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0월 초순 좌우합작위원회(합작위)가 합작 7원칙을 발표한 직후 한민당이 7원칙 중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합작위에 참여했던 원세훈의 즉각 탈당을 기점으로 김성수-장덕수의 극우노선에 대한 반대자들의 탈당이 봇물을 이뤘다. 10월 한 달 동안 간부급 당원의 절반 가까이 빠져나가 한민당은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

 

1년 전 창당 때는 한민당도 정책 중에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을 내걸었었다. 해방 당시 토지개혁은 지주와 재산가를 주축으로 한 한민당조차도 부정할 수 없는 필연의 과제였던 것이다. 1년이 지난 시점에서 합작위가 내놓은 토지개혁 원칙은 앞서 38선 이북에서 시행된 토지개혁에 비해 매우 온건한 것이었다. 이런 온건한 방침마저 거부한 것은 한민당이 지주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정당임을 고백한 것이다. 한민당이 하나의 ‘공당’으로서 최소한의 상식에는 따르기를 바라고 있던 사람들이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한민당은 지주-재산가의 이익집단으로 성격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한민당을 떠난 사람들을 대거 받아줄 기존 정당이 없었다. 노선이 한민당과 비슷한 큰 정당으로 한독당이 있었지만 몇 달 전 합당한 국민당과 신한민족당계를 포용하는 아량도 한독당 주류인 임정계가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한민당 탈당파가 별도의 정당을 만든 것이 민중동맹이었다.

 

1946년 12월 22일 발족한 민중동맹은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노선으로 김규식을 총재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원세훈과 김약수를 중심으로 한 두 파벌의 대립이 심했고 김규식의 정치활동에 대한 극우파의 견제가 많았기 때문에 김규식은 민중동맹과 거리를 두었다.

 

원세훈과 김약수 사이의 갈등 내용을 세밀히 살필 수 없었지만, 김약수의 재능과 의욕이 지나친 데 문제의 뿌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인상이 든다. 김약수(1892-1964)는 일제시대 공산주의운동의 핵심인물의 하나로 ‘좌익의 모사(謀士)’로 명성을 떨친 인물인데 해방 직후 건준에 참여하려다가 박헌영과 부딪쳐 건준을 버리고 한민당 창당에 참여한 사람이다. 아래 기사들을 보면 민중동맹의 지나친 확장을 꾀하면서 원세훈과 대립하게 된 것 같다.

 

민중동맹에서는 객년 12월 하순 결성 이래 내부불통일로 인하여 김약수와 원세훈이 각각 중심이 되어 별개로 각 단체 포섭 내지 하부조직 강화에 활약 중이라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김약수는 포섭한 8개 단체 각 대표 임석 하에 14일 신문기자단과 회견하고 선언 및 정강을 발표하는 동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민중동맹 신진민족협회 좌우합작추진회 산업동맹 대한의열당 정경연구소 정치문제연구원 동우구악부 진우구악부 등 9개 단체에서는 기간 토의를 거듭한 결과 민중동맹의 명칭으로서 통합을 가결하고 금월 하순경에는 합동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각 단체에서 10명씩 90명의 합동준비위원을 배정하고 기중 30명의 실행위원을 선정하였다. (<조선일보> 1947년 4월 16일)

 

민중동맹 나승규 씨 파에서는 저반 발표된 8단체 합동에 관하여 본 동맹의 의사도 아니며 중앙상무위원회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일이라고 발표하는 동시에 김약수 씨는 당규에 의하여 처단하겠다고 19일 성명을 발표한 바 있었다. (<자유신문> 1947년 4월 20일)

 

그 후로는 관련기사가 보이지 않다가 5월 31일 민중동맹의 성명서가 나왔다.

 

“김약수 씨 외 8인이 대한의열단 외 7단체와 민중동맹이 통합하여 조선공화당을 결성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김약수 씨 외 8인이 본 동맹을 참칭하여 행한 순전한 개인적 행동이요 본 동맹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김약수 외 8인에 대한 처단 문제에 있어서는 상무위원회에서 적절히 결정하기로 되었다.” (<자유신문> 1947년 6월 1일)

 

이틀 후 민중동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김약수 등 8명을 제명했다는 발표가 나오고, 그 이튿날 김약수를 서기장으로 하는 조선공화당 조직 완료 기사가 보인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4일, <서울신문> 1947년 6월 3일)

 

민중동맹의 분열 사태를 보며 ‘당파성’ 생각이 난다. 조선시대의 당쟁까지 들먹이며 한국인의 당파성을 자조하는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많이 떠돈다. 한민당의 반동성을 규탄하며 함께 뛰쳐나온 동지들의 조직이 불과 반 년 만에 깨어지는 것도 이 당파성 때문일까?

