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이 7월 1일 오후2시 인천에 입항했다. 군정장관 고문 윔스 중령이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표양문 인천시장과 함께 함상에까지 출영했고, 김형민 서울시장이 꽃다발을 든 부인단체 대표들과 함께 잔교에서 그를 마중했다. 부두에서는 안재홍 민정장관, 김규식 입법의원 의장, 김용무 대법원장 등 조선인 3부 요인이 여운형 등 여러 정당-단체 대표 및 과도정부 부처장들과 함께 그를 영접했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2일자)

 

군정청 조선인 간부가 총동원된 환영식을 보면 군정당국이 서재필의 위상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알 수 있다. 이승만에게 온갖 방법으로 시달리던 하지가 이승만을 밟을 묘수로 서재필을 찾아낸 것이었다. 이 선택을 정병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하지는 이승만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1947년 초에 워싱턴을 방문했다. 이 기간 중 하지는 이승만에 필적할 수 있는 재미 한인 지도자를 물색했는데, 그 후보자로 선택된 사람이 서재필이었다. 2월 27일에 하지는 워싱턴에서 서재필을 ‘최고의정관’으로 임명하며, 자신과 함께 귀국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는 귀임시(4월 5일) 서재필을 동반하려 했으나, 81세의 노년이었던 서재필은 건강 악화로 동반할 수 없었다. 하지는 재차 서재필의 귀국을 종용했고, 서재필은 7월 1일에 귀국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이미 한국을 떠난 지 50년이 넘은 상태였고, 미국 시민으로 귀화한 지 오래여서 국내 정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서재필의 입국 시점에 이미 제2차 미소공위는 정돈 상태에 접어들었고, 서재필은 국내 정치에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우남 이승만 연구> 651쪽)

 

서재필은 1884년의 갑신정변에서 활약하고 1896년에 독립협회를 설립한 인물이었다. 청년 이승만이 활동을 시작한 곳이 독립협회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승만의 직계 대선배였다. 그리고 미국 생활도 이승만보다 선배였다. 혁명가로서나 미국인의 신뢰를 얻을 자격으로나 이승만을 누를 수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이승만의 측근 로버트 올리버의 회고에서 서재필의 귀국에 이승만이 긴장한 정황을 엿볼 수 있다.

 

7월 12일 오후 서울운동장에서는 서재필 박사 환영 군중대회가 열렸고 리 박사, 김구, 여운형, 그리고 그 외 몇 사람이 연설을 하였다. 이 무렵에 날짜가 안 적힌 한 편지에서 리 박사는 하지 장군의 지도자 조작극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적어왔다.

 

“서재필 박사는 이따금 나를 해롭게 할 뜻으로 이런 말 저런 말 하였다. 나는 공사 간에 이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이런 말들은 다른 사람보다도 서재필 자신을 해롭게 하는 역효과를 낳게 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말이 사람들에게 그가 서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최근에 시내 전역에 몇 가지 각각 다른 삐라가 살포되고 정부가 수립되면 서재필이 대통령직을 수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람들은 이러한 삐라로 백만인의 서명을 확보하려는 것이고 많은 중간파 사람들, 좌익분자, 그리고 불평분자들이 이 계획을 지지하고 있다. 서재필 박사는 수차에 걸쳐 자기는 한국을 돕기 위해 미국시민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공식으로 밝혔다. 이것은 하지 장군이 한국을 떠나기 전의 마지막 책략이다. 그 사람은 자기의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해서 한국사람들의 일을 간섭할 때까지 간섭하며 평화로이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박일영 옮김, 계명사 펴냄) 126-127쪽)

 

이승만이 경계심을 품는 만큼 중간파에서는 서재필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인천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승용차 뒷자리에 서재필 좌우로 김규식과 여운형이 나란히 앉은 모습을 보면 이 노 혁명가의 존재가 좌우합작의 상징이 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서재필은 1년 남짓 서울 체류 동안 아무런 의미 있는 활동도 하지 못했다.

