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도 지사의 이동 예정이 6월 28일 발표되었다. 전남 지사 서민호와 강원 지사 박건원을 맞바꾸고, 충남 지사 박종만을 전북 지사로, 인사행정처장 정일형을 충남 지사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경향신문>, <서울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6월 28일, 29일) 규모가 큰 이동일 뿐 아니라 예정 단계에서 발표했다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이동이 일부 당사자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그들과 관련된 정치계에도 물의를 일으킨 모양이다. 안재홍 민정장관은 7월 1일 이 조치를 해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 인사쇄신은 나의 민정장관 취임 당시 하지 장군 요청의 일 항목이나 이래 5개월에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다.
(2) 금반 인사이동에 전북지사 정일사의 용퇴를 요함은 사정에 인한 바로 국가적 행정의 견지에 의한 정당한 조치이다.
(3) 허위로 작성한 서류라는 것은 정부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다. 단연 그 사실이 없다.
(4) 부처장은 정부의 최고기관인 고로 그를 지방장관으로 전출시킬 수 없다는 것은 이유가 성립치 않는다. 금후 지방행정의 중요성에 돌아보아 인사교류를 생각하는 중이고 하물며 인사처는 위원회로 기구가 개혁되므로 처장의 지방 진출은 타당하다.
(5) 지방장관이 지방의 대소지역의 중요성을 따라 전남도지사의 강원도 전근은 퇴직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38선의 존재와 함께 현 강원도의 중요성은 서민호 전남지사의 강력한 행정이 요청된다. 서 지사가 전남을 떠나게 함은 국가적 견지로나 서 지사 개인의 정치적 장래로나 안정성 있는 점은 깊이 고려하였다.
(6) 강원도 박건원 지사는 정당을 초월한 엄정한 지방장관으로 충남 박종만 지사는 모 정당 제적자이나 공정한 성적 우량장관으로 금후 전남 전북 등에서 반드시 명랑한 정치가 실행될 것이다.
이번 조치는 군정장관의 인정을 받아 단행한 것으로 편파한 인사조치는 모두(毛頭)도 없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2일)
(4)에서는 정일형 측의 반발을, (5)에서는 서민호 측의 반발을 알아볼 수 있다. 정일형은 안재홍의 민정장관 취임 전까지 인사행정처장으로 군정청 인사권을 장악하고 조선인 간부 중 최고 실력자 위치에 있었다. 안재홍 취임 후의 인사 방침에 대해서도 견제력을 갖고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를 지방으로 내보내는 것이 이번 인사이동에서 안재홍에게 최대의 목적이었을 것 같은데, 며칠 전(6월 25일) 일기에 적은 것처럼 그는 8월에 러치 군정장관이 미국에서 돌아온 후 중앙으로 돌아오게 된다.
7월 3일 서재필의 기자회견장에서 헬믹 군정장관 대리가 인사이동에 관한 기자들의 몇 가지 질문에 답변했다. 안재홍도 함께 앉아있는 자리였다.
(문) 이번 발표된 지사급 인사이동에 대해서 그 경위 여하?
(답) 법령 135호에 의해서 인사문제는 결정하게 되는데 이번 인사문제는 정당하다고 본다.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부·처장 대다수의 동의를 얻어 민정장관으로부터 넘어온 것을 본관은 입법의원에 보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입법의원에서 법령118호에 의해서 방금 심중 고려중이다. 최후의 결정은 입법의원에서 하게 된다.
(문) 이번 인사이동은 임명이 아니고 이동이니 법령 135호에 해당치 않으므로 정무회의를 거칠 필요가 없지 않는가?
(답) 전남 지사의 예를 들면 전남 지사를 사면시키고 다시 강원도 지사로 임명한 것으로 해석하여 135호 법령에 쫓아야 한다.
(문) 완전히 인사문제가 결정되기 전에 발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데?
(답) 인사문제를 그리 비밀에 부칠 필요는 없다고 보며 민주주의국가에 있어서는 모든 문제를 숨겨서는 안 되며 인사문제를 결정하는 것이다.
(문) 이동을 하게 된 관리들이 관리도를 이탈한 언행에 대해서는?
