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월 17일 입법의원에 상정된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 초안”이 해방 후 친일파의 처벌대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적시한 문서라고 서중석은 평했다. (<배반당한 한국민족주의>(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펴냄) 122-124쪽) 구체적일 뿐 아니라 매우 엄격한 법안이었고, 우익 측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친일파 처벌의 명분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은근한 저항방법이 사용되었다. 이 법안 심의 중의 입법의원 광경을 한 장면 소개한다.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등에 관한 부칙조례 수정안에 대한 제1독회 대체토론은 지난 제62차 본회의로 끝맺고 1일 제63차 본회의에 이르러 제2독회 축조토의에 들어가느냐 또는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재수정케 한 후 다시 토의하느냐의 문제를 위요하고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각 의원의 발언 요지는 여좌하다.

 

서우석(한민): 본안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은 극히 중대하므로 본 수정안을 재수정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재수정안을 작성하여 1주일내에 본회의에 제출할 것을 동의한다.

 

정이형(합위): 이 동의는 선의로 해석한다면 좀 더 완전한 법안의 입안을 지도한 것이라 하겠으나 악의로 해석한다면 본 법안의 통과를 지연시켜 유야무야하게 만들려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 본 동의는 접수치 않아야 한다.

 

장자일(민동): 본 동의는 법제사법위원회에 대한 불신안인 동시 원법에 저촉되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법안의 수정 급 재수정을 위하여 법제사법위원회가 이미 원법에 의해서 설치되어 있지 않은가? 또한 원법에 의하면 본 법안만을 수정키 위한 특별위원회의 조직에 관한 규정은 존재치 않는다.

 

서상일(한민): 임시약헌 수정안도 재수정코자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목하 수정 중에 있지 않은가? 원법 저촉 운운은 당치 않은 말이다.

 

원세훈(민동): 본 법안의 통과는 일순도 천연할 수 없는 것이다. 기 이유로는 친일파의 괴수 한상룡이 벌써 일본으로 달아난 예를 보라.

 

김호(신진): 본 법안은 제2독회 토의로 넘기되 이다음 월요일부터 토의할 것을 개의한다.

 

이상과 같은 설전이 있은 후 동의와 개의를 표결한 결과 양자 공히 법정수에 달치 못한 고로 모두 부결된 다음 “본 법안 재수정위원 5명을 선출하여 재수정케 하여 래 월요일 본회의에 재수정안을 제출하자”는 신익희 의원의 동의와 “특별법 기초위원회로부터 5명의 축소위원을 수정위원으로 하여 본 법안을 재수정케 하여 래 월요일 본회의에 제출케 하자”는 장자일 의원의 개의를 표결에 부치어 드디어 동의가 채택되고 백남채 의원이 동의한 “5연명식 무기명 투표방식”이 채택되어 투표한 결과 서우석 장면 김익동 김영규 송종옥 등 5 의원이 본 법안 재수정위원에 당선되었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3일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7년 3월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해방 때까지 복역한 정이형(1897-1956)은 일제 옥고를 가장 오래 치른 조선인의 하나였다. 좌우합작위 추천으로 입법의원에 들어간 그는 개원 직후 “친일파-민족반역자-간상배 조사위원회” 설치를 제안했고, 1월에 친일파 처벌에 관한 특별법 기초위원회를 만들 때 위원장을 맡았다.

 

정이형이 이끈 기초위원회는(정이형 김용모 최종섭 윤기섭 고창일 허간룡 허규 하상훈 박건웅) 민족주의 성향이 뚜렷했기 때문에 강경한 내용의 법안을 만들었다. 이에 대한 저항이 한민당을 주축으로 일어난 사실은 위에 소개한 5월 1일 토론 장면에서 알아볼 수 있다. 반대자들은 결국 기초위원회와 별도의 ‘재수정위원회’를 만들었고, 결국 대폭 완화된 내용의 법안이 7월에 입법의원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나마 미군정 당국자들의 인준 거부로 인해 사장되고 만다.

 

‘친일파’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한국사회에 꺼지지 않은 불씨로 남아있다. 이 문제가 해방 당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 한 차례 생각을 정리해 본다.

 

‘친일’이 단순히 일본에 우호적이거나 일본문화에 호의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뜻에 그치지 않고 ‘반(反)민족’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역사의 굴곡 때문이다. 청일전쟁(1894-95) 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조선의 개화를 위한 중요한 모델이었고, 일본을 가까이하거나 중시하는 태도가 바로 민족을 등지는 것이 아니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가 분명해진 뒤부터 ‘친일=반민족’의 등식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1910년 이후 조선인은 일본을 국가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했다. 내심으로는 불복하더라도 겉으로는 일본 지배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던 세월이 35년 지나고 나서 어느 날 ‘해방’이 왔다. 해방과 함께 ‘독립’, 즉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가 주어졌다.

