 나란히 모시도록 하면 어떻겠냐고. 형들의 찬성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형수도 흔연히 찬성해 줬다. 형수의 시어머님은 따로 계셨으니, 아버지를 어머니 곁으로 모시는 데 대한 입장이 우리와 똑같을 수 없는 것인데도. 어머니를 아버지의 부인으로, 그리고 자신의 시어머님으로 받드는 입장을 분명히 해준 것이다.
원칙은 세워놓았지만 실행을 어떻게 해 나갈지는 확실한 복안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례 끝낸 며칠 후 형수가 전화를 줬다. 10월 12일이 날이 좋다고 하니 그 날 옮겨 모셔서 어머니 49재 전에 일을 다 끝내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씀이었다. 그 전에 내가 내려갈 시간 내기가 힘들다고 했더니, 모든 것을 다 처리해 놓을 테니까 11일에만 맞춰 오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부탁드린다 하고 나는 유골함만 준비해 뒀다가 영진이랑 함께 내려갔다.
11일 저녁때 대구에 도착, 대구에 사는 둘 째 딸 경미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 부산에 사는 두 딸 중 경구는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왔고, 막내 영주(태어날 때 내가 이름을 지어줬다.)는 못 왔지만, 딸들이 모두 어머니를 잘 아껴드려서 보기에도 좋고 마음도 든든했다.
저녁 후 고향 마을에 가서 산역 맡으신 분에게 인사하고 경산의 고종형님 댁에 쉬러 들어갔는데, 욱이 누님이 찾아왔다. 몇 년 만인가. 근 20년 전 의성 부근 사실 때 찾아간 이후로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곱게 늙으신 것으로 봐서 몸도 마음도 꽤 편안하게 지내신 것 같다. 대구에서 나를 만날 때까지가 제일 고생이 심하셨고, 그 후 아이들이 제 구실 시작하면서 형편이 좋아졌다. 그래서 나와의 만남을 새벽 전의 짙은 어둠에서 벗어나는 서광과 같은 것으로 기억하는지, 나를 그저 동생이 아닌 대단히 고마운 사람으로 여겨준다. 딸 영주 가족이 뒤이어 인사하러 들렀고, 누님은 형님 댁에서 쉬신 후 아침에 출근길의 큰아들을 불러 인사시켰다. 원래 과묵한 녀석, 정이 그득한 웃음으로 인사를 올린다.(물론 절은 안 한다.) 교련 때문에 고등학교도 못 가고 나중에 군대 대신 감옥을 다녀온 작은 아들은 오스트렐리아에 가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여러 자손을 기쁜 마음으로 만난 후 유골을 모시러 고향 마을로 향하려니 마음이 개운했다. 산역도 순조롭게 끝나 형수와 집안 아주머니랑 이른 점심을 하고 파주 보광사를 향해 영진이랑 떠났다.
영진이에게도 정말 고마웠다. 봉양 부근을 지날 때 해방 당시 두 분이 계시던 곳임을 일러주고 말했다. "내가 애비 노릇 못하는 걸 주변에서 다들 걱정해 줬는데, 네가 곁에 든든하게 있는 걸 보고 모두들 기뻐하는구나. 고맙다."
영진이가 퉁명스러울 정도로 간단하게 대꾸한다. "요즘은 잘 하시잖아요."
네시 좀 넘어 보광사에 도착해 어머니랑 나란히 모셔놓은 다음 두 손 모으고 그 앞에 서서 가만 생각하니 아버지 돌아가신 후 만 61년 하고 사흘째 되는 날이다. 날짜로만 세면 22,284일째다. (암산 버릇을 여태 못 버렸다.) 집까지 데려다준 영진이를 보낸 후 친구 둘을 불러내 술 한 잔 샀다. 웬 술이냐 묻기에 '합환주'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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