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하오 7시30분경 시내 혜화동 로타리 부근 보성중학 입구에서 근로인민당 당수 여운형이 자동차로 보성중학교를 향하여 질주 중 마침 동 지점에 이르렀을 즈음 돌연 괴한이 자동차 후부로부터 권총을 발사하였는데 동 자동차에 동승하였던 이제황이 범인을 추격하여 동회 부근까지 갔을 즈음 또 괴한은 권총 두 발을 발사하고 도망하였는데 피해는 없었고 범인은 방금 소관 동대문서에 엄사 중이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14일)

 

여운형이 해방 후 겪은 테러를 12회로 정병준은 헤아렸는데 (<몽양 여운형 평전> 416쪽) 그에 따르면 1947년 5월 12일에 당한 것은 열한 번째였다. 그는 이로부터 두 달 남짓 후인 7월 19일에 열두 번째 테러로 목숨을 잃게 되는데, 5월 12일 테러는 마지막 테러와 방법뿐 아니라 장소까지 똑같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같은 범인들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18일의 몽둥이찜질에서 1946년 10월 7일의 납치까지 9회의 테러는 목숨을 노리기보다는 위협에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테러 주체도 우익보다 좌익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1947년 들어 3월 17일 밤의 자택 폭탄테러부터 5월12일, 7월 19일의 권총테러는 목숨을 노린 것이고 극우파 소행이었다.

 

이 무렵 김규식은 이범성 사건 연루설로 조직적 음해를 당하고 있었다. 좌우합작의 두 대표가 이 시점에서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임박한 미소공위 재개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1년 만에 재개되는 미소공위에 대해 미군정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마셜 국무장관으로부터 미소공위 재개 지시를 받은 하지 사령관은 5월 15일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

 

“본관은 미국정부로부터 지시를 받아 5월 20일경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고자 필요한 제반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표함을 흔쾌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통일된 민주주의적 자주조선의 건설은 미국의 불변한 정책이었으며 이 목적 달성을 위하여 본관은 1945년 9월 8일 이래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왔던 것이다. 지금 통일된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할 호기회를 앞에 둔 이때에 있어서 본관은 조선의 자유를 갈망하는 조선국민과 더불어 기쁨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본관은 불원간 재개될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하여 조선국민이 공동위원회에 전폭적 협력을 절실히 바라는 동시에 모든 사소한 고집과 개인적 논란을 배제하고 장기간 빈곤과 고난에 시달려 온 아세아에 있어서 확호부동한 일 봉화가 될 번영한 통일조선 건설에 전심 매진하기를 희구하는 바이다.

역사적 중대한 이 시기에 처한 모든 조선인은 인류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부여된 사명을 달성하는 국민이 되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5월 16일)

 

미국과 미군정의 이러한 태도는 재개를 앞둔 시점에서 미소공위의 성공 전망을 열어주고 있었다. 미소공위가 성공할 경우 큰 역할이 기대되는 것이 여운형, 김규식 등 합작파였고, 좌절을 겪을 것이 이승만, 김구, 한민당 등 반탁세력이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에 대한 공격이 합작파에 대한 극우 반탁세력의 공격으로 이해될 수 있는 정황이었다.

 

5월 15일 하지 담화문을 기점으로 미소공위 재개에 대한 조선 정계의 논평이 줄 지어 나왔다. 좌익과 중간파의 환영 무드는 당연한 것이었고, 반탁세력의 논평들을 살펴보겠다.

 

◊ 한독당 엄우룡 담: “우리는 공위를 적극적으로 추진함은 물론이요 냉정한 이지로서 사태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소 양국은 조선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모든 문제해결의 요결인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남북을 통일한 임정을 수립하여 완전 자주독립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살게 될 것이니 이번 공위는 기어코 성공하여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바이다.”

 

◊ 국민의회 조소앙 담: “한국의 이익과 번영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에서 미소 양국이 일치하여 공위가 재개되기를 희망하는 바이며 우선 독립을 시키고 원조하는 정신 하에서 한·미·소 3방의 원만한 타협도 기대될 것이다.”

