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위 재개가 목전에 닥친 5월 18일 오전 미군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이 우익 인사 8인을 초청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승만, 김구, 조소앙, 조완구, 김성수, 백남훈, 장덕수, 서상일이었다. 19일 오후에는 하지 사령관이 이승만, 김구, 조소앙, 김성수, 장덕수의 5인을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반탁세력의 미소공위 방해를 막고 참여를 권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20일 이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지 중장과 브라운 소장은 금번 재개될 공위에서는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선결문제이고 탁치니 원조니 하는 것은 임정 수립 후에 임정과 협의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나는 삼상결정에서 신탁조항을 삭제하고 의사표시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되 여하한 형태의 민주주의 임정인지 명시하기 전에는 공위에 참가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즉 민주주의에도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가 있을 것이며 이를 반반으로 한 통일임정은 수립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과거 1년 반이 지난 오늘 과거를 잘 알고 있으므로 무조건으로 신임할 수는 없다. 가설 임정수립에 성공하여도 최고의 희망은 반반씩이 될 터이니 그런 정부는 성립될 수 없으며 이때에는 남조선 공산화를 방지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5월 21일)

 

미소공위 참여의 조건 두 가지를 내걸었다는 것이다. (1) 신탁통치 조항 삭제 (2) 어떤 식 민주주의인지 밝힐 것.

 

쉽게 말해서 미소공위를 무시하고 그 결렬을 바란다는 것이다. (1)은 모스크바결정을 뒤집어야 한다는 것인데, 모스크바결정의 실행기구인 미소공위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2)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를 대비시킴으로써 미소 간의 대립을 부추기는 것이다.

 

엊그제 일기에서 밝힌 것처럼 이승만과 미국 정부 사이의 ‘밀약설’이 떠돌고 있었다. 누가 퍼뜨린 소문인지는 빤한 일이다. 밀약설의 내용인즉, 미국 정부가 남한 단독정부를 세워 이승만에게 맡기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 사령관보다 ‘윗선’에서 남한에 괴뢰국가를 만들기로 이승만과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 미국으로 떠나면서부터 하지와 완전히 결별했다. 미국에서는 하지가 용공주의자라고(심지어 공산주의자라고까지) 인신공격을 했고, 조선에서는 하지 같은 ‘아랫것’들이 모르는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을 냈다. 그 허위선전의 도가 심했기 때문에 하지가 이승만의 주장을 모아 국무성에 보내 진위를 밝혀줄 것을 요청했고, 그 결과 이승만의 주장을 반박하는 국무성 발표가 5월 23일에 나온 것이다.

 

이승만은 이처럼 하지를 묵살하고 분단건국의 길로 일로매진하는 입장이었으니 미소공위도 무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반탁진영 중에도 김구 세력과 한민당의 입장은 이승만과 차이가 있었다.

 

김구 세력은 이승만처럼 분단건국을 지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소공위를 경시하는 입장은 이승만과 통했다. 미소공위의 가장 큰 목적이 새로운 임시정부를 만드는 것인데, 김구 세력에서는 중경에서 돌아온 임정이 임시정부 역할을 맡기 바랐다.

 

한민당은 이념을 가진 정당이라기보다 눈치를 봐서 자기네 이익을 늘리고 손해를 줄이기에 급급한 이익집단이었다. 어떤 건국 방향에라도 참여해서 자기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고 싶어 했다. 그러니 미소공위에도 일단 참여해 놓고 보자는 입장이었다.