 

서재필이 인천에 도착하던 시각에 평양에서는 미소공위와 북조선 정당-사회단체의 합동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소련 대표단이 이남 대표들을 만난 6월 25일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와의 서울 합동회의에 이어 미국 대표단이 평양에서 이북 대표들을 만나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이 공식 회의와 다른 성격이 만남 하나가 이 날 평양에서 이뤄졌다. 미국 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이 조만식을 만난 것이다. 공식적으로 표출되는 이북 지역 민의와 다른, 소련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진정한 민의’를 찾을 희망을 갖고 조만식을 만난 것이다. 조선민주당을 이끌던 조만식이 반탁의 뜻을 굽히지 않아 연금상태에 놓여 있다고 서울에는 알려져 있었다. 이 만남의 상황을 정용욱은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 대표단은 평양 방문 기간 중 우익 지도자들과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광범하게 면담할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이 면담을 통해 이들의 실제 입장과 태도를 알아내려고 했다. 또 소비에트식 정권에 저항하는 잠재적 반대가 광범하다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남한 우익단체들을 제외하려는 소련의 기도를 공격할 수 있는 자료를 얻기를 기대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미국 대표단장 브라운은 소련군 당국에게 강력하게 요청하여 7월 1일 조만식과 회견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브라운은 조만식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조만식은 미국만의 신탁통치가 가장 바람직하지만 미-소 양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조만식은 이 회견에서 남한에 내려가 정치활동을 재개하고 싶다는 강렬한 희망을 표시했다.

 

브라운은 주로 북한의 상황과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에 대해 의견을 구했고, 조만식은 이승만과 김구가 미소공위 성사를 위해 미국 대표단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큰 유감이라고 답했다. 조만식은 이미 5월 하순에도 밀사를 통해 하지에게 이승만의 반탁활동이 미소공위 사업을 방해할까 우려된다는 취지를 전한 바 있다. 또 조만식은 선거나 임시정부 수립 이전에 남한에도 토지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제까지 강경한 반탁론자로 알려져 있던 조만식이 이 시점에서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상황 인식을 표명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만식의 이러한 반응은 미소공위에서 미-소가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이승만-김구 진영의 반탁운동이 미소공위 성사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또 조만식이 신탁통치 실시 이전이라도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 것은 미군정으로 하여금 점령정책의 취약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북한과 남한의 좌익은 1946년 봄 이래 이북의 토지개혁과 그 성과를 남한에서 미군정의 경제정책과 비교하여 남한 민중들에게 널리 선전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2차 미소공위가 개최되고 있던 시점에서도 토지개혁법안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계속되었고, 이 문제의 해결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217-218쪽)

 

브라운과의 만남에서 조만식이 본의를 감춰야 할 강압을 받고 있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가 권력의 억압 아래 있었다 하더라도 브라운은 그 억압을 풀어줄 힘을 가진 존재였다. 1946년 초 그가 격렬한 반탁 태도를 보인 것은 <동아일보>의 ‘오보’를 보고 미국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소련의 신탁통치 고집만 꺾는다면 즉각 완전 독립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동안 현실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태도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6월 11일 발표된 공동성명 제11호의 로드맵은 지금까지 별 차질 없이 진행되어 왔다. 답신서 마감 7월 1일을 7월 5일로 연기하는 등 기술적 조정만 있었다. 그런데 6월 30일 평양에서 예정에 없던 본회의를 열고 이에 따라 그 날 예정되어 있던 합동회의를 이튿날로 늦춘 데서 흐름의 변화가 처음 느껴진다. 본회의는 7월 2일과 3일에도 열렸고 미국 대표단은 3일 밤 서울로 돌아왔다. 브라운 수석대표는 그간의 경위를 밝히는 성명을 5일 발표했다.

 

미소공위 미측 대표단은 6월 30일 오전 8시 평양에 도착하였고 7월 3일 오후 7시 당지를 출발하였다. 평양 체재 중 미측 대표단 일행을 위하여 소군당국은 숙사를 알선하였다. 브라운 소장 및 공위 대표는 같은 숙사에 투숙하였고 기타 수원은 공위사무소 부근에 있는 호텔에 유숙하였다. 당지 체재 중 미측 대표단은 소군당국의 정중한 환대를 받았으며 북조선주둔군사령관 코로트코프 장군은 브라운 장군을 위하여 장군의 평양시내에서의 자유행동을 취하도록 하였다. 미측 일행의 행동은 자유로왔으며 인민위원회보안대와 무장한 소군이 항상 일행의 신변을 보호하였다.

