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라 하면 기독교문명권을 떠올리게 된다. 1990년대 유럽연합 강화에 임해 유럽의 뿌리를 어디서 찾느냐를 두고 두 개의 관점이 경쟁했다.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 나라들은 샤를마뉴를 지목했다. 기독교문명권으로서 유럽의 출발점이다. 다른 나라들, 특히 지중해 연안국들은 그리스 고전문명을 내세웠다. 지중해문명에서 유럽의 뿌리를 찾는 전통적 관점이다.
'유럽의 역사'를 서술할 때 이슬람문명권에 어떤 위치를 부여하나? 서양 학자들에게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관점을 시도해 보고 싶다. 근세 이전의 이슬람문명권을 기독교문명권과 하나의 세트로 보는 것이다. 대항해시대에 이르러 더 넓은 세계와 만날 때까지 유럽인(기독교인)이 대면하고 있던 '외부'는 이슬람세계뿐이었다. 적대적 측면이 부각되어 왔지만, 이슬람세계와 기독교세계 사이에는 공동운명체의 측면도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대항해시대 직전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번영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그 번영은 이슬람세계와의 교역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이슬람 자본주의'라 하여 11-12세기 이슬람세계에서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현상이 근년 밝혀지고 있다. 당시 기독교세계와의 수준 격차를 보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유럽의 첨병'이라기보다 '이슬람세계의 외곽기지'로 보는 관점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로마제국까지 고대에는 유럽이 유럽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남부유럽, 북아프리카, 중동을 포괄하는 지중해문명권이 있었고, 서유럽과 중부유럽은 흑해 동쪽, 이집트 남쪽, 어느 방향으로나 펼쳐져 있던 배후의 야만지 중 하나일 뿐이었다. 고대제국이 무너지고 중세로 접어드는 단계에서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이 나타났다. 중세의 두 문명은 고대 지중해문명의 공동상속자의 관계에 있었다.
공동상속자 중 가장 큰 지분을 가져간 것이 이슬람세계였고, 기독교세계는 한쪽 모퉁이만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문화-기술 수준에서 이슬람세계가 우월한 위치를 중세 내내 누렸다. 기독교세계는 이슬람세계의 압박 아래 서서히 자라나다가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격차를 급속히 줄였다. 그리고는 대항해시대를 통해 더 넓은 세계로 활동을 넓히면서 이슬람세계의 압력을 벗어난 새로운 시대에 돌입했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이슬람세계와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중세유럽의 상황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새로운 각도에서의 스케치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다. 확실한 자신이 서지 않는 문제는 대항해시대 이후 두 세계의 관계를 얼마만큼 그 연장성 위에서 고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틈 나는 대로 근대사에서 유럽-이슬람 관계를 살펴보아, 중세 시기의 관계 축이 퇴화한 모습으로라도 확인되어야 이 관점을 자신있게 시도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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