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스는 1946년 말까지의 조선 상황을 다룬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제1권) 여러 대목에서 하지 사령관의 어리석음과 무능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런데 1947년 이후의 상황을 다룬 제2권 초입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경우 1947년에 이뤄진 결정들로 인해 지난 18개월 동안의 민족주의자들의 움직임이 정당화되고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존 R 하지 장군은 냉전의 설익은 싸움꾼이 아니라 혜안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다. 조선 남반부에서 정치적 대립이 극단화하고 탄압이 격렬해지면서 강력한 우익 정치가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36쪽)


이 대목을 처음 읽으면서 “혜안을 가진 사람(sage)”이란 말을 잠깐 착각했다. 차분히 다시 읽어보니 조선의 극우파를 키워주고 소련과의 대립을 지향해 온 하지의 편벽된 태도가 1947년 들어 구체화된 미국의 냉전 노선에 결과적으로 부합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처음에 얼핏, 이승만과 김구 같은 조선인 “싸움꾼”들과 대비시켜 하지의 침착한 태도를 평가한 것처럼 착각했던 것은 1947년 초 미소공위 재개를 앞두고 하지와 조선인 극우파 사이의 대립에 내가 너무 몰두해 있기 때문이었다.


연말에 하지가 치스챠코프에게 보낸 편지를 1월 11일 공개한 이후 벌어진 상황에서는 하지가 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반탁세력이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봄 제1차 미소공위에서 하지는 ‘표현의 자유’란 이름으로 일체의 반탁활동에 대한 규제를 거부했고 그것이 회담 결렬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12월 24일 보낸 편지에서는 반탁활동을 미소공위 협의대상의 결격사유로 인정했다. 미소공위가 3상회의 결정의 실행기구인 이상, 미소공위 참가자가 3상회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소련 측 주장은 지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존중’의 의미를 얼마나 엄격하게 보느냐에 차이가 있었다. 애초에 하지는 “3상회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미소공위 제5호 성명에 서약하고 회담장 안에서만 반탁운동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넓은 관점을 취했다. 그런데 이제, 회담장 밖에서라도 노골적 반탁활동을 하는 자는 미소공위에 참가할 수 없다는, 소련 측의 좁은 관점을 받아들인 것이다.


반탁세력은 하지의 태도 변화를 ‘배신’, ‘변절’로 매도하고 나섰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불합리한 비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3상회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원칙에는 아무 변동이 없었다. 그 내용의 일부에 대한 불만을 표현할 무제한한 자유를 반탁세력은 요구한 것인데, 하지는 이 자유가 적절한 단계에서 적절한 방법으로 보장될 것이라고 했다.


‘반탁’이 진정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그 표현에 대한 다소간의 절제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관계자들(연합국)과의 사이에 신뢰를 지키고 키우는 것이 합당한 방법이다. 그런데 소련 측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모든 면에서 의지해 온 미국 측까지 비난하고 나온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것도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상의 문제 하나를 갖고. 반탁세력의 이런 극단적 태도에서 그들의 목적이 ‘반탁’ 그 자체를 넘어선다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중 조선 관계 내용을 다시 살펴본다.


조선에 주재한 미소 양국군사령관은 2주간 이내에 회담을 개최,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 조선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원조한다. 또 美, 英, 蘇, 華 4국에 의한 신탁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시정부를 수립케 하여 조선의 장래 독립에 備할 터인바 신탁통치 기간은 최고 5년으로 한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와 조선 각종 민주적 단체와 협력하여 동국의 정치적 경제적 발달을 촉진하고 독립에 기여하는 수단을 강구한다. 이 신탁통치제에 관한 외상이사회의 제안을 검토키 위하여 美, 蘇, 英, 華 각국정부에 회부된다.


미-영-중-소 4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시정부를 세우고 신탁통치 기간을 최고 5년으로 한다는 것이다. 속셈을 따져본다면 미국과 소련이 조선에 어떤 방법으로 영향력을 확보할지 피차 확실한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독점을 막는 상호견제 방법에 합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명분으로 본다면 민주적 자치의 경험이 없는 조선의 건국 단계에서 연합국의 ‘후견’을 당분간 제공한다는 합리적 방안이기도 했다.


