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천도교청우당(청우당)에서 눈길이 가는 성명을 자주 내놓는다. 2월 1일에는 이런 성명이 나왔다.
“미소공위가 재개될 가능은 이때에 있어서 국내 국외의 일부 완매한 분자들이 호응하여 우리 민족에게 유리한 정세를 악화시키려는 음모를 활발히 전개시킴과 함께 자주독립의 기초를 파괴하는 남조선단독정부 수립운동을 노골적으로 시작하여 정치교양 훈련이 부족한 민중으로 하여금 본의 아닌 추종 혹은 망동을 하게 할 염려가 불무하다. 우리는 진정한 애국자 민주주의자의 광범 또는 공고한 결속 하에 당당한 행동으로서 국제민주주의 협조노선에 의거한 남북통일정권의 수립을 촉진시키기를 다시 강조한다.” (<조선일보> 1947년 2월 1일자)
반탁운동을 빙자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다. 청우당에서는 1주일 전에도 입법의원 해소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1월 20일 입법의원의 반탁결의안 채택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청우당에서 24일 ‘탈선한 현 입법의원을 단연 해체하라’고 다음과 같이 성명하였다.
“우리 동포의 간절한 희망은 남북통일의 임시정부 수립과 민생문제 해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에 암매한 일부 애국자 급 허명에 급급한 완고한 분자와 불순분자들이 연합하여 가지고서 순진한 민중을 기만하여 입법의원을 한 개의 정치부로카들의 정쟁도구같이 악용하는 점은 진정한 애국자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바이다. 이에 우리는 민중과 함께 이 남북을 분리시키며 군정을 연장시키는 불순한 운동을 배격하는 동시에 그들이 입법의원을 통하여 임정 수립을 방해하며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속히 현 입법의원을 해산하고 진정한 애국자 본위의 새로운 의원 재조직을 주장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7년 1월 25일자)
청우당은 어떤 노선의 정당이었나. <자유신문> 1946년 12월 8일자 “입의 관선의원을 결정” 기사 중에는 청우당이 좌익단체의 하나로 분류되어 있다. 그러나 청우당의 실제 행적을 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분류다. 아마 민전에 참여했기 때문에 좌익으로 분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해방공간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았음에도 그 실체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는 단체의 하나가 청우당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천도교청우당이 “조선노동당의 외곽단체로서 기능하는 북한의 정당”으로 설명되어 있다. 1946년 2월 설립된 김달현 중심의 북조선청우당에는 어느 정도 맞는 설명일지 몰라도, 1945년 9월 결성된 남조선청우당에는 해당되지 않는 설명이다.
원래 ‘청우당(靑友黨)’이란 이름은 1919년 민족주의 경향의 청년 종교운동으로 시작한 것이다. 해방 후 ‘재건’된 청우당도 종교단체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는데 1946년을 지나는 동안 정당의 성격이 가미된 것이다. 북조선의 청우당은 소군정의 지원을 받아 체제 형성의 한 모퉁이를 맡았지만 남조선의 청우당은 민족 고유종교의 본색을 지키고 있었다.
청우당이 민족주의 정당으로서 반탁의 자세가 굳건했던 사실을 1946년 5월 5일자 <자유신문>의 한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위 대표권 문제 표면화 - 천도교청우당 진상을 성명”
제5호 공동코뮈니케를 중심으로 3상 결정을 반대하여 오던 제 정당 및 단체가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느냐 안 하느냐는 한참 세간의 주목을 끌었는데 급기야 참가하기로 되어 이미 선언서를 제출하였다 한다. 그런데 한 가지 해괴한 사실은 민주의원에서는 그 의원들에게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지명되었다 하여 그 소속단체의 승인도 받기 전에 서명 날인을 받아 제출하였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 실례로서는 오세창 씨에게 지명이 되었은즉 천도교를 대표하여 서명 날인하라고 하여 오 씨는 수 명의 천도교 간부와 상의하여 제출하였다는데 천도교에서는 온갖 정치적 행동은 청우당이 담당하여 있을 뿐 아니라 오세창 씨는 한낱 ‘장로’란 한직에 있는 이로서 도저히 천도교를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없다고 청우당에서는 그 대표권을 거부하여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이다.
극우세력까지도 미소공위 참가를 위해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5호 성명’에 서명하는 판에 천도교의 대표적 인물인 오세창의 대표권을 부인하다니, 청우당은 ‘초극우’세력인가? 아니다. 실리에 좌우되지 않고 민족주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1946년 9월 8개 정당이 합쳐 신진당을 만들 때 청우당은 재미한족연합회, 신한민족당, 신한민주당, 조선혁명당 등과 함께 참여했다. (<동아일보> 1946년 9월 12일자) 청우당은 민족주의에 치중할 뿐, 좌우 구분의 기준이 되는 사회체제에는 관심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진당으로의 통합에도 불구하고 청우당이 독자적 활동을 계속한 것은 어찌된 일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10월 중순 전국적 소요사태 속에서 각정당시국대책간담회(정당간담회)를 결성할 때 청우당은 신진당과 나란히 참여했다. 그 직전 청우당은 좌우합작 7원칙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자유신문>1946년 10월 12일자) 그리고 입법의원 설치에 대해서도 원칙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을 밝혔다.
