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 부산경찰서장이 노상에서 저격으로 암살당한 데 이어 26일에는 독촉국민회 경남지부 부위원장이 집에 찾아온 괴한에게 암살당했다.

 

부산경찰서장 권위상은 14일 상오8시15분경 부내 보수정 1정목 자택에서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던 도중 돌연 괴한 1명이 나타나 동 서장에게 권총 3발을 발사하고 도망하였다 하는데 탄환은 자동차 유리창을 뚫고 동 서장 좌측 어깨 밑에 맞아 즉시 초량정 이근용병원에서 응급가료를 하였으나 동 8시30분 드디어 절명하였다 한다. 이 급보에 접한 부산서에서는 즉시 비상소집을 하여 엄중한 경계망을 펴고 방금 범인을 엄탐중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6월 15일)

 

전반 부산경찰서장이 피살당한 후 아직도 그 범인을 체포치 못하고 있는 이즈음 또다시 독촉 경남지부부위원장 엄진영(49)은 26일 하오8시반경 동래읍내 복천동 자택에서 일 괴한에게 권총으로 피살당하였다 하는데 당시 현상을 목격한 동씨의 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오8시경 정체모를 학생복 비슷한 복장을 한 23·4세가량 되어 보이는 청년 1명이 찾아와 주인을 찾으므로 무슨 일이냐고 물은즉 독촉에서 비밀서류를 전달하러 왔다 하기에 그러면 내가 그 서류를 전달하겠다고 한 즉 비밀을 전달할 말도 있다하며 기어코 본인에게 만나게 하여 달라하므로 부득이 주인이 나와 그 청년을 맞이한 것인데 그 청년은 곧 주인을 어깨동무하는 듯이 포용하여 문밖으로 수보 나가 돌연 2발의 권총을 발사하여 1발은 복부에 1발은 두부에 명중 즉사케 하고 태연한 태도로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28일)

 

같은 부산에서 12일 간격으로 경찰서장과 우익 중진 인사가 테러에 목숨을 잃었다. 피해자 신분으로 봐서 좌익테러 의심이 나올 법한데, 그런 이야기는 전연 없었다. 당시 경찰에서 좌익이 저지르지 않은 짓도 뒤집어씌우던 풍조에 비춰보면 좌익 소행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좌익테러도 우익테러 못지않게 성행한 것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대개 인식해 왔다. 그런데 이 시기의 신문기사를 실제로 살펴보면 좌익테러는 소요사태 속에서 경찰관이나 ‘반동분자’를 습격하는 등 상황에 따라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많았다. 치밀한 계획에 따른 고의적 테러는 우익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권총을 이용한 테러는 좌익 쪽에 거의 없었다. 장택상의 회고 중에도 좌익의 은닉 무기 적발을 이야기하며 “그 무기는 주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99식 소총 등이었다.”고 했다. (<대한민국 건국과 나> 72쪽) 7월 12일에 조병옥과 장택상의 암살을 획책하던 전 조선민청원 4명이 검거되었는데, 그들이 준비한 무기는 수류탄뿐이었다.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7년 7월 15일) 1946년 11월의 장택상 습격에도 수류탄이 사용되었다. (장택상은 회고록에서 범인들이 권총도 사용했다고 적었지만 당시 신문기사에는 권총이 없었다.)

 

그리고 권위상 서장의 경우 승용차 안의 표적을 권총으로 공격했다는 점에서 5월 12일과 7월 19일의 여운형 습격과 같은 틀이다. 부산의 두 차례 암살사건은 우익 내부 세력다툼의 결과가 아닐까 추측된다.

 

브라운 소장의 6월 24일 성명서 중 장택상이 권해서 시위대 대표 3인을 만난 장면에서 “이 청년들은 주장하기를 리박사는 반탁통일운동에 있어 조선인을 지도하고 있는 바이며 또 만일 신탁이 기어이 실시된다면 죽음을 결행할 것이며 각 요인을 살해할 것이라고 하였다.”라 한 대목이 있다. 시위대는 미소공위 대표단을 위협할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요인 살해”란 말을 거침없이 꺼낸 것이었다.

 

이승만이 하지 사령관에게 받은 편지와 그에 대한 자기 답신 내용을 7월 1일 공개했다. 하지가 6월 28일 보낸 편지는 “당신네가 암살을 포함한 테러행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믿을 만한 여러 사람의 제보로 확인되고 있으니 그런 짓 하지 마시오.” 하는 직설적인 경고를 담은 것이었다. 브라운 소장이 시위대 대표들에게 들은 위협적인 언사 때문에 보내게 된 편지인데, 여운형에 대한 거듭된 암살 시도와 최근 부산의 두 차례 암살사건도 이 편지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돈암장 비서처에서는 지난 1일 최근 하지중장과 이승만 간에 교환된 서한내용을 발표하였는데 지난번 일어난 반탁시위를 계기로 미군정 당국과 이승만 김구 등과의 관계에 대하여 항간에는 구구한 억측이 유포되고 있는 때인 만큼 동 서한의 내용은 정치적 의의가 중대한 것이라고 한다.

