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쓰러지시기 전까지 어머니는 사후의 화장을 결심하지 못하고 계셨다. 불제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장을 생각하셨지만 아버지와의 합장 가능성 등 이승의 인연에 매인 생각도 벗어나지 못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3형제 사이에도 방침에 합의가 안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이 닥치자 티끌만한 이론도 없이 화장으로 결정하게 된 것은 문영이 덕분이었다.
문영이. 金文英. <아흔 개의 봄>을 낼 때 나는 내 동생 이름을 밝혀서 쓰지 못했다. 그 아이의 어려운 생활이 그때도 계속되고 있었고, 그 아이와 인연 가진 사람들을 내가 떳떳이 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와 관련된 사실들을 대중에게 공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게 너무나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일기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럴 때 나는 그 아이를 '영이'란 이름으로 나타냈다.
영이는 작년 6월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0세라면 아쉬움 없을 시간일 수도 있지만, 애달픈 일생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 뱃속에 들어있던 유복녀. 어머니의 비통을 극적으로 강조해드리는 존재로 삶을 시작했다. 대학 진학까지는 그런대로 무난히 자라났는데, 대학 때부터 '부적응' 문제를 일으켰다. 억지로 시집보냈지만 딸 셋을 낳은 뒤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다. 6년 전 어머니 쓰러지실 때까지 어머니 곁에 매달려 있었다. 어머니에게 '평생의 짐'이라 할 수도 있고, 어머니의 일부분이라 할 수도 있는 존재로 평생을 산 것이다.
어머니 쓰러지신 후 5년간 영이를 보여드리지 않았다. 어머니도 영이 얘기가 나오면 "불쌍한 것..." 한 마디 하는 정도로 지나치시고, 꼭 봐야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으셨다. 그리고 영이를 데려다놓으면 모녀간의 비극적 관계가 또 되살아날 것이 겁나서 나도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계룡산에서 영이 지내는 조건이 안정되어 있어서 그곳에서 그냥 지내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찾아갈 때 영이도 어머니를 꼭 봐야겠다고 달려들지 않았다.
일반인들의 생각과 행동 방식에 맞추지 못하면서도 그 아이에게 특이한 통찰력이 있지 않나 생각될 때가 많았다. 운명에 대한 투시력이라 할까... 영이는 어머니와의 이별을 순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흔 개의 봄>이 나올 무렵인 작년 초 영이가 의지해 지내던 이가 건강 문제로 쓰러졌다. 그래서 의지할 데 없어진 영이를 다시 어머니 곁에 데려다놓기로 결정했다.
어머니 계시던 세종너싱홈에 영이도 와서 지내도록 원장님, 이사장님과 의논을 해놓고 있는 참에 어머니 건강에 한 차례 위기가 닥쳐 일산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동국대병원에서 수술받으신 후 한가족요양원에 모셔놓고 영이도 데려왔다. 모녀가 함께 사는 생활이 새로운 틀 속에서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보름 후 문영이가 문득 세상을 떠났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사고였다. 굳이 잘못이라면 본인의 잘못일 뿐. 나는 이것을 '자살'이라 생각한다. 통상적 의미의 자살은 아니라도, 이제 이 세상에 더 볼일이 없으니 갈 곳으로 떠나가겠다는 본인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머니까지 떠나신 이제, 영이의 특이한 통찰력을 전제로 한 이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쓸쓸하고 처량한 장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능한 한 간소한 방식으로 뒤처리를 해줬다. 화장을 하고 유골을 보광사 영각전의 구석진 자리에 모셨다. 그런데 이제, 어머니를 같은 길로 모시는 데 3형제 의견이 바로 합쳐진 것은 영이 생각 때문이었다. 어떤 좋은 자리에 어떤 좋은 모습으로 모시는 것보다 영이 가까이 계시기를 당신께서 바라실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영이의 통찰력은 내 상상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취의 중요한 결정에서 보통사람이 내리기 힘든 결단을 적절하게 내린 일이 여러번 있다. 어머니 쓰러지실 때, 그렇게 떨어지지 못하던 어머니와의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도 그런 예의 하나다. 세상을 떠난 것도 어머니와의 인연을 비롯해 모든 인연을 나름껏 온전히 하는 길이 되었다는 생각을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하게 된다.
연수는 낳아주신 어머니를 오래 전부터 만나고 싶어했다. 나는 그런 만남이 양쪽에 지나친 충격을 줄 것이 걱정되어 회피하고 있었는데, 영이를 한가족요양원에 데려다놓고는 이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수 아버지에게 전화로 그럴 뜻을 알려놓고 있는 참에 영이가 떠났다. 며칠만 더 있었으면 25년간 못 만난 딸을 만날 수 있는 시점에서 영이는 떠났다.
연수 하나만 생각하면 더할 수 없이 애통한 일이다. 그런데 장례식을 계기로 연수 동생 연형이와 연신이가 모두 어머니를 되찾게 된 일을 생각하면 그 며칠을 기다려주지 않은 데도 무슨 뜻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자매 모두 보광사에 우리 부부랑 함께 찾아가기도 하고 외할머니를 요양원으로 찾아뵙기도 하면서 영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인식을 넓혀 왔다. 자기네를 낳아줬지만 제 발로 자기네를 떠났던 '생모'의 추상적 관념을 한 인간에 대한 구체적 이해가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 아이들의 '엄마 찾기'에 내가 한 몫 거들 수 있는 그 시점에서 영이는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서 연수랑 조용히 함께 앉아 있을 때 내가 말해줬다. "네 어머니는 딸들에게 해준 것이 적지만 자기 어머니에게는 참 큰일을 해드린 것 같다. 외할머니가 이처럼 편안하게 세상 떠나신 것도 네 어머니가 볼일 더 없으면 떠나도 된다는 것을 보여드린 덕분이고, 외할머니 뒷처리 방향도 네 어머니가 보여준 대로 쉽게 결정된 것 아니냐? 외할머니께 네 어머니가 길을 열어드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연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그렇게 보면 그런 의미도 있는 것 같아요." 한 인간으로서 어머니의 존재 의미에 대해 더 떳떳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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