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위 재개에 세인의 관심이 쏠려 있던 1947년 5월 말 한 사건에 대한 검찰의 조치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천만원대 사기 금액으로 ‘이범성 사건’과 나란히 주목받던 ‘임청 사건’의 뇌물죄가 5월 29일 불기소로 처리된 것이다. 5월 31일자 <동아일보>에 “임청 사건 수 기소(遂 起訴) 군정고관 수뢰는 증거불명 / 임청의 말 못 믿겠다...”란 제목의 큰 기사가 실렸는데, 서울지방검찰청장의 담화, 김병로 사법부장의 기자회견 문답, 그리고 담당 검찰관 강석복의 발언이 붙어 있다.

 

◊ 서울지방검찰청장의 담화

“세간에서 떠들던 임청 사기사건에 관련하여 대증수뢰사건이 잠재한 것 같이 선전되었으나 조사한 결과 그런 사실이 없는 것이 판명되었다. 사건의 내용은 임청이가 관계관청 관리 즉 상무부장 한승인 상무부국장 정완영 상무부미인 방직과장 비서 서정현 경기도 상공국장 안승한 식량영단이사장 이동제 농무부장 리훈구 농상국장 현근 등에게 다액의 금액을 증뢰하였다고 주장하기로 당 경찰청에서는 상세히 조사하였으나 금전을 교부한 데 대하여 하등의 증거가 없고 임청 공술 자체에도 모순이 있어 결국 범죄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28일 불기소처분에 부하였다.”

 

◊ 사법부장 담

(문) 임청의 자백서 수기와 공술 등에 의하여 증뢰했다는 사실이 역력히 들어났는데 어찌된 일인가?

(답) 임청은 미친놈이다. 과거 일제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어 세밀히 조사하였으나 증수뢰 사실이 없었다.

(문) 임청이 거액의 사기를 한 것은 사실인데 그 사취한 돈을 어디다 썼단 말인가?

(답) 조사하여 보았으나 그 돈을 어디다 썼는지 또는 어디다 감추었는지 전연 모르겠다.

(문) 검찰당국으로서 범인이 사취한 돈에 대한 용처를 모른다면 말이 되는가?

(답) 그러나 미친놈 떡 나누어주었다는 것과 같은 그 임청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이요.

(문) 사기죄는 성립이 되고 증수뢰죄는 불기소로 되었다는 것은 주범이 자백한 당시 피의자를 불구속으로 취조하기 때문에 증거가 안 되지 않았을까?

(답) 우리 검찰당국으로서는 할 일은 다했다. 세밀한 과학적 수사를 해보았으나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문) 이 사건은 전 특무과장 이만종의 사표제출 당시의 성명 등에 비추어 사건취조에 있어 압력이 있지 않은 것인가?

(답) 그럴 리 없다.

 

◊ 강 검찰관 담

“본 사건에 대하여서는 할 말은 많으나 함구불언을 지킬 뿐이다. 그중 한 증인에 관하여서는 29일 기소유예를 하였지만 증거되는 점이 있으므로 계속 취조중이다.”

 

임청은 2월 13일에 검거되었다. 그 이튿날 유치장에서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함으로써 사건의 배경에 대한 의문을 키웠고, 이후 취조 과정에서 군정청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을 준 사실을 자백,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5월 29일 기소에 이르기까지 <동아일보>에 게재된 관계기사의 목록이 이렇게 길다.

 

2월 16일 “백운장은 모리의 소굴 / 임청의 뒤따를 많은 관계들은 누구?”

2월 18일 “문제의 백운장주 면도로 자살기도”

3월 6일 “독직사건 또 발각 백만원 수회의 혐의?”

3월 9일 “민생을 도탄에 넣은 장본인은 누구? 이 사람들을 보라”

3월 14일 “임청 등 죄상을 자백 사건 연루 고관도 구금”

3월 15일 “문제의 「임청 사건」 모 국장 취조로 새 충격”

3월 22일 “「임청 사건」확대 이번엔 기생들을 유치”

3월 25일 “오리 독직사건 근일 중에 취조 단락”

3월 26일 “회물로 받은 「양단자」 모 국장(임청 사건) 집에서 압수”

4월 5일 “임청 사건 불일 송청”

4월 9일 “임청 사건 일단락 연루자도 불일 송국”

4월 10일 “문제의 임청 사건 일억만원 수뢰로 수 송청”

4월 11일 “백일하에 폭로 악질모리 임청 사건 앞뒤에 쌓인 가지가지의 죄악”

4월 19일 “문제의 임청 18일 기소”

5월 16일 “임청 사건 또 확대 현금·백미·유흥비 등 뇌물 받은 군정 고관들...”