 

독립도 어떤 의미에서는 연합국에게 ‘강요’당한 것이었다. 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전쟁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기 위한 조건이었으니까. 청일전쟁 때 일본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한 것처럼 이번에는 미국과 소련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면이었다. 50년 전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야욕을 가졌던 것처럼 미국과 소련도 조선에 욕심을 갖고 있었다.

 

다만 50년 전의 일본에 비하면 미국과 소련의 욕심이 덜 분명했고, 서로 견제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조선인에게 진정한 독립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모스크바외상회담의 4개국 신탁통치 결정이 미-소간 상호견제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미-소 두 나라의 힘을 견제할 제3국이 없는 상황에서 해방된 조선에게 주어진 길은 논리적으로 네 가지였다.

 

(1) 두 나라의 영향을 고르게 받는 통일국가.

(2) 통째로 미국 영향을 받는 통일국가.

(3) 통째로 소련 영향을 받는 통일국가.

(4) 각각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받는 분단국가.

 

민족주의자의 최소한의 선택은 (4)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와 (3)은 두 강대국의 힘과 욕심을 전제로 할 때 현실성이 없거나 매우 험한 길이었다. 따라서 합리적 선택은 (1)일 수밖에 없었고,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가 현실적 방안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1)의 길에 저항한 세력 중에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꿈꾼 공산주의자도 있었다. (겉으로는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실현이 어렵게 되도록 획책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확고한 저항세력은 ‘친일파’였다. 진정한 민족국가가 이뤄질 경우 과거 행적으로 처벌받거나 특권을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한 집단이었다.

 

친일파 처리문제는 민족국가 건설에서 상징적 의미와 현실적 의미를 함께 가진 문제였다. 식민지시대와의 단절을 위해 구시대의 책임자를 처벌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고, 부와 지식 등 실력을 갖춘 집단을 새 국가체제 속에 어떻게 편입시키느냐 하는 현실적 의미가 있었다.

 

중도파 지도자들은 극소수 악질분자를 처벌하고 대다수 친일파는 기득권 일부를 포기하는 선에서 민족국가에 참여시키는 길을 생각했다. 처벌 범위를 극대화하고 모든 기득권을 해소시키려는 좌익의 주장에 비해 적응 가능성이 있는 길이기 때문에 친일파로 몰릴 수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 길에 호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식민지시대의 청산과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대의가 이 경향을 뒷받침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미군이 점령한 이남 지역에서는 친일파에게 다른 선택의 문이 열렸다. 식민지시대보다도 더 강화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친미파’의 길이었다.

 

소련은 조선 일부를 점령하면서 조선 민심이 자기네에게 유리한 쪽으로 움직이리라는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미국에게는 그런 기대감이 전연 없었다. 그래서 민심의 호응 없이 힘만으로(돈의 힘 포함) 조선사회를 장악하려 했다. 힘으로 조선을 지배한 일본의 식민지체제를 복원하는 데 목표를 두었고, 따라서 식민지체제의 협력집단이던 친일파를 친미파로 전환시켜 재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친일파의 재활용은 미군정과 친일파 양측에 윈-윈 전략이었다. 구 친일파는 미군정에게 협력하면서 일본에 협력할 때보다 더 큰 특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식민지시대에는 수십만 일본인이 조선에 건너와 지배계층의 자리를 차지했는데, 그 자리가 몽땅 자기네 자리가 되었다. 모든 기관에서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던 과장급 이상의 자리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해방 후 1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 이 재활용 작업은 고비를 넘어서 있었다. 식민지경찰은 완벽하게 부활했고, 식민지시대에 재력으로든 학력으로든 주먹으로든 행세하던 사람들이 더욱 행세하게 되었다. 박흥식처럼 상징성을 가진 특급 친일파만이 희생양이 될 듯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런 사람들까지도 거리낌이 없게 되었다.

 

일본 지배에 협력하던 시절을 반성하며 특권을 일부 포기하면서라도 민족국가 건설에 백의종군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양심적 친일파’도 ‘친일파 재활용’의 도도한 물결 앞에서 자세를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친일파를 처벌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친미파로 재활용하면서 식민지시대보다도 더 큰 특권을 키워준 것이 문제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