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위 재개를 앞두고 오스트리아 상황을 한 번 살펴본다. 연합국 공동점령으로서 조선과 많은 공통점을 가진 경우였다.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독일에 ‘합방’되었다가 종전으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조선과 비슷한 경우다. 그러나 그 합방과 해방의 의미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합방의 차이부터 살펴본다. 오스트리아 합방은 전쟁 직전인 1938년에 나치즘의 흐름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이 점에서는 이미 수십 년간 일본제국의 일부가 되어 있던 조선에 비해 독립성을 쉽게 인정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합방을 전쟁 과정의 일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오스트리아가 언어와 문화를 독일과 공유하는 수준을 보면 독일의 일부로 볼 수도 있는 나라다. 역사적으로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독일 지역을 수백 년간 지배해 왔고, 두 나라의 구분이 명확해진 것은 19세기 후반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독일제국이 세워지면서부터였다. 나치즘의 괴수 아돌프 히틀러도 오스트리아 출생이었다.

 

무엇보다 오스트리아를 전범국 독일에서 떼어내기 어려운 문제는 합방이 오스트리아 인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에 있다.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상태에서 이뤄진 국민투표라 하지만 물경 99.73퍼센트가 합방을 지지했다. 독일군 진주가 1938년 3월 12일, 국민투표가 4월 10일이었으니 점령상태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의 국민투표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미 합방 지지 여론이 거셌기 때문에 3월 13일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독일군이 진주한 것은 오스트리아인이 원치 않는 합방을 강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합방 과정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서였다.

 

독일에 합치고 싶은 오스트리아인의 염원은 그 시기의 대세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무너졌을 때 제국의 독일어 사용지역, 즉 지금의 오스트리아 주민들은 독일연방 가입을 원했다. 티롤과 잘츠부르크의 주민투표에서 98~99퍼센트가 독일로 들어가기 바라는 뜻을 표했다. 그러나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변 나라들이 ‘큰 독일’을 꺼렸기 때문에 더 이상의 주민투표를 중지하고 오스트리아공화국으로 독립시킨 것이었다.

 

이 합방 장면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영화가 우리나라 관객에게도 큰 인상을 남겼다. <사운드 오브 뮤직>. 물론 합방에 반대하는 귀족층의 입장을 연합국 관점에서 미화한 것인데, 그런 반대자의 비율이 0.27퍼센트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이번에 살펴보며 알게 되었다.

 

전쟁 진행 중에도 오스트리아인은 독일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유태인 박해에도 동참했고 전투 현장과 산업 현장에서 독일인과 똑같은 역할을 맡았다. 오스트리아인의 나치 지배에 대한 저항과 전쟁 확대에 대한 반대는 독일인과 별 차이 없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제국을 탈퇴한 것은 독일 항복(1945년 5월 7일)의 불과 열흘 전, 연합군이 오스트리아 땅에 들어온 뒤의 일이었다. 3월 말에 미군과 소련군이 오스트리아 진주를 시작해서 4월 13일에 비엔나를 점령했다. 원로 정치인 카를 레너(1870-1950)을 중심으로 세워진 임시정부가 독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것은 4월 27일의 일이었다.

 

1943년 11-12월의 카이로회담과 테헤란회담에 앞서 연합국 외상들이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가졌는데, 이 회담에서 ‘모스크바선언’이 나왔다. 10월 30일 발표된 이 선언 중에 “오스트리아에 관한 선언”이 들어 있다. (<Wikipedia> "Moscow Declaration", 필자 번역)

 

“영국, 소련과 미국 정부는 히틀러 야욕의 첫 희생자인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것에 합의한다. 3국 정부는 1938년 3월 15일 독일이 강행한 오스트리아 합방을 무효로 간주한다. 그 날자 이후 오스트리아에 일어난 변화를 3국 정부는 무시한다.