 

이런 입장 차이를 조정하기 위해 반탁진영은 회합을 거듭했다. 20일과 21일 돈암장에서 모인 것을 보면 이승만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탁의사 표시 자유의 보장이 없이 공위가 재개되느니만치 반탁진영으로서의 공위참가 문제는 중대하다. 따라서 공위가 금일 재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탁진영에서는 공위참가에 대한 결정을 짓지 못하고 이 문제로 연일 회합만을 거듭하고 있다. 즉 20일 하오3시부터 돈암장에서 이 박사를 비롯하여 김구 조소앙 조완구 김성수 백남훈 장덕수 제씨가 회합하여 장시간 공위참가문제로 토의한 바 있었고 21일에는 오전9시반부터 12시반까지 역시 동씨들이 돈암장에 회합하여 참가여부를 협의하였다 하는데 대체로 우익진영에서는 이 박사 태도에 추종할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22일)

 

21일과 22일에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상무위원회가 열려 미소공위 참가 문제를 토론했다. 23일에는 반탁진영 50여 개 단체 대표들이 반탁투위에 모였다. 이런 모임에서 반탁진영의 행동 통일 필요성이 강조되었고, 결국 구체적 방침은 25일 돈암장 모임에서 결정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보류 양론으로 인하여 우익정계에 일대파문을 야기하고 있는 차제 25일 상오11시부터 시내 돈암장에서 이승만 김구 조소앙 김성수 장덕수 김준연 제씨가 회합하여 공위대책을 재검토한 바 있었다 하는 데 동 석상에서 한민 계열 제씨는 참가 주장을 역설하여 이를 종용하였으며 종래 강경한 보류론을 주장하던 이승만도 자신은 불참가하더라도 민족진영의 각 단체는 다수 참가하도록 권유한 바 있었다 한다. 한편 임정 계열의 김구 조소앙 양씨는 시종일관한 태도(참가보류)로써 임하였다 한다. 그런데 일부 측에서는 이에 관하여 이로써 임정계를 제외한 우익 각 정당은 공위에 전적으로 참가하게 될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다 한다. (<서울신문> 1947년 5월 27일)

 

이 과정에서 이승만과 김구의 공동성명 하나가 23일에 나왔다.

 

“우리는 미소공동위원회가 38선을 철폐하고 독립정부를 수립하는 임무에 속히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공동위원회에서 한인지도자들을 협의에 참가케 하는 데는 개인과 단체에 일임하여 자유로 결정케 할 것이다. 우리는 공동위원회의 임무수행에 관한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이 명확히 되기 전에는 양심상 협의에 참가할 수 없는 처지를 표명한다.

 

(1) 소위 신탁통치와 독립정부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므로 신탁통치 조건을 전부 삭제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신탁통치가 보통 해석되는 바와 같지 아니한 것을 공식으로 충분히 성명하거나 하여 독립정부수립과 모순되는 바가 없게 되어야 할 것이다.

 

(2) 미소양국이 한국에 민주주의적 독립정부를 수립하기로 목적을 삼는 바 민주주의라는 명사에 2종의 구별이 있으니 소련이 주장하는 민주정체가 하나이요 미국에서 실행되는 민주정체가 또 하나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되겠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이 두 정체를 혼잡해서 정부를 수립하면 장래 정부의 분열과 국내의 혼란을 면키 어려울 것이요 열국의 기대에 어그러지게 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상 두 가지 조건이 석명되기를 요청하고 있는 중이므로 이 문제가 충분히 해결되기까지 공위협의에 참가하기를 보류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23일)

 

이승만의 주장에 김구가 합류한 것이다. 사흘 전(5월 20일) 이승만의 발언보다 표현은 약간 완화되었지만 내용은 같은 것이다. 분단건국의 속셈은 이승만만의 것이었지만, 미소공위를 경시하는 김구의 태도는 여기까지 이승만과 합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5월 18일자 일기에 소개한 오스트리아의 경우 10년의 신탁통치를 군소리 없이 감수했다. 오스트리아는 조선에 비해 잘못할 경우 전범국으로 몰릴 위험이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경우와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럴 위험이 조선에게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더 큰 차이는 연합국을 만족시켜야만 나라의 살 길이 열린다는 인식의 투철함에 있었다.