“입법의원령과 청우당의 주장”
입법의원령에 대하여 천도교청우당 선전부에서는 15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하였다.
“1) 의원의 자격에서 제외될 범위를 규정한 것이 너무 불충분하여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는 물론 8-15 이후 악질 모리배의 진출을 방어할 방법을 취하여야 할 것. 2) 그 방법으로 각 정당 급 중요 사회단체의 대표자로서 조직한 의원후보자 자격심사기관을 두어 민선의원 후보자의 자격을 엄밀히 심사하며 관선의원 후보자의 추천을 하도록 할 것.” (<자유신문> 1946년 10월 16일자)
그러나 소요사태 속에서 선거를 강행하자 청우당은 정당간담회의 선거 중지 요구에 동참했다. 그리고 1947년 1월 4일자 <자유신문>의 “각 정당의 신년 경륜” 특집에 기고한 글에서는 입법의원의 자세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했다.
“남조선입법의원은 조선 전체의 임시민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8 이남 조선에 있어서 민생문제를 해결하며 또한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정당히 행동할 때에는 협조하여야 할 것이며 만일 이에 위반됨이 있어 세상에서 의심하며 비난하는 바와 같이 남조선 단독정부를 꾸민다든지 우리 민족의 명예를 손상시킨다든지 분열을 조장하며 혹은 근로대중의 이익을 무시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우리 당은 단연 투쟁할 것이며 그 흑막을 천하에 공포할 것이다.”
입법의원의 반탁결의안 채택은 이 의구심이 적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청우당이 입법의원의 해산과 재구성을 주장한 것이다. 청우당은 원래 민족주의 원칙에 입각한 반탁 노선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1947년 들어 극우세력이 미소공위 전복을 위해 반탁운동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특정한 사회경제체제에 집착하지 않고 민족주의 원칙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청우당의 노선을 ‘중도’라 할 수 있다. 미-소 점령군에 의지하지 않는 중도노선 정치세력은 자금과 조직의 부족 때문에 영세한 규모를 벗어나기 힘들었는데, 청우당은 천도교단의 발판 덕분에 자기 위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 그리고 남로당과 사로당의 대립으로 좌익의 역할이 침체한 상황에서 청우당은 단독정부를 추진하는 극우세력에 맞서는 두드러진 존재가 되었다.
신탁문제를 중심으로 최근 정계는 다시 좌우의 대립이 첨예화하려는 이때 천도교청우당에서는 3일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민주주의자의 거족적 협동전선을 결성하여야 할 것을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의견발표를 했다.
“민주주의에 의한 남북통일정부의 수립이 우리 민족의 최대의 급무임에 불구하고 우익진영에서는 소위 비국·민의·민통·독촉·반탁 등 통일체라는 단체가 수다히 난립되어 자체혼란을 거듭하고 있으며, 좌익진영에서는 삼당합동운동이 도리어 좌익 분열 알력작용을 야기시켜 기 주동체가 반발적으로 종파적으로 나아가게 되어 민전을 더욱 약화 정당화(政黨化)시켜 일반의 기대가 미약하게 되고 말았다.
이때에 있어서 좌우 진영에서는 과거의 과오를 과감히 청산하고 민족 자주정신에 돌아가야 할 것이다. 우익에서는 봉건적 매판적 성격을 청산하고 일보 전진하며 좌익에서는 공리적 돌진에서 민족혁명 본진에 환귀하여 자주독립 민주혁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좌우 양 진영에 가담치 아니하고 활약하는 집단까지 흔연 집결하여 우리 민족의 이 단계를 최대의 역사적 사명인 남북통일의 민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 새로운 결속을 위하여서는 모든 아집을 버려야 할 것이며 상대방의 과오를 용서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이러한 운동을 적극 전개하되 최후까지 아집 반동을 암매하게 속하는 소수분자는 공허한 간판과 함께 버려두고 애국적 진정한 민주주의자 동포는 새로운 결속을 단행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조선일보> 1947년 2월 4일자)
37개월의 기간을 바라보며 재작년 8월 시작한 <해방일기> 작업이 19개월째로 접어들었으니 반환점을 돌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이끌어준 독자들의 성원과 <프레시안>의 도움에 감사드린다.
또한 많은 자료를 새로 지원해준 경북대 이정우 교수에게도 감사드린다. 이 작업에 도움이 될 자료를 이 교수가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업 구상 때부터 알고 있던 것인데, 지금까지 대구를 방문할 여유가 없었다. 지난주에야 찾아가 40여 권의 책을 대출해 올 수 있었다.
이번에 확충한 자료 중에는 회고록 등 개인적 서술이 많다. 작업 전반부에서 거시적 관점을 세우는 데 주력한 것에 비해 후반부에서는 인물 묘사 등 미시적 현실감을 확보하는 데 노력을 들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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