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1일자 일기에서 이범성 사기사건을 소개했을 때, 독자 중에 “출처를 모르는 채로 정치자금을 받은 것은 잘못한 일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었다. 필자가 예상했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가만 생각하니 필자의 불찰이다. 2012년의 독자가 1947년의 일을 생각할 때도 2012년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947년의 상황을 충분히 재현하지 못한다면 독자가 나와 같은 시각으로 그때의 일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1947년의 조선에서는 지금처럼 소유권 개념이 확고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덜 자리 잡은 때였기도 하고, 식민 지배라는 의롭지 못한 체제 아래 재산이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토지개혁을 위한 대지주 토지의 무상수용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상수용을 주장하는 사람도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을 생각했다. 대지주들 자신 외에는.

 

기업가들은 지주들보다도 전쟁 협력 등 친일의 혐의가 뚜렷한 경우가 많았다. 1940년대 들어서는 비행기 헌납이 부호들 사이에 대유행이었다. 설령 본인에게 친일 의지가 없더라도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헌납을 마다할 수 없는 시국이었다. 그리고 어느 규모 이상의 기업이라면 일본제국의 정책에 호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주든 기업가든 부호들은 일본 항복을 맞았을 때 위기감에 몰렸다. 재산의 일부를 포기해서라도 나머지 재산을 지킬 생각을 한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거금을 싸 들고 유력 정객을 찾아가는 행태가 벌어졌다. 저택을 제공하기도 했다. 경교장, 돈암장, 이화장이 모두 그렇게 제공된 것이다. 엇갈리는 정파들 중 어느 쪽이 득세할지 눈치를 보며 돈을 거는 도박판이었다. 그런 베팅을 하면서 “벌기는 개 같이 벌었어도 쓰는 것은 정승 같이 쓰겠소.” 자기가 속으로는 늘 애국자였다고 생색을 내기도 했다.

 

베팅을 했다가 잘못 짚었다고 판단해서 무르려 드는 경우도 있었다.

 

“자진 기부한 어학회관, 타협도 없이 방매(放賣)설 - 이 씨 변심에 어학회 분개 성명”

 

주인도 모르는 새 집을 팔겠다고 경매 광고를 낸 자 - 조선어학회는 해방 후 이종회 씨로부터 현재의 사옥인 청진동 188의 건물을 자진 기부받아 이제까지 아무런 탈 없이 사용 중인데 요즘에 들어 기부했던 이 씨는 마음이 변했는지 그 건물을 팔겠다고 신문광고까지 내어 집주인인 조선어학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

 

성명: “요즈음 신문지상에 본 회관이 5월 20일 경매된다는 광고가 게재되었으나 청진동 188 현 회관은 해방 후 집주인(이종회)이 기부한 것으로 이미 그때 신문지상에 발표되어 천하가 다 확인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회관은 새삼스러이 경매될 집이 아니라는 것을 사회 앞에 성명한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20일)

 

이종회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인물이다. 검색해 보니 논문 하나가 나온다. 배석만의 “일제 말 조선인 자본가의 경영활동 분석: 백낙승과 이종회의 군수회사 경영을 중심으로”(<경제사학> 제45호, 2008년 12월). 논문을 구해 보지 못했지만, 장 제목 중에 “이종회의 대인조선주식회사 인수와 경영”이 있다.

 

이종회나 대인조선주식회사의 실체를 더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이종회가 대인조선주식회사라는 이름의 군수회사를 일제 말기에 경영한 사실을 이 논문의 제목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가 청진동의 건물을 조선어학회에 기부한 까닭도 바로 짐작된다. 조선어학회는 해방 당시 민족주의자들의 가장 뚜렷한 집단이었고 더욱이 1942-43년의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의 대규모 탄압을 받은 마지막 단체로서 각인되어 있었다.

 

이종회가 건물을 기부한 것은 자신의 반민족 행위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경우 방패로 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2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번의한 까닭이 무엇일까? 반민족 행위에 대한 심판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거나 조선어학회보다 더 믿음직한 방패를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이유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는데, 이 건물 기부를 취소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닐지 짐작해 본다.

 

<해방일기> 작업에 신문기사를 많이 활용하고 있는데, 돈 문제는 신문기사를 통해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다. 개인의 회고에서 더러 참고가 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송남헌 회고록: 김규식과 함께 한 길>(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에 재미있는 대목이 꽤 있다.

 

김 박사 숙소인 삼청장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는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삼청장은 김 박사 내외 외에도 종로경찰서에서 파견한 경호원 2명과 운전기사, 그리고 식모가 있었고 또 매일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식사문제도 해결해야 했는데, 이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김 박사의 양해를 얻어 부장환이라는 나의 대구사범 동기로부터 매달 10만 원씩을 받아 삼청장의 운영경비로 썼다. 그는 일본에서 귀국하여 조선피혁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상당한 재력가로 소문이 나 있었다. 김 박사는 돈의 출처와 용도를 분명히 밝혀야만 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나는 사전에 부장환의 이야기를 하고 김 박사의 승인을 받은 다음, 돈을 받아 제반경비로 집행했다.