이 결정이 나오는 과정에서도 양대국의 상호견제 덕분에 속셈보다 명분 측면이 강화되었다. 3상회의 개막 당초 미국의 제안은 신탁통치 기간을 10년으로 고정하는 것이었는데, “최고 5년”으로 결정된 것은 소련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긴 기간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자기네에게 유리하다고 미국은 생각했지만, 소련의 수정 제안이 명분상 더 합당했기 때문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반탁운동은 세 갈래 세력의 연합으로 볼 수 있다. 김구의 완전독립파, 이승만의 친미파, 그리고 한민당의 기회주의파. 그들의 공통분모는 연합국 합의에 의한 점진적 건국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중경임정 출신의 김구 일파는 연합국 중 중국(국민당 정권)의 영향력에 의지하고 싶었지만 중국의 발언권은 전쟁 후에도 커질 전망이 아니었다. 역사적 배경이나 지정학적 조건으로는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건국 과정에서도 바람직한 일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유감스럽게도 임정과 밀착되어 있던 국민당 정권은 민심을 잃고 국공내전에서 수세에 몰려들고 있었다. 반면 이북을 장악한 공산주의 세력은 중국 공산당 정권과 유대를 강화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혈맹’관계를 구축했다.


한민당의 기회주의파는 식민지시대 기득권의 유지-강화에 지상목적을 두었다. 새로 세우는 국가가 지나치게 민주주의적인 국가가 되면 자기네 기득권이 침해될 것을 그들은 걱정했다. 연합국 합의에 따라 점진적 건국이 이뤄질 경우 지나치게 민주주의적인 국가가 될 것을 그들은 막연하게라도 걱정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46년 10월 합작위의 7원칙 중 토지개혁 방안은 상당히 온건한 것이었음에도 한민당이 실질적 분당 사태까지 무릅쓰며 격렬히 반대한 데서 그 지향을 알아볼 수 있다.


이승만의 분단건국 책동은 조선인이 아니라 극우파 미국인의 입장에서 펼친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우위에 더해 원자폭탄 독점으로 군사적 우위까지 확보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려는 국가주의 입장이다. 한국의 지금 대통령이 “뼛속까지 친미파”로 자부한다고 하는데, 자신을 이승만과 면밀히 비교해 보면 스스로 무색함을 느낄 것이다.


1946년 12월에서 1947년 4월에 걸친 미국 체류를 통해 이승만은 자신이 ‘친미파’ 정도가 아니라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단적인 증거가 하지에 대한 공격이다. 조선에서 미국의 힘을 대표하는 주둔군 사령관을 마음껏 비판하는 것은 친미파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보다 자신이 더 ‘주류’라고 믿는 미국인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에 대한 이승만의 노골적이고 전면적인 비난이 “자료 대한민국사”에 처음 나타난 것은 아래 기사다.


“하 중장은 좌익에 호의 갖고 공산당 건설에 원조 - 미 국무성의 언명에 대한 이승만 박사 응수”


[워싱턴 25일발 AP합동]당지에 체재중인 남조선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은 과반 미 국무성에서 “일부 의견을 달리하는 조선의 정치단체가 연합국의 합의로서 약속된 조선의 독립 달성을 방해하고 있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언명한 바에 관련하여 如左히 응수하였다.


“미 국무성 내 일부 분자는 조선에 독립을 수여한다는 미측 언약의 실천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 같다. 미국의 대 조선 정책 실천을 방해하고 있는 여사한 미국무성내의 일부 관리가 누구인지는 지적하고 싶지 않으나 이들은 공산주의에 기울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마샬의 국무장관 취임을 계기로 이들 좌경분자는 미 국무성으로부터 일소될 가능성이 있음을 듣고 있다.