 

5월 16일자 기사에는 뇌물 받은 사람들의 명단과 뇌물 내역까지 보도되었다.

 

한승인(상무국장) 현금 215만원 및 유흥비 24만원

정완영(부상무국장) 현금 10만원

서정현(방직과 통역) 현금 15만원

김선 우산 7본 백미 2가마 유흥비 2만원

이동제(식량영단 이사장) 현금 10만원

안승한(경기도 상공국장) 현금 6만원

주도동(상무국 경제과장) 현금 3천원

이훈구(농무부장) 현금 30만원

현권(농산업국장) 현금 10만원

기타 미국인 다수

 

5월 31일자 기사 중 김병로 사법부장의 문답에 “전 특무과장 이만종의 사표 제출” 이야기가 나온다. 이만종의 사임은 1947년 4월 3일자 <자유신문>에 “‘그레샴의 법칙에 따라’, 이 특무과장 관계 퇴진의 변”으로 보도되었다. 이만종은 6월 28일에 자신이 수사하던 임청 사건의 진상을 언론에 공개했다.

 

(1) 사건의 개요: 임정은 기지적 지능에 탁월한 수완을 가지고 탐욕에 광분하는 간상배와 사리추구에 급급한 탐관오리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중간적 이득착취를 꾀하고 1946년 5월부터 1947년 1월까지 상인 허경한 외 수인을 감언이설로 꾀어 상무부의 물자불하 알선을 이유로 약 1천여만 원을 편취 사기한 것이다. 그리고 물자 불하를 알선하기 위하여 상무국장 한승인을 비롯하여 동 부국장 정완영 식량영단 이사장 이동제 경기도 상공국장 안승한 방직과 통역 서정현 등 조선인 관리와 상무부 관계 미인 고문 6명에게 약 6백만 원의 거액을 증회한 내용의 사건이다.

 

(2) 수사의 경위: 임청은 2월 13일 구속당하여 취조한 결과 2월 21일에 1천여만 원 사기사실을 자백하였다. 그리고 군정고관 등에 증회한 일체의 사실까지 자백하였다. 이에 임청 진술에 의하여 수회 관계자를 취조하였으나 임청으로부터 향응을 받은 사실은 시인하되 뇌물을 받은 데 대해서는 전부가 완강히 부인하였다.

 

(3) 증거불충분한 이유: 피의자로 하여금 증거를 인멸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는 점 피의자가 고관의 요직에 있다는 이유로 권력적 차별 관념으로 수사책임자의 직권행사를 제한한 점 경찰수뇌부에서 피의자에게 통보하였다는 점 등 유형무형으로 고압적 위협을 당하여 수사에 만전을 다하지 못한 관계로 증거수집에 있어 충분치 못한 점이 있었다.

 

(4) 진상발표에 대한 견해: 임청 사건에 대한 4월 11일부 경무부 발표와 5월 29일부 공보부 발표에 의하면 거액의 뇌물을 주고받은 사실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고 다만 2, 3의 사소한 방증을 수집함에 불과하였으므로 임청은 구속 기타는 불구속으로 송청하였다고 하였으며 검찰에서는 증거불충분으로 임청 이외 관계자는 불기소처분을 성명하였다. 그러나 2, 3의 방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하여 석연치 못한 바가 있으며 민중의 의아를 가지게 하고 있다. 또 관리로서 향응은 현행 법규상 당연히 범죄가 구성됨에 불구하고 일종 참고정도로 묵살함은 그 이유가 어디 있는가.

 

(5) 6백만 원의 행방: 임청은 뇌물로 한승인을 비롯하여 군정 관리에게 6백만원을 주었다고 자백하였으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6백만 원은 어떻게 되었는지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동 사건의 열쇠는 오로지 이 점을 철저히 규명하는 데 있다. (<조선일보> 1947년 6월 29일)

 

경무부 특무과는 ‘권력형 비리’를 단속하는 부서였다. 이만종 특무과장은 이 역할에 나름대로 강한 사명감을 가졌던 인물로 보인다. 임청 사건이 터지기 얼마 전 그의 이러한 발언이 보도된 적도 있었다.