 

부장환으로부터 1년 정도 돈을 받았다고 기억되는데, 이외에도 다른 기업이나 독지가들이 생활비나 정치자금에 보태 쓰도록 하라면서 이따금 돈을 보내왔다. 그러나 김 박사는 지정된 용도 외에는 절대로 돈을 쓰지도 받지도 않았다. 단언하건대, 김 박사는 돈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깨끗했다고 할 수 있다. (76-77쪽)

 

당시 입법의원 세비가 월 3천 원가량이었다. 김규식의 면모로 보아 생활에서도 큰 사치를 하지 않고 활동에서도 공작비 많이 쓰는 일이 없었을 것 같은데, 정치적 거점을 운영하는 데만도 월 10만 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부장환의 자금 제공을 비서인 송남헌이 알선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송남헌이 김규식을 모시게 된 것은 1946년 2월 민주의원 비서처에 근무하게 되면서였다. 민주의원이란 기관을 통해 거느리게 된 비서라면 통상적 의미에서 ‘김규식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의 알선을 통해서야 그만한 자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었다는 데서 김규식이 얼마나 주변머리 없는 사람이었는지 알듯하다.

 

부장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검색해 보니 <디지털제주문화대전>에 이렇게 나와 있다. 아마 김찬흡의 <제주항일인사실기>(북제주군·북제주문화원 펴냄, 2005)에서 옮긴 내용 같다.

 

조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고 1931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신문 배달을 하면서 1932년 2월 시마나카[島中信雄]의 권유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출판노조 오사카지부에 가입하여 오사카지부의 위원과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간사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후카야[深谷]의 권유로 일본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출판노조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중 1933년 6월 검거되었다. 1935년 8월 31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오사카에서 오지마금속주식회사를 창업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조선피혁주식회사 관리자, 국제상선주식회사 사장을 지냈고, 이 밖에 경기도 상공회의소와 서울 상공회의소 의원 등을 지냈다. 1948년 남북협상 때 김규식(金奎植)의 수행원으로 평양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송남헌의 회고에서 조선피혁 경영자란 말을 보고는 부장혁도 식민지시대 이래의 부호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 이력을 보고 그렇지 않음을 알았다. 민족주의-사회주의 운동가였고, 해방 후 귀국해서 대기업의 경영을 맡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김규식과 송남헌이 친일파의 도움 받기를 꺼려한 하나의 방증이다.

 

부장혁이 김규식의 정치자금 대준 것도 요즘 기준으로 보면 회사에 대한 배임 행위가 되겠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과 한민당이 친일파 부호들의 돈 수천만 원을 정치에 쓰고 있던 상황에서 다른 정치노선의 거점 유지를 위한 비용 수십만 원을 조달할 필요가 얼마나 절실한 것이었는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범성의 자금 제공을 김규식이 응낙할 때도 나름대로 괜찮은 상대인지 따져봤을 것이다. 이 사기사건 외에 이범성이 신문기사에 나타난 것을 꼭 하나 찾을 수 있었다.

 

“이불 180점 이재민들에 기증”

 

방공호 속이나 다리 밑에서 거적을 의지하고 설한풍에 떨고 있는 전재민들의 처참한 정상에 큰 충동을 받은 시내 종로2가 조선노자기업사 이사장 이범성 씨는 24일 시내 장교동 전재동포원호회 중앙본부를 찾아와 전재동포에게 나누어달라고 침구 180점을 기부하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26일)

 

기부 규모로 보아 큰 부호는 아닌 것 같다. 중소기업을 열심히 경영하는 사람이 김규식의 정치노선을 지지하여 사업 이익의 일부를 희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치자금 제공에 사업의 목적을 두겠다고 나선 것이 아닐까싶다. 문제된 사기사건에서도 거둔 돈이 2천3백만 원인데 그 절반을 김규식에게 바치려 한 것을 봐도 그렇다. (실제로는 7백만 원의 수표 제공자가 수표를 취소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범성은 그밖에도 원세훈에게 20만 원 주고 조선민청 등 좌익 단체에도 몇 만 원씩 제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 도움을 주라는 김규식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좌우합작에 매진하고 있던 김규식은 좌익 단체에도 꼭 필요한 돈이 조금이라도 들어가기 바랐고, 합작 사업에 열심인 원세훈의 사정도 챙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송남헌 회고록>에는 원세훈의 지사(志士) 면모가 더러 나타난다. 원세훈은 김규식의 저택 삼청장에서 “아예 이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지내기도” 했던 사람이다.(89쪽) 그러면서 경성방직 같은 큰 회사의 운영을 맡으라는 제안을 거절한 사람이다.

 

헬믹 대장은 또 원세훈에게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으나 그 역시 이를 거절했다. 당시 경성방직의 소유자인 김연수는 만주국 총영사를 했던 경력이 두려워 정치권에 손을 대려고 매일 나용균의 집 사랑에 기거하며 숙식을 하고 있었다. 일제시대부터 서로 잘 알고 있었고 해방 후에도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처지인 데다가, 통일정부 수립에 헌신해야 하는 몸으로 사업체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격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원세훈은 거절한 것이었다. (95-96쪽)

 

5월 11일자 일기에서 장택상이 원세훈의 딸 입원비 내준 일을 얘기했다. 1948년 4월 원세훈이 딸 입원비가 없어서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를 송남헌에게 들은 장택상이 즉석에서 총무과장을 불러 5만 원을 꺼내 오게 한 것이다. 그 돈이 개인 돈이었을 리 없다. 장택상 같은 자는 원래도 부자인 데다가 그 정도 공금은 생각나는 대로 꺼내 쓸 수 있었는데, 재물을 초개같이 여기던 일세의 지사 원세훈은 이범성에게 20만 원 받아먹었다고 소인배들의 입방아에 오르다니, 블랙코미디의 시대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