(답) 미국식은 무관이 아닌 경우에는 불평과 불만을 말하여도 상관이 없으나 나의 생각으로서는 이런 경우에는 안 민정장관에게 자기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 신사도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4일)
마지막 질문에서 이동 당사자들의 “관리도를 이탈한 언행”이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기자들은 상명하복의 ‘관리도(官吏道)’를 생각한 것 같은데, 불평불만을 공표하는 것이 미국식 관리도에는 문제되지 않음을 헬믹은 밝혔다. 다만 신사도에 어긋나는 표현 방법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적했다.
군정청 법령 제135호에는 군정청 요직 임명에 입법의원이 인준권을 갖게 되어 있다. 신규 임명이 아니라 이동이므로 인준권의 대상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 것인데, 안재홍은 굳이 입법의원에 회부한 것이다. 한민당 등 일부 정치세력에서 문제 삼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회피’라는 오해나 곡해를 피하려 한 것으로 이해된다.
시중에서도 이 문제에 관한 왈가왈부가 많았던 모양이다. 논란의 초점은 ‘중앙청’의 인사 담당자 정일형의 ‘하방’에 있었을 것이다. 어느 도지사가 어느 도로 옮기는 일이야 사람들에게 무슨 큰 관심을 끌겠는가. 7월 5일 한국여론협회에서 충무로 입구와 종로에서 통행인 1,236명을 대상으로 ‘과도정부의 인사이동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설문의 여론조사를 했는데 이런 결과였다.
대찬성이나 범위가 좁다. 828명 67%
반대다. 136명 11%
무난하다. 98명 8%
기권. 174명 14%
(<경향신문> 1947년 7월 9일)
6월 25일자 일기에 인용한 정일형의 회고에서 본 것처럼 정일형은 안재홍에 대해 “중간노선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 부처장들의 협조와 신임을 얻지 못하였고, 특히 영어를 자유자재하게 구사하지 못해 군정 책임자들과도 잘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민심이 지지하는 중간노선 때문에 간부들의 협조와 신임을 얻지 못하는 분위기, 영어를 자유자재하게 구사해야 군정 책임자들과 잘 연결되는 분위기, 바로 ‘통역정치’ 분위기 아닌가. 그 분위기를 대표하는 인물의 하방을 시정 사람들은 반겼을 것이다.
민심이 중간노선을 지지하고 있던 사실을 밝혀주는 여론조사 결과가 마침 이 무렵에 나온 것이 있다. 조선신문기자회에서 7월 3일 오후 5시부터 1시간동안 서울시내 중요지점 10개소에서 통행인 2,495명에 대하여 5가지 설문으로 실시한 것이다.
(1) 6월 23일 반탁테러 사건은?
A 독립의 길이다. 651표(26%강)
B 독립의 길이 아니다. 1,736표(71%약)
C 기권. 72표(3%약)
(2) 미소공위와의 협의에서 제외할 정당 사회단체?
A 있다. 1,787표(72%강) 한민당 1,227표, 한독당 922표, 독촉국민회 309표, 남로당 174표, 민전 9표, 대한노총 91표, 전평 14표, (...)
B 없다. 341표(14%약)
C 기권. 331표(13%강)
(3) 국호는?
A 대한민국. 604표(24%강)
D 조선인민공화국. 1,708표(70%약)
C 기타. 8표(1%약)
D 기권. 139표(4%약)
(4) 정권형태?
A 종래제도. 327표(14%강)
B 인민위원회. 1,757표(71%강)
C 기타. 262표(10%강)
D 기권. 113표(5%약)
(5) 토지개혁방식?