 

“관민이 이반되는 원인이 과거 관존민비의 사상이 아직도 남아있고 일반 모리배와 결탁하여 경제계를 흐리게 하므로 민간에 원성이 높아가고 있다. 특무과에서는 금후 이 같은 모리사건과 부정 관리는 근본적으로 숙청하겠다. 이 같은 일이 있으므로 민생문제는 날로 도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1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 제목을 보면 2월 13일 임청 검거 후 사건의 파장이 계속 커지고 있었다. 5월 16일자 기사에는 국장급 이상의 고관 7명의 이름과 수뢰액까지 보도되었다. 그런데 5월 29일 기소 때는 뇌물죄가 모두 제외된 것이다. 대중에게 신망이 높던 김병로 사법부장이 손수 해명에 나선 것을 봐도 이 조치에 대한 민심이 어떠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이범성 사건과 임청 사건의 공통점은 군정청 고위층의 특혜를 미끼로 투자자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군정청 고위 관리들의 도덕성에 대한 대중의 의심이 만연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연말 서울시장 김형민의 업무 수행 방식의 문제점을 이런저런 맥락에서 살펴본 일이 있는데,(1946년 11월 11일자, 12월 2일자, 12월 19일자, 12월 21일자 일기) 그런 문제점이 김형민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임청 사건에서 관리들이 뇌물을 받은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했지만, 향응을 받은 사실은 모두 확인되었다.

 

두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지금 파악할 길이 없다. 그러나 군정청 사법부와 경찰 사이의 엇박자가 양쪽 사건에서 모두 느껴진다. 이범성 사건의 경우 경찰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만지작거리는 것을 민정장관이 나서서 사법부로 이관시켰고, 임청 사건의 경우 경찰에서 철저하게 파헤치려는 것을 군정청 고위층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덮어버린 것 같다.

 

6월 5일 기자회견에서 경찰 인원을 묻는 질문에 러치 군정장관은 1947년 4월 30일자로 28,107명이라고 대답했다. 경찰은 단기간에 급속히 팽창된 기구였다. 그런데 경찰의 임무와 권한은 아직도 명확치 못한 것이 많아서 자의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6월 8일 사법부 고문 코넬리가 러치 군정장관에게 ‘사법경찰’ 확립을 제안한 것도 이 문제점 때문이었다. 코넬리의 제안은 이런 내용이었다.

 

(1) 경무부 수사국을 사법부 또는 검찰청에 이관할 것

(2) 각 경찰관구내에 있는 수사과 및 사찰과는 이를 분리시키고 각 도별 또는 특별시별로 사법경찰청을 설치할 것

(3) 각 경찰서 내에 있는 사찰계 급 수사계는 이를 분리하여 사법경찰서를 설치할 것이며 현 경찰서의 관할지역을 적당하게 통합하여서 사법경찰서의 수를 감소시킬 것

(4) 각 면에는 약간의 사법경찰관리를 배치할 것

(5) 현재의 경찰기관에서 사법사무를 제외하면 행정경찰사무만으로 될 것이나 일반 행정경찰관리에 대하여서는 현재의 삼림주사에 대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법경찰관리 직무취급 권한을 부여하여서 행정경찰사무에 있어서는 발각되는 범죄를 검거케 할 것

(6) 모든 사법경찰관의 임명은 사법부장 또는 검찰청장이 이를 보유할 것 (<동아일보> 1947년 6월 8일자)

 

5월 26일 조병옥 경무부장이 각 관구에 경찰평의회 설치를 지시한 것도 경찰의 위상을 정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지시는 안재홍 민정장관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26일 조 경무부장은 남조선 각 경찰관구에 통첩을 발하여 각 관구 경찰청장은 지방장관으로부터 치안상 필요한 의견과 지휘를 받을 의무가 있음을 강조한 다음 각 관구 도에는 도지사를 의장으로 경찰평의회를 각 구부군에는 군수 또한 부윤을 의장으로 경찰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명령하였다.

 

측문(仄聞)한 바에 의하면 금번 각 지방에 조직될 경찰평의회 또는 위원회는 중앙에 민정장관을 수반으로 하는 경찰위원회의 하부조직으로 설치되어 경찰 강기와 인권문제를 중심으로 야기되는 제반 불상사에 대처하여 지방민심을 순화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서울신문>, <경향신문> 1947년 5월 29일자)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