 

3국 정부는 자유롭고 독립된 오스트리아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선언한다. 오스트리아인 자신, 그리고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주변 나라들은 이 부활을 통해 항구적 평화의 유일한 조건인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독일과 같은 편에서 전쟁을 수행한 데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최종 결정에서 자신의 해방을 위한 오스트리아 스스로의 노력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몇 주일 후 카이로에서 조선 독립 방침을 선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시점에서 연합국은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추축국 진영의 붕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매달린 것이었다. 끝 문단에서 “오스트리아 스스로의 노력”을 요구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독일제국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에서의 분리 선언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1919년의 조선인의 독립 선언과 그 이후의 항일투쟁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인정되고 레너 임시정부가 승인받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분단과 전쟁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독일 항복 이전 오스트리아인의 독립 노력이 일본 항복 이전 조선인의 독립 노력보다 큰 것이라고 나는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독일 항복 후 오스트리아인의 노력이 일본 항복 후 조선인의 노력보다 더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레너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승인을 얻는 데는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 소련은 즉각 승인했는데, 이것이 서방국들의 의심을 샀다. 레너 자신은 전쟁 전 온건 좌익이라 할 수 있는 사회민주당(SPO) 소속이었고, 임시정부는 보수적인 오스트리아국민당(OVP)과 공산당(KPO)이 모두 참여한 연립정부였다. 반 년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세밀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임시정부가 연립의 틀을 잘 지키면서 정부 역할을 잘 수행했기 때문에 미국, 영국과 프랑스도 의심을 거두고 10월 20일 승인에 이른 것이리라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오스트리아, 즉 제1공화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된 나라가 못 되었다. 좌익의 SPO와 우익의 기독사회당(OVP의 전신) 사이의 대립이 치열했다. 1927년의 ‘7월 봉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 지방도시에서 좌우익 군중의 충돌로 두 사람이 죽었는데, 우익 혐의자들의 혐의가 확인되었는데도 배심원 평결로 무죄석방되었다. 이에 분노한 좌익 군중이 거리로 나섰다가 89명이 목숨을 잃었다.

 

1932년의 기독사회당 집권 후로는 파시스트 독재로 흘러갔다. 1933년 3월 의회 폐쇄로 오스트리아의 파시스트 시대가 열린 경위는 엉뚱하다 못해 우습기까지 하다. 첨예한 법안의 표결 때 의장단 3인이 투표에 참가하기 위해 의장석을 떠났는데, 행정부에서 이것을 빌미로 의회가 마비상태에 들어갔다고 주장한 것이다.

 

1934년의 ‘2월 봉기’는 ‘오스트리아 내전(Österreichischer Bürgerkrieg)’이라고까지 불리는 심각한 사태였다. SPO 탄압을 계기로 촉발되어 2월 12일에서 16일까지 나흘간 벌어진 이 충돌로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투옥되었다. 한국전쟁에 비하면 ‘내전’이 좀 과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정상적 민주정치가 파탄에 이른 상황을 보여주는 사태다. 그 몇 달 후의 헌법 개정 이후로는 완전한 파시스트 독재정치가 1938년 합방 때까지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오스트리아가 가진 정치적 전통은 이처럼 빈약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레너 연립정부는 ‘좌우합작’에 성공해서 연합국의 승인을 받았다. 1955년 5월 완전 독립을 이룰 때까지 10년의 ‘신탁통치’ 기간 동안 OVP와 SPO의 합작관계는 굳건하게 지켜졌다. 그 관계가 너무 굳건했던 탓일까? 양대 정당의 연정은 완전 독립 후에도 10년 이상 계속되었다.

 

오스트리아 얘기 나온 김에 발트하임 얘기 잠깐. 1972년에서 1981년까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쿠르트 발트하임(1918-2007)이 1986년 대통령선거에 나섰을 때 제2차 세계대전 중 그의 경력 문제가 불거졌다. 그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군 장교로 복무했다.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미국과 소련의 정보당국이 발트하임의 감춰진 경력을 알고 있어서 그를 통제하는 데 이용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스라엘의 대 아랍 정책에 대한 발트하임의 비판 때문에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에서 꾸며낸 일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무성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는 역사학자의 국제위원회를 만들어 조사를 맡겨야 했다.

 

이 위원회의 조사 결과로는 발트하임이 손수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선거 전에 발간한 자서전 <태풍의 눈 안에서>에서 축소하거나 은폐한 내용이 더러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전쟁이 끝난 40년 후까지 대통령 후보자가 경력을 감춰야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의 과거 청산에도 허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