 

◊ 하지중장 서한: “귀하의 정치기관의 상층부에서 나온 줄로 짐작되는 보도에 의하면 귀하와 김구 씨는 공위업무에 대한 항의수단으로서 조속한 시기에 테러행위와 조선경제교란을 책동한다 합니다. 고발자들은 이런 행동에는 혹건의 정치암살도 포함하기로 되었다 함을 중복 설명합니다.

이러한 성질의 공연한 행동은 조선독립에 막대한 저해를 끼칠 터이므로 이러한 고발이 사실 아니기를 바랍니다. 조선이 독립할 준비가 아직 안 되었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 주는 케케묵은 방식을 통하여 발현되지 않기를 나는 과거에도 바랐고 또 계속하여 바랍니다.”

 

◊ 이승만 답신: “귀함을 받고 처음 생각에는 위신 소관으로 이런 글을 대답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이 관계가 가장 중대하니만큼 경홀히 볼 수 없는 터입니다. 그 중대시하는 이유는 귀하가 이 고발자를 불신이라면 범죄적 음모에 내가 연루자라고 비록 간접으로라도 내게 공함을 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명예손상에 심중한 조건이며 따라서 한인 전체에 모욕을 가함입니다. 이것이 신탁지지를 강요하기 위하여 위협적이거나 함구시키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고발자의 성명을 발로하여 철저히 조사에 편의케 해야 될 것입니다. 나는 피고의 일인으로서 귀함에 이른바 나의 정치기관의 이면에 있는 자로 이 고발을 하였다는 인사의 성명을 지체없이 내게 알려주기를 요청합니다. 내가 유죄한 경우에는 벌을 받아야 하겠고 그렇지 않으면 이런 중대한 죄명을 내게 씌우는 자가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서울신문> 1947년 7월 3일)

 

김구도 하지로부터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았을 텐데, 김구는 이승만의 답장이 공개된 뒤에 이에 동조하는 답장을 쓰고 공개했다.

 

하지 중장과 이승만 박사의 교환된 서한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김구는 2일 하지 중장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전달하였다.

“이 박사가 각하에게 보낸 서한 내용에 대하여 본인은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바입니다. 각하의 서한은 우리에게 불만을 갖게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각하가 이승만 박사와 본인이 범죄계획의 혐의가 있다는 정보의 분명한 출처를 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본인은 이 박사와 함께 각하에게 밀고자의 성명을 알려 주기를 요청합니다. 이러한 사건은 충분히 또한 신속히 조사하여야 할 것을 각하도 동의할 줄 믿습니다. 각하는 우리에게 대하여 수차나 반미분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실 우리는 미국의 민주주의 원칙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뿐입니다.” (<서울신문> 1947년 7월 4일)

 

이승만과 김구는 테러계획 같은 것 갖고 있지 않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그런데 정병준은 1947년 5월 24일자 주한미군 정보참모부 보고(G-2 Periodic Report No.539)를 인용해서 조병옥과 장택상이 우익집단의 테러계획에 관한 보고를 올린 사실을 밝혔다.

 

조병옥은 “김석황이 이끄는 극우파가 (1) 여운형, 김규식, 허헌을 암살하고, (2)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를 암살하며, (3) 조병옥과 장택상을 암살할 계획”이라고 주장했다. 임시정부 김구 측의 행동대원으로 알려진 김석황이 테러를 준비하고 있다는 조병옥-장택상의 주장이 정확한 진실을 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김석황은 후에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를 한독당에 가입시킨‘죄’로 구속되어, 한국전쟁시 최후를 맞은 인물이었는데, 아마도 조병옥-장택상은 여운형에 대한 테러혐의를 김구 측에 미루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몽양 여운형 평전>(한울 펴냄) 448쪽)

 

우익테러에 권총이 흔했던 사정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독촉국민회 청년단 조직부장을 지낸 문병극의 아래 진술은 이경남의 <분단시대의 청년운동 상>(삼성문화개발 펴냄) 166-170쪽에서 재인용한 것이라는데 여기에 한 겹 더 재인용한다.

 

“저는 1946년 2월 6일에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 조병옥 경무부장은 호신용 권총을 건네주며 어깨를 두들겨 격려했습니다. 당시 청년단의 무기는 미제 45구경 권총이었습니다. 이 권총은 인천의 미군 무기고 책임자인 흑인 장교 매케인 대위를 미인계로 매수하여 70정을 한꺼번에 빼낸 일종의 범칙무기였습니다. 70정 중 우선 35정을 서울로 가져왔으나 나머지가 미군헌병대에 적발되었고, 나도 검거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조병옥 경무부장이 사람을 보내 신병인수 형식으로 빼돌려 주었습니다. 조병옥은 나를 대공투쟁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굳게 신임하여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적극 비호해 주었던 것입니다.” (<몽양 여운형 평전> 449쪽)

 

조병옥과 장택상은 5월 24일 이전부터 김석황에게 겨냥을 맞추고 있었다. 6월 23일 시위의 배후로 김구와 엄항섭, 김석황을 경찰은 지목했는데, 한독당 임정파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계획이 한 달 전부터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을 따라 김구와 맞설 태세가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김구 진영은 반탁세력을 장악해서 ‘임정 봉대’로 몰고 가려 했다. 반탁운동을 함께 하면서도 동상이몽의 관계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승만을 추종하는 조병옥과 장택상은 김구 진영을 빠트릴 함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김구 쪽에서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었을까? 그랬던 것 같지 않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