 

조선의 민족주의를 대표하던 김구의 상황 인식이 조선의 장래를 망치는 데 한 몫을 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승만이 어떤 음모를 획책했더라도 김구가 미-소 협력의 필요성을 인정했더라면 미소공위에 대해 이토록 경솔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승만의 음모는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김구를 지도자로 모시려고 한독당에 모인 민족주의자들도 이 단계에 와서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위에 참가·보류 양 조류로 대치적 입장에 있던 한독당은 25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제 4개 국가의 우의적 협조로 과도적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단계에 있어서 주인의 입장을 가진 한국인민으로서 정당하고 공평한 민족자결의 의사에서 (...) 탁치제도를 취소하고 즉시 독립을 보장하는 때까지 참가권의 사용을 보류한다.”

 

한독당은 공위참가문제에 있어서 참가하자는 국내파와 참가를 보류하자는 해외파의 양론이 있어 저반 상무위원회에서는 보류하자는 파가 우세하여 보류를 결의한 바 있었는데 이와 전후하여 동당 서울시당부에서는 지난 23일 회의를 열고 공위에 참가하기로 결의한 후 참가해야 된다는 건의서를 중앙상무위원회에 전달하였다 한다. 그리고 동당에서는 오는 29일 상무위원회를 개최하고 시당부의 건의를 중심으로 공위참가문제를 재검토한다고 한다. (<서울신문> 1947년 5월 28일)

 

한독당의 국내파란 1946년 4월 원래의 한독당과 합당한 국민당과 신한민족당 출신을 말하는 것이다. 국내파와 해외파 사이의 균열은 1947년 1월 18일의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드러난 일이 있었다. 신한민족당계의 권태석이 3상회의 결정 지지를 제안한 데서 문제가 표면화되었는데, 국민당계의 안재홍은 중립적 태도를 지켰지만 해외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위에 대한 해외파와 국내파의 입장 차이가 해소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가 미소공위 재개에 임해 터져 나온 것이다. 이후의 경과는 서중석이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538-539쪽에 정리한 내용을 옮겨놓는다.

 

미소공동위원회가 5월 하순에 재개되자 당내 분규는 공동위원회에 대한 참가와 보류 문제로 그때까지의 분규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일어났다. 당에서 제명된 권태석 등이 반민주파의 음모를 분쇄한다면서 민주파 한독당을 만들었고, 이들을 지지하는 중앙위원 21명이 민주파 한독당에 합류한 것도 한독당에 타격이었지만, 더 큰 타격은 국민당계로부터 나왔다.

 

한독당의 중앙위원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의의식, 이승복 장지필, 엄우룡 등 80여 명은 6월 2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우리 민족 총의인 자주독립을 쟁취키 위하여는 기동성 있는 총명과감한 발전적 투쟁을 요한다”며, “공식적인 국제투쟁의 형해를 단연 벗어버리고, 만만한 투지를 내표한 국제협력의 전술적인 진지한 건설과업만이 참으로 해방 완수의 대업을 신속히 쟁취하고서 조국 조분(爪分), 민족 파멸의 위난을 구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위원회에서 협의와 지지는 결정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6월 21일 안재홍 등 한독당 혁신파는 신한국민당으로 발족하였다.

 

이로써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을 때 통합되었던 한독당, 국민당, 신한민족당은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면서 한독당과 신한국민당, 민주한독당으로 3분되고 말았다. 현실을 보는 관점이 엄연히 달랐는데도 불구하고 김구의 강력한 추진력 속에 우익의 대동단결이라는 명분 하나로 통합은 되었지만, 결국 민족문제의 해결방안을 두고 의견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6월 21일 신한국민당 발족 성명은 <자유신문> 1947년 6월 22일자에 이렇게 인용되었다. 한독당 주류(해외파)가 미소공위를 거부하고 민주적 원칙을 어기는 데 대한 불만이 담겨 있다.

 

“우리는 국제협력에서만 자주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에서 미소공위에 참가하고 또 우리의 실천 행동에서 민주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념을 같이 하는 도-군당 지부와 함께 단연 한국독립당과 메별하고 ‘신한국민당’(가칭)으로 신당 발족함을 선언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