 

◊ 반탁투쟁위원회 담: “공위재개가 확정된 것은 오랫동안 암초에 걸렸던 현안을 타개한 감이 있으나 우리의 신탁통치 반대에 관한 정당한 비판과 항쟁은 금후에도 억제치 못할 바이며 목적이 도달할 때까지 계속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 한민당 김준연 담: “3월 12일 트 대통령의 연설에 의하여 미국의 대외정책을 알 수 있고 또 마샬 장군이 제안한 제2호에 있어 언론의 자유를 인정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미 측에서는 조선의 민주정부수립에 있어서 언론의 자유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반탁은 시종 양보할 수 없으며 의사표시의 자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5월 16일)

 

◊ 한민당 함상훈 선전부장 담: “이번 공위 재개는 미소양국의 합의로 성립된 것이다. 정부 수립 문제를 토의한 후 신탁에 대한 협의가 시작될 것이니 우리는 이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동씨는 기자 측으로부터 공위에 관한 제5호성명 서명취소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마샬 국무장관이 조선임정수립에 있어 공위와 협조할 의사를 가진 단체는 협의에서 제외하지 말자는 서한 제2절을 신임하는 만큼 문제가 안 된다”고 말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5월 17일)

 

엄우룡은 한독당 선전부장이지만 국민당계로 중간파 성향이었다. 미소공위 재개를 전폭적으로 환영하는 그의 논평은 한독당 전체 의견보다 그 자신의 중간파 성향을 보여준 것이다. 몇 주일 후 그를 비롯한 많은 중간파 당원들이 미소공위에 임하는 태도 때문에 한독당으로부터 출당당하게 된다. 5월 19일 한독당 부서재편에서 그가 탈락한 것도 (<동아일보>, <서울신문> 1947년 5월 21일) 같은 이유로 보인다.

 

그에 비해 임정파 조소앙의 논평은 환영의 강도가 덜하기는 하지만 가시가 들어있지는 않다. 반면 반탁투위와 한민당 쪽 논평에는 “정당한 비판과 항쟁”이니 “의사표시의 자유”니 하여 반탁투쟁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보인다. 군정청 공보부 고문 스튜어트가 5월 16일 기자회견에서 언론의 자유를 강조한 것은 이런 반탁세력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공위재개를 앞두고 미 측에서는 준비에 분망하고 있다. 20일 공위재개는 좋다고 생각되며 소 측 대표도 그 전에 몇 사람 내경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어디서든지 그러하지만 조선에서도 조선인 각자의 의사를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게 보장할 것을 재강조한다.”

 

스튜어트 고문에 그치지 않았다. 브라운 수석대표가 18일에, 하지 사령관이 19일에 우익 인사들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는 등 미군정 수뇌부는 미소공위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공을 들였다.

 

미소공위 재개에 대한 마샬·몰로토프 양상 간의 교환서한의 내용은 반탁의 의사발표 자유를 확인한다는 제시가 없음에 비추어 반탁자로서의 우익진영의 공위참가 여부는 의문시되고 있다. 즉 이미 좌익과 중간당에서는 공위 재개를 축하하여 혹은 공위 성공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시민대회 민중대회 등을 준비 중에 있으나 한민 한독 독촉 등을 중추로 한 우익진영에서는 아직 이에 대한 여하한 태도표명도 피하고 있다.

한편 18일에는 공위 미 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의 요청에 의하여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정계요인 김구 조소앙 조완구 김성수 백남훈 장덕수 서상일 등 제씨가 상오9시반부터 약2시간 덕수궁에서 동 소장과 공위참가 문제에 대하여 의견교환이 있었다 하는데 동 회담에서 브라운 소장은 신탁문제는 임정수립 후에 논의될 터이니 우선 임정수립에 참가하라 하고 이후에 공위에서 수립된 임정이 신탁을 반대할 수 있느냐는 우익대표의 질문에 끝까지 의사표시 자유는 인정하겠다는 막연한 대답만을 하였다 하며 특히 이 박사는 신탁조항을 삭제하고 의사표시 자유를 인정해야만 공위에 참가하겠다고 말하였다 한다.

그리고 19일 하오1시부터는 하지 중장의 초청을 받아 이승만 김구 김성수 장덕수 조소앙 등 제씨가 동 중장과 역시 이 문제로 요담하였다고 하며 하지중장과의 회담 결과 여하에 의하여 우익진영은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공위참가에 대한 최후태도를 결정하리라 한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5월 20일)

 

