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2월 31일에 관재령(管財令) 제 8호 “각종 귀속사업체에 관한 건”이 군정청 재산관리관 비숍 중령의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제 귀속사업체의 운영을 위한 이용, 보관, 재무에 관한 조선군정청 소속 각 행정관 각 기관 및 其 대행기관의 책임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하는 이 법령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내용은 제1조 제2항이다.
군정청 재산관리관은 현재 其 관할 하에 있는 귀속된 각종 기업체, 사회, 조합 기타 사업단체 일체(공업, 광업, 상업, 청부업, 주업, 은행업, 농업, 임업, 금융업, 사립학교, 보험업, 운수업, 선박업)의 관리감독권(其 운영권과 其 관리자 내지 최고책임자의 임명권을 포함함)을 관재처 관재수속요령에 규정한 수속에 의하여 군정청 각 부처 및 其 대행기관의 소관 고문관에게 此를 이관함. (<1948년도 조선경제연보> 1946년 12월 31일 조)
흔히 ‘적산(敵産)’이라 부르던 귀속재산, 즉 미군정이 접수한 총독부와 일본인의 재산을 군정청 관재처에서 관리해 왔는데, 그중 회사와 공장 등 사업체의 관리를 각 관련 부처에 넘기기로 방침을 정한 것이다. 공포 후 한 달 동안 별 논란이 없다가 2월 들어서면서 여론이 물 끓듯 일어나기 시작했다. 위 조항에 나타난 대로 조선인 부처장이 아니라 미국인 고문관에게 맡긴다는 사실이 실행 단계에 접어들자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러치 군정장관이 2월 6일 이를 해명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효과적 운영 위해 미 고문에 권한을 이양 - 러 장관 담”
포레 대사가 내조(來朝)하였을 때 조선의 적산은 장래 조선재산으로 한다는 언명을 하였다. 미국의 의도는 이러하나 아직 이의 확정적인 결정이 못되고 있다. 따라서 법령 33호에 의하여 일인재산은 관재처에서 관리하기로 되었으나 실제로 생산적이며 개선적 입장에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관재처에서 하였었으나 좀 효과적으로 경영하기 위하여 일인의 재산이 최후 결정이 안 되었으므로 미인이 관리하도록 관재령 8호에 의하여 미 고문에게 권한을 이관한 것이다. 소규모의 농토나 작은 관사기관(官事機關)은 여하히 처리할까 하는 건의를 입의와 부·처장에게 요청한 바도 있다. 요약한다면 적산의 효과적인 운영을 하기 위하여 관재령 8호를 내놓은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7일자)
관재령 제8호의 목적이 귀속재산의 운영을 관련 부처에 맡겨 효과적 운영을 기한다는 데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관련 부처에 맡긴다면서 왜 조선인 부처장이 아니라 미국인 고문관에게 맡기겠다고 하느냐 하는 데 있었다.
적산 처리 방침이 확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미국인에게 관리를 맡긴다는 러치의 해명은 억지다. 에드윈 폴리 미국 배상대사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한 일본 배상문제 보고서를 1946년 11월 17일 미 국무부가 공개했는데, 그가 건의한 배상방법 8개항 중 제5항이 적산에 관련된 것이었다.
5. 전 일본 지배하에 있었던 제국 내의 일본공업 자산을 이동하지 않을 것. 이러한 자산은 소재국에 남겨두고 그의 가격을 이들 국가의 배상요구에 가산할 것. 미국은 이전에 피정복영토를 착취하기 위하여 사용된 일본 내의 여하한 공장과 시설을 이들 영토에게 유리하게 이전할 수 있는가를 결정할 것이다. (1946년 11월 18일자 일기)
각국의 배상 요구는 원칙적으로 각국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율의 필요가 있었고, 주도적 연합국 미-영-소의 협의를 통해 조율이 일차적으로 이뤄졌다. 그중에서도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이 일본 배상의 기본 방향을 제안했고, 그 역할을 맡은 것이 폴리였다. 그의 보고서를 국무부에서 공개했다는 것은 미국의 방침이 실질적으로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1946년 7월 15일자 일기에서 전쟁배상에 관해 설명했다.)