A 유상몰수 유상분배. 427표(17%강)
B 무상몰수 무상분배. 1,673표(68%강)
C 유상몰수 무상분배. 260표(10%강)
D 기권. 99표(5%약)
(<조선일보> 1947년 7월 6일)
어느 질문을 놓고도 응답자의 70% 이상이 극우세력의 주장에 대해 확고한 반감을 표명했다. 민정장관이 중간노선을 걷기 때문에 부처장들의 협조와 신임을 얻지 못하는 군정청 분위기는 이러한 민심과 완전히 겉도는 것이었다. 이번 ‘4지사 이동’ 조치는 안재홍이 발의하여 부처장회의에서 과반수의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확고한 반대세력이 있는 부처장회의에서 어떻게 과반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는지 구체적 경위는 알아볼 수 없지만, 취임 이래 꾸준한 노력을 통해 그만한 지지라도 얻어낼 수 있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인사 조치를 통해 안재홍이 모처럼 존재감을 과시하자 반대자들의 공격이 극심해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삐라와 포스터가 난무하는 상황을 경찰이 방치하고 있다는 비난이 인 것을 아래 기사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근일 서울시내에는 과도정부 최고책임자들에게 대한 공격 비난삐라 포스터첨부 혹은 살포되고 있어 현재 군정 법령이 계속 적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취체할 경찰관이 방관적 태도를 취하고 있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반의 의혹이 깊어가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조(병옥) 경무부장은 8일 공보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입법의원 의장이나 민정장관에게 대한 공격삐라 또는 포스터를 첨부하는 것을 보고도 경찰이 취체치 않았다는 것은 교통정리하는 순경들이 혹시 무관심하게 보고 있는 관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앞으로 만일 그런 것을 보고만 있고 취체치 않는 경관이 있다면 그 번호를 알려 주기 바란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9일)
입법의원에서는 이 인사 조치가 신규 임명이 아니라 이동 조치이므로 인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군정장관대리 헬믹 대장의 인준과 부처장회의의 과반수 통과에 의하여 안 민정장관으로부터 발령된 서민호(전남)등 4도지사의 인사이동에 관하여는 과반 헬믹 군정장관 대리로부터 서한으로 입의에 인준을 요청해온 바 있어 8·9양일의 104차 105차 회의에서는 인준할 성질의 것이냐 아니냐는 문제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즉 김호 의원의 ‘인준하자’는 동의와 서우석 의원의 “법제사법위원회에 부쳐 입의의 인준 필요 여부에 대한 법적근거와 임명 경위를 조사하자”는 개의가 있었고 원세훈 의원으로부터 “금번 이동은 전임이므로 입의 권한 외이니 각하하자”는 재개의가 있었는데 재개의는 동의자 김호 의원의 요청으로 “본안은 신임명이 아니고 전임임으로 의거할 법규가 없으므로 반환함”이라고 원세훈 의원의 주문을 수정하자 김호 의원은 인준하자는 동의를 취소하였다.
따라서 서우석 의원의 개의가 동의로 원세훈 의원의 재개의가 개의로 변경되어 가부를 표결에 부친 결과 과반수로 개의가 통과되어 금번 인사이동은 입의의 인준이 불필요하게 된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10일)
이렇게 해서 민정장관으로서 안재홍의 군정청 인사쇄신 시도의 한 단계가 관철되었다. 불과 한 달 후 러치 군정장관이 미국에서 돌아오자 정일형이 바로 중앙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이로부터 1년이 지난 후 민정장관을 그만두면서 안재홍이 회고한 글 “민정장관을 사임하고 - 기로에 선 조선민족”에서 이 언저리에 관한 서술을 옮겨놓는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279-282쪽)
입법의원 성립보다 앞서 행정권 이양론이 미인 군정수뇌자 측에서 일어났다. 행정권 이양은 미소공위 결렬로 인하여 조선인의 민주통일정부의 수립이 요원하여진 정세에서 조성된 방편이다.
남북분단이 그대로, 미소길항이 그대로, 좌우대립이 그대로, 군정의 권병이 미국인의 방촌(方寸) 하나에 좌우됨이 그대로, 조선인이 각개인적 이해와 파당적 사관(私觀)에 따라 권병을 쥐고 있는 미국인 고관에게 취송배제함이 그대로, 미국인이 조선에 대한 통찰 인식이 아직도 미급한 바 있어, 취송자의 언변에 따라 시비 혹 번복될 수 있음이 그대로, 국제적 또는 사상적 분규한 속에서 미의 입장 혹은 험지에 빠질까 회의 초조함이 아직도 없을 수 없는 것이 또 그대로이므로, 그들의 조선인 상대자에 대한 판단이 확정키 어려운 조건 하에서, 역량은 민중을 총집결할 수 없고, 어학은 아의(我意)를 다소라도 소통할 수 없는 내가, 이때의 민정장관을 담당하는 것은 너무 몰아적(沒我的)이었다.