브라운과 하지를 만난 후 이승만은 이런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미소공위재개를 앞두고 이승만 김구 조소앙 김성수 등 우익정계 제씨가 브라운소장 하지중장과 요담한 데 대하여 이승만은 20일 돈암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지 중장과 브라운 소장은 금번 재개될 공위에서는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선결문제이고 탁치니 원조니 하는 것은 임정수립 후에 임정과 협의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나는 삼상결정에서 신탁조항을 삭제하고 의사표시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되 여하한 형태의 민주주의임정인지 명시하기 전에는 공위에 참가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즉 민주주의에도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가 있을 것이며 이를 반반으로 한 통일임정은 수립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과거 1년 반이 지난 오늘 과거를 잘 알고 있으므로 무조건으로 신임할 수는 없다. 가설 임정수립에 성공하여도 최고의 희망은 반반씩이 될 터이니 그런 정부는 성립될 수 없으며 이때에는 남조선 공산화를 방지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5월 21일)

 

극우세력은 미소공위에 큰 기대를 걸지 않거나(김구-한민당) 실패를 바라는(이승만) 속셈이었지만 그 속셈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위가 조선 독립을 위한 연합국의 공식 합의였으니까. 그래서 지지하는 시늉을 하면서 “언론의 자유” 등 꼬투리를 잡으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를 넘어 “소련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영수’ 맞기는 맞다.

 

이 시점에서 이승만의 태도는 그의 말보다 그의 행동을 통해 더 잘 알아볼 수 있다. 이철승이 박갑동과 대담하던 중 회고한 내용에서 이승만의 태도가 비쳐 보인다.

 

이철승: (...) 이 박사가 돈암장으로 나를 불러서 “우리는 자율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단독정부가 아니다”면서 “이제 미-소만 믿고 있다가 어떻게 할 것이냐. 신탁통치를 하자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 민족의 의사로서 세계 여론에 호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 박사는 항상 데모하는 것, 여론을 일으키는 것, 국회 정치를 하는 것에 익숙해 있던 양반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보고 “여론을 환기하라”는 겁니다. (...)

그때 중부경찰서 서장이 이구범 씨였어요. 장택상 씨 밑에서 최연-노덕술-이구범 등 친일경찰 출신들이 전부 진을 치고 있었잖아요. 이구범이 나를 끌어내리더니만 가자는 거예요. “너만 애국하느냐”고. 그래서 “당신은 좀 가만있어라” 하고 그때 내가 노골적으로 얘기했습니다.

“너희들이 일제시대 때 어떻게 했는데, 우리한테 이럴 수 있느냐. 지금 우리가 모처럼만에 나라를 찾아 가지고 자율정부를 세우려 이승만 박사 같은 독립운동 지도자를 모시고 활동하고 있는데, 너희가 미군정 밑에서 못 이기는 척하고 빌어먹으면 됐지, 왜 방해를 하느냐...?”고 말입니다.

 

박갑동: 어, 그런 소리를 했어요?

 

이철승: 물론이죠. 그때는 내가 무서울 것이 뭐 있겠어요. 이 박사의 지령이었는데... 그래서 막 싸우는 중에 강력계인 박경림 등이 나를 묶어서 수도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수도청에 가니까 장택상 씨가 수도청장이었고, 옆에는 감방장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노덕술이 감방장을 하고 있으면서 수사과장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덕술의 방에 갔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수도청장실을 학생 신분으로 자유롭게 출입한 사람은 나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나를 잡아넣을 수는 없으니까, 노덕술의 방으로 데려갔던 겁니다.

노덕술이 나한테 다그치며 “그래 많은 대중들 앞에서 경찰을 그렇게까지 모독할 수 있느냐. 너만 애국운동을 하느냐”고 하면서 귀싸대기를 갈기려고 그래요. 나보다 나이를 많이 먹었지만, 그래도 “이 놈아, 일본놈 때 그렇게 해먹었으면 그만이지, 너희가 미군정 하지 밑에서까지 얼마나 해먹으려고 그러느냐. 우리가 지금 자율정부를 수립한다는데 너희가 왜 방해하느냐”고 하면서 전화통으로 노덕술을 그냥 때려 버렸습니다.

노덕술은 경찰에서 서열 세 번째였고, 그 옆에 최연 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방은장택상 씨의 방이었어요. 그래 놓으니까 어떻게 해요. 창랑이 쫓아 나오다 이것을 보더니 “이놈의 새끼, 나를 또 애먹인다”고(웃음)...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계명사 펴냄) 234-236쪽)

 

이철승의 자랑스러운 회고에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이철승 같은 청년활동가들과 친일파 출신 경찰 사이에 누가 더 ‘애국’하느냐 경쟁이 있었다는 사실. 이승만의 지령이라면 경찰에서 꿀릴 데가 없었다는 사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런 사실을 이철승이 50년 후까지도 자랑스럽게 회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