조선에 있던 일본 재산을 다른 나라의 배상을 위해 반출할 가능성이 떠돈 일이 있고 심지어 조신이 일본과 함께 패전국 입장에서 배상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돈 일이 있었다. 폴리 대사는 그런 가능성이 없다고 몇 차례 확인해주었다. 적산 관리를 조선인 손에 맡기지 않겠다는 방침은 반출 가능성 때문일 수 없었다. 그냥 미국인 손에 쥐고 있겠다는 것이었다.
왜 미국인 손에 쥐고 있겠다는 방침을 세웠을까. 조선인 관리들의 부패 때문에? 조선인 관리들의 부패와 독직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었지만, 미군 관리자들의 부패와 독직은 더했다.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뉴스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똑같은 독직도 미군의 독직은 사람들의 이목을 많이 끌지 못했을 뿐이다. 일반 조선인 관리들에 비해 미군은 무책임 때문에 더 타락하기 쉬웠다.
‘호남선 강간사건’ 이야기를 적은 1947년 1월 9일자 일기에서 미군 범죄의 언론 보도가 극심한 탄압을 받은 증언을 소개했다. 그런 보도는 점령군에 대한 반감을 선동하는 것이라 하여 일반 형법 아닌 포고령 위반으로 잡아들이고 군사법정에서 엄형을 내렸다. 미군 범죄자의 조사와 처벌이 조선인들 손에 맡겨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미국인 고문관들은 현지 사정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전문성도 떨어졌다. 효과적 운영을 위해 각 부처에 맡긴다면 조선인 관리들에게 맡기고 미국인 고문관은 필요한 대로 감독과 조언을 해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미국인 손에 쥐고 있으려 한 것은 이익이 탐나서였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우익의 독촉과 좌익의 민전이 이례적으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 독촉 선전부 담: 동 법령은 하지중장이 누차 공약한 행정이양 정신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된다. 조선의 특수성에 감하여 광범한 적산을 제외한 행정권 이양이란 결국 허울 좋은 발골이양(拔骨移讓: 알맹이를 빼고 넘겨줌)에 불과하다. 바라건대 미군정은 조선인민을 우호국민으로 만들기 위하여 신의를 지킬 것이며 인민의 원부(怨府)가 될 동 법령을 즉시 철폐하고 명실공히 행정권을 조속히 조선인민에게 이양하라.
◊ 민전 사무국장 박문규 담: 관리권이 조선인 반동파에 이관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중요산업 국유화문제가 옳게 해결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중요산업 관리권이 군정고문관에게 장악되어 인민경제체제의 수립이 지연됨을 원치 않는다. 정권을 즉시 인민의 자치기관인 인민위원회에 넘겨 이 문제의 급속한 그리고 옳은 해결을 우리는 요구한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8일자)
좌익에서는 관리권을 조선인에게 맡긴다 해도 “반동파”가 장악할 것을 꺼리고 있었다. 군정청 관리들의 반민족 성향을 좌익에서는 내내 비난해 왔고, 실제로 그 성향으로 인해 좌익이 피해를 입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관리권을 미군이 계속 쥐고 있겠다는 데는 반대의 목소리를 함께 했다.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넘겨준다면서도 경제권은 넘겨주지 않겠다는 자가당착이 당시 미군정이 생색내며 내세우던 ‘Koreanization’의 속성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이 정책을 ‘조선화’로 번역했는데, 내가 이것을 ‘조선인화’라고 굳이 쓰는 것은 자기네 입맛에 맞는 조선인들을 적당히 배치했을 뿐, 진정한 조선화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재홍이 민정장관 자리에 앉을 때 이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안재홍은 민정장관, 상무국장, 입법의원 김호의 조선인 3인, 관재처장 고문, 농무부장 고문, 상무국장 고문의 미국인 3인으로 관재령 수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정안을 작성, 러치 군정장관에게 제출했다. 러치는 이 수정안에 입각해서 관재령 제8호를 개정한 관재령 제9호를 1947년 3월 31일 공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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