 

민중동맹의 분열은 당파성보다 정치자금의 문제로 봐야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분열적 당파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면 어떻게 생각이 더 다른 한민당의 반동적 주류와 1년씩이나 함께 할 수 있었겠는가? 한민당이 이질적 요소들을 끌어안고도 1년 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금이 구심력을 발휘해준 덕분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5월 21일자 일기에서 본 것처럼 원세훈은 돈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경성방직 경영권도 마다하고 김규식 집에서 식객처럼 지내는가 하면 딸아이 입원비가 없어 남북 연석회의에도 못 갈 지경에 장택상의 돈을 얻어 쓰기까지 한다. 이범성 사건에서 20만 원 얻어 썼다고 걸렸는데, 지금 돈 2천만 원가량의 이 돈을 저 혼자 호의호식하는 데 썼을 것 같지도 않다. 명망이 뛰어난 지도자라도 이렇게 주변머리가 없어서야 어떻게 조직을 꾸려갈 수 있겠는가. 김약수가 아무리 원세훈을 존경했다 하더라도 그 지도력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민중동맹의 분열은 우익 중간파의 무기력한 상황을 보여주는 일이다. 우익 내에서 경쟁하던 반탁세력이 김구, 이승만의 명성과 한민당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강한 결속력을 과시하고 있는 반면 중간파의 합리적 노선은 더 많은 지지자를 갖고 있어도 지지 세력을 조직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김규식이 이범성의 자금 제공을 받아들이려 한 심정이 이해된다.

 

한편 좌익 중간파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근로인민당(근민당)을 창당했다. 4월 7일부터 준비위원회를 열어 4월 27일에 창립선언문 초안을 발표했다.

 

근로인민당은 세계민주주의의 역사적 배경을 짊어지고 신국면이 지시하는 민주주의의 방향을 정시하며 우리나라의 건국의 위업을 완성할 것을 임무로 하여 조선의 노동자 농민 소시민 전 근로인민과 애국적 정의인사의 전위당으로서 창립을 선언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기본적 정치노선을 규정한다.

(1) 우리나라의 통일독립은 민주주의 제 우방 특히 미소 양국에 대한 우리의 공정불편한 정책을 요하며 국제간의 불화에 어부의 리를 구하려고 민족적 이기심을 선동하는 국제 및 국내적 일체 파시스트 모략은 단호 배격한다.

(2) 우리나라의 재건은 일체 민주세력을 망라하여 광범한 민족통일을 기초로 한 진보적 신흥국가로서 표현하여야 한다.

(3) 우리는 우리나라의 사회적 발전과 경제적 재건을 위하여 봉건적 생산관계의 철저한 소탕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윤의 자극과 개인적 창의를 용허하는 민주주의적 신경제체계의 수립을 주장한다.

(4) 우리는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 발양하여 선진제국의 진보된 문화를 흡수 소화하여 민주조선의 신문화를 창조하기를 주장한다. (<서울신문> 1947년 4월 27일)

 

이렇게 해서 5월 24일의 결당대회까지 순조롭게 진행되는데, 그 과정에 특이한 점이 있다. 여운형이 전면적으로 나서서 앞장섰다는 점이다. 지난 가을 여운형은 남로당과 사로당 양쪽의 준비위원장으로 이름을 걸어놓고 난처한 입장에서 어느 쪽에도 나서는 일을 피했다. 사로당 추진자들은 여운형이 입원한 병실에 쳐들어가 창당을 선포함으로써 그를 등에 업으려고까지 했다. 이번 근민당 창당에는 그와 달리 여운형이 앞장서서 모든 진행을 챙겼다.

 

그 과정에서 여운형의 동기와 근민당의 배경에 이런저런 풍설이 떠돌았던 모양이다. 여운형이 이런 풍설을 잠재우기 위해 5월 4일에 기자들에게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1) 방금 신당에 관하여 항간에서는 미군정 북조선 등등의 외부지시에 의하여 출현한다는 풍설이 돌고 있는데 이는 모두 아당을 모함하려는 분자의 모략적 소위임을 지적한다. 근로인민당을 명령과 지시할 자는 오직 인민대중이 있을 뿐이다.

(2) 준비위원회에서 선언 강령초안이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결당대회에서 가장 정확한 선언 강령이 채택되기 위하여 대중토의에 회부한 것이다. 우리는 일체 독선주의를 배제하고 당 내외에 집결된 순수한 세력의 옳은 의견은 언제든지 이를 따르려는 자이기 때문이다. 열성적인 제위는 적극적으로 전인민의 정당한 의사가 이 선언 강령에 반영되도록 협력하여 주기를 간망한다. (<조선일보> 1947년 5월 6일)

 