 

미측 대표단은 다수의 조선인 대표자와 지도자들과도 회견하였다. 식사 수송 호위 및 일반사무 처리를 위하여 공위 미측 대표단과 동행한 미군 약 80명을 수송한 특별열차는 평양역에 주차하고 있었다. 공위대표 이외의 수원은 체재기간 중 열차 내에 있었다. 그들은 자유시간에는 많은 사진을 촬영하였고 시내 각처도 구경하였다.

 

하지 중장과 제24군사령부와의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기 위하여 항상 수시로 제24군에서 준비한 전신전화와 또 매일 비행기로 연락하였다. 미육군기 OI 47호는 7월 1일 2일 및 3일 서울 평양 간을 왕복하였는데 동기는 매일 2시간씩 평양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허락되었었다.

 

평양을 출발하기 전에 브라운 소장은 일행 평양 체재 중의 소군당국의 성의와 편의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고저 코로트코프 장군을 방문하였으며 또 동 소장은 미측 대표단의 만반 편의를 위하여 항상 노력하여 준 쉬티코프 장군에게도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공위 소측 대표와 군악대는 퍼붓는 우중에도 불구하고 평양역에서 우리 일행을 환송하여 주었으며 정차장과 주요 가도는 도착시와 같이 우리 일행 출발에 지장이 없도록 일반 시민은 한 사람도 없었다.

 

공위의 평양회담의 주요목적은 북조선에 있는 정당 및 사회단체의 대표자들과 일당에 회합함이었었는데 이 회담은 7월 1일 엄숙히 거행되었다. 평양에 체재 중 공위는 7월 2일 3일 양일간 본회의를 개최하고 구두협의를 할 정당 및 사회단체의 명부를 검토하였는데 공동결의서 제12호에 규정된 각조항의 채택여부에 관하여는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 조항에 대하여서도 7월 7일 서울에서 차회의 공위 본회의 주최 시에 재토의될 것이다. 그런데 기간 공위는 질문서 답신에 대한 번역 및 심의를 계속할 것이다. 답신서 제출 마감일자가 7월 1일로부터 7월 5일까지 연기됨에 따라 정당대표자들과의 구두협의의 준비사무도 더 많아졌으므로 7월 7일 개시예정이던 구두협의는 연기되었는데 그 일자는 추후 발표할 것이다. (<서울신문> 1947년 7월 6일)

 

아직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협의대상 문제가 걸림돌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각조항의 채택여부에 관하여는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말이 그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제1차 미소공위에서도 치명적인 문제였던 협의대상 문제가 이번 재개를 앞두고 해결된 것으로 보였었다. 그런데 어째서 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6월 23일의 반탁시위가 문제를 일으켰다. 재개를 앞두고 미-소 양측은 과거의 반탁운동은 문제 삼지 않되, 협의대상 참여 후에는 반탁운동을 삼가도록 하는 기준에 합의했다. 그런데 6-23 시위에서 미군정 휘하의 경찰이 시위를 방조했다. 소련 대표단이 투석을 당했다고 하는데 경무부장이 나서서 투석은 사실무근이라고 우겼다. 설령 투석 사실이 실제로 없었다 하더라도, 대표단 보호책임을 가진 경찰이 그렇게 나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반탁운동에 대한 미군정의 태도를 소련 측에서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민당은 6-23 시위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6월 27일 성명에서 “금반 반탁시위는 민중의 반탁의사 표시요, 모모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며 미소공위를 방해할 목적은 아닐 것”이라며 시위를 옹호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6월 28일) 반탁세력에서는 협의대상 참여를 놓고 ‘역할 분담’의 전략을 공언하고 있었다. 회의에 참여하면서도 실제로는 은밀하게 반탁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었다.

 

이 정도 상황으로 인해 회담 진행을 포기한 결과를 놓고 소련 측의 회담 성공 의지가 충분했는지 여부를 따질 여지는 있다. 그러나 회담을 재개시킨 조건을 미국 측에서 무너뜨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