말하자면, 입법의원은 118호 법령에 의하여 군정부 내 3등급부터 이상의 주요인물에 대한 자격심사로써 인사쇄신의 법규상의 결정을 짓고 민정장관은 행정부의 조선인 측 최고책임자로서 공정엄명한 인사쇄신을 함으로써 행정-경찰 기타 각 부문의 공기를 일신하고, 관민간의 신뢰 친애의 도가 높아져서, 남조선의 정치의 민주화와 그의 총력집결에 의한 민생문제의 해결을 꾀할 수 있는 것으로만, 일반이 상망(想望)하고 식자 이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1월 말경, 나는 브라운 소장에 의하여 수교된 하지 중장의 추천서한에 인하여, 숙고집의(熟考集議)를 지나서 2월 5일 민정장관에 취임키를 수락하였다.
하지 장군의 서한은 “정부 내의 인사쇄신-경찰문제-식량문제-부일협력자문제” 등을 “양심적으로 인내성 있게” 해결하라는 의미의 위촉이었고, “조선독립정부에 달하는 길”이라고 규정하였었다. 그러나 ‘입의(입법의원)’ 그것의 성능은 전에 이미 민의(민주의원)의 지난 자취 있었고, 또 한미공동회담이 전연 도로에 그친 것은 그 무위에 가까운 성적의 전주곡이었었다.
민정장관은, 처음 수삼건의 해결 전무한 것은 아니나, 인사쇄신과 정치의 민주화 문제에 관하여는 “권력을 일개인에게 독점시키는 것은 민주정치 원칙에 위배된다”고 모 수뇌자의 반박만을 되풀이했다는 외에, 35호 법령에서 보는 바와 같은 견제 속에서 너무나 무권위한 편이었고, 오직 허다한 풍문의 중에 암류만이 종횡하는 편이었었다. 경찰에 관하여 문제 있었던 것은, 한미회담 이래의 현안이라 나의 사안(私案) 아니었고, 그것도 5월 중순 이후 전연 단념하였다.
5월 20일 이후 제2 미소공위 열리자 제3호 행정명령이란 자 있었고, 그로써 좌방의 책동과 우방의 반탁소동 등 미소공위 진행에 저해되는 행동을 제척하자는 군정 및 과정 당로의 방침에서 나온 것이나, 반탁투위 관계단체에 대한 협의대상 불허여 문제로써 소측은 결국 공위 파열을 계기지었다. 미소공위 제2차 파열은 결정적 파열이요, 문제는 국련에 옮기게 되어, 오늘날의 가능지역 총선거 및 정부수립의 단계에 온 것이다.
(...) 민정장관 재임의 전말은 후회함은 없다. 다만 그를 통하여 민족운동상의 득실을 일별하건대, 제1로 미군정 개시 당시 ‘인공’ 방지의 때문에 보수적 세력과 결련하게 된 이유는 증설(曾說) 있고, 다음에 김규식 박사를 의장으로 입의를 열고 나를 민정수반에 들어 정부각계에 애국자를 더 많이 등장케 하여, 써 인심을 일신한다고 서둘렀으나, 무위로 마칠밖에 없이 된 것이 제2차적 단계요, 이리하여 김-안의 등장이 중도반단으로 무위일밖에 없이 된 때 공포되었던 행정권 이양은 결국 조선인의 무능 또는 불공명의 건과가 조건과 같이 되어 전연 취소 말살됨과 같은 결과로 된 것은 또 제3단계라고 하겠다.
요컨대 조선인은 자체 상호의 취송배제에서 민족적 총력을 자신 말살하였고, 미국인은 일차의 전폭적 심임을 조선인에게 표현치 못한 채로 3주년을 지나, 지금 바야흐로 기능지역의 총선거에서 조선인의 독립정부를 산출하려고 하는 것이다. 독립정부 됨에 대하여 그 거대한 기여 있기를 기원치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북조선에서는 예상하였던 인민공화국 선포 준비의 비보(飛報) 왔다. 오호. 기로(岐路)는 의연 기로이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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