미군정과 북조선, 대칭관계에 있는 두 세력을 근민당의 배경으로 보는 풍설이 떠돌았다는 데서 여운형의 위치가 얼마나 미묘한 것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미군정 배경설은 남로당 쪽에서, 북조선 배경설은 극우세력 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여운형은 1946년 2월 이후 다섯 차례나 이북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방문 목적은 남북 좌익의 협조관계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로당이 남로당의 패권주의를 뒷받침해 주고 사로당에 아무런 활로를 열어주지 않자 1946년 12월 4일 “좌우합작-합당 공작을 단념하면서”란 제목으로 자기비판서를 발표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런데 그 몇 주일 후 다시 평양을 방문하고, 서울에 돌아온 후 근민당 창당에 착수한 것이다. 그것이 북조선 배경설의 근거였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특별취재반 지음, 중앙일보사 펴냄) 90-184쪽, <몽양 여운형 평전>(정병준 지음, 한울 펴냄) 370-389쪽)

 

연말에서 연초에 걸친 여운형의 마지막 평양 방문은 북로당 지도자들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북로당은 남한 좌익을 통합하는 3당 합당에서 박헌영의 남로당을 밀어줬지만 박현영의 독재체제 때문에 이탈이 많았다. 그래서 이탈자들을 수습하는 역할을 여운형에게 바란 것으로 정병준은 본다.

 

북로당은 (1946년) 11월 16일 사로당 해체결정서를 발표했고, 이 결정서가 결정적으로 작용해 사로당은 해체의 길을 걸으며 파산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북로당 측은 풍지박산된 사로당 쪽을 그대로 팽개쳐둘 수만은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남로당의 일에 일일이 간섭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번번이 박헌영 측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일정한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된 때문이었다.

 

북로당의 판단은 좌익의 정수분자는 대부분이 일단 남로당에 들어갔다는 쪽이었다. 그런데 남로당에 들어가지 못한 지식인과 소부르주아 층이 사로당의 언저리에 남아 있었고 북로당은 이들의 처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실 남로당은 사로당 측과의 격렬한 투쟁을 통해 탄생된 만큼 사로당 측을 여유롭게 포용할 수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

 

12월말에 평양으로 올라갈 때만 해도 몽양의 심정은 정치일선에서 당분간이라도 떠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몽양이 북로당 지도부로부터 새로운 정당 설립을 추진하도록 요청받자 처음에는 극구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몽양은 자기비판서에서 밝혔듯이 ‘민주진영의 한 병졸’로 일하겠다는 심정을 재차 피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북측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이 전면에 다시 나서주셔야 합니다.”고 집요하게 몽양을 설득했다. (<몽양 여운형 평전> 385-386쪽)

 

정병준은 같은 책 397쪽에 근민당 참여자였던 유한종의 회고를 실었는데, 근민당 창당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되어 있다. 사로당이 ‘반(反) 남로당’을 내세운 것과 달리 근민당은 ‘비(非) 남로당’ 좌익이 뭉친다는 것이었다.

 

근민당을 출범시킬 때 몽양선생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배는 이미 떠났다.” 즉 3당 합당이 이미 되었다는 것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자는 것이지요. “지금 부두에서 배를 타려다 못 탄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다. 우리가 목적한 바를 향해 배가 떠났지만 이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서는 다른 배가 하나 필요하지 않겠느냐.” 이런 얘기였지요. 남로당 쪽에서는 반대입장이었습니다. “근로인민당이 나오면 힘이 분산된다. 힘이 분산되면 약화된다.” 이거였지요. “하나의 힘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역시 3당 합당의 원칙에 입각해서 나아가는 것이 혁명 자세가 된다.” 이렇게 말했지요. 이론적으로 옳은 얘기고 나도 인정을 하지요. 그런데 원체 기본 당을 못 따라가는 사람들이 숫자가 너무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을 한데 묶어서 민족해방전선에 동참하게 하려면 역시 그 사람들을 묶어내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동석했던 이일재 선생도 거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옳은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로당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그 사람들이 남로당에 들어갔으면 몽양선생도 남로당에 들어갔겠지요. 중앙이나 지방의 인민당원들의 정서를 묶어내기 위해서는 별도의 조직이 필요하고 지금 생각하면 잘했던 것 같습니다.” (유한종과의 인터뷰, 1992년 3월 5일 대구 미도다방)

 

상황을 여러 모로 살펴볼 때 근민당 창당에는 북로당 지도부의 도움이 꽤 있었던 것이 사실로 생각된다. 남로당에게 좌익 주류의 자리를 양보하고 제2진을 꾸린다는 것은 여운형에게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남로당에 포용되지 못한 좌익을 챙기는 것은 북로당이 바라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운형의 마지막 평양 방문에는 성시백이 동행했다고 하는데, 성시백의 활동 영역이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못하고 있지만 사업가이면서 북로당 공작원이었던 그의 수완이 대단했던 것으로 여러 연구자들이 추정하고 있다. 성시백이 근민당에 재정지원뿐만 아니라 조직방법에도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