현재 미 국무성이 고지하고 있는 대 조선 정책은 맥아더장군이 요구하는 바와는 상반하는 것이다. 맥 장군은 이미 일본에 있어서 동 장군에게 부하된 부담이 가중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나는 맥 장군이 남조선 우익 측에 대하여 좌익 측보다도 많은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남조선주둔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좌익에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남조선미군정 당국은 조선의 공산당 건설과 이에 대한 원조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조선의 우익진영은 조선 탁치를 수락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우익진영은 여사한 미군정 당국 급 기타 미측의 공산당 조장책에 관하여 미군정당국과 견해의 상이를 보고 있다. 남조선미군정 당국이 공산당에 대하여 활발한 격려를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에는 극소수의 공산주의자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소위 좌우합작위원회가 조직되어 하지중장은 남조선입법의원 관선의원에 상당한 수를 공산주의자에게 배정 임명하였으나 민선의원의 선출에 있어서는 우익진영이 45의석 중 43의석을 점유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1월 26일자)


하지는 몇 주일 후 정책 협의를 위해 워싱턴에 가게 되는데, 이것이 이승만의 비판에 따른 미국 정부의 ‘소환’이란 소문이 떠돈 모양이다. 1월 31일 이승만이 민족통일총본부로 보낸 아래 전문에 언급된 러치의 성명 등 소문의 양상은 확인하지 못했는데, 이 전문에서 이승만이 하지의 ‘소환’에 자신이 관계없다고 언명하면서도 은근히 관계가 없지 않은 듯한 냄새를 피우는 재주가 묘하다.


“남조선 과도정부 수립이 남북통일의 첫 단계 - 미 관변 수뇌부도 이 안건에 찬성”


[이 박사 전문] 워싱턴에 체류 중인 이승만 박사는 1월 31일 민통에 여좌한 전문을 발송하였다.


“러취 장관이 자기와 하지중장 소환 운운에 관하여 성명한 것은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하지중장은 신탁문제에 관한 그의 정책을 변경하여야 할 줄 알고 또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합작을 강요하는 계획에 관한 정책을 변경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노력은 만족할 만한 해결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남조선의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남북통일에 나아가는 정당한 계단이다. 미국관변의 수뇌자들도 이 안건에 찬동하며 또 이것은 하지중장이 소련을 상대하여 해결하려는 노력을 방해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미-소 양국 간에 개재하여 있는 의혹을 일소함으로써 해결을 지으려는 데 역할도 하여야 할 것이다.


이 과도정부는 미 당국이 소련과 협상하는 것을 도울 수가 있을 것이며 또 모든 민생문제 해결에도 조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모든 문제를 미국 친구들과 협력하여 해결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공동목적인 즉시 완전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무슨 오해가 있을 수 없다.”(<동아일보> 1947년 2월 04일자)


1월 20일 입법의원에서 반탁 결의안을 통과시킬 무렵에는 이승만이 정략적 의도에서 자신을 공격하기 시작한 사실을 하지가 알아채고 있었던 것 같다. 정병준은 <우남 이승만 연구> 637쪽에서 이승만이 미국에 가자마자 취한 하지에 대한 적대적 행위로 “하지가 45명의 관선 입법의원을 선발하면서 공산주의자를 포함시켰으니, 이를 철회하게 해달라고 맥아더와 국무부를 상대로 호소”한 것과 “하지가 입법의원 설립을 이유로 민주의원 해산을 지시했는데, 이것 또한 무도한 일이니 취소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일을 꼽았다. 두 가지 모두 12월 중순의 여러 편지로 확인한 것이다.


이승만에 대한 하지의 배신감이 어떠했을까?


하지는 이승만이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선전포고(1947년 1얼 25일)한 직후 굿펠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늙은 개자식(the old s.o.b.)이 나에게 한 배신행위는 삭이기 힘들고 비통한 경험”이었다고 쓸 정도로 이승만에게 격분해 있었다. 하지는 자신이 이승만의 도미를 주선했는데, 떠나고 난 뒤에야 이승만의 주된 도미 목적이 자신에 대한 신임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남한 단정을 수립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고 분해했다. 나아가 이승만이 도미하면서 전면 봉기와 반란을 일으켜 한국인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자율정부를 수립한다는 매우 치밀한 계획을 남겨둔 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좀 더 정확히 하지가 이승만에게 분노하기 시작한 시점을 찾는다면 이승만이 12월 중순에 맥아더-국무부를 상대로 관선 입법의원 문제, 민주의원 해산 문제로 하지를 공격했을 때부터였다. 1947년 1월의 반탁 시위를 막는 데 성공한 하지는 즉각적으로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지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미군정의 정책 방향을 조정하는 문제였으며, 둘째는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 복수의 문제였다. 1947년에 미군정이 김규식과 서재필을 남한 최고 지도자로 내세우려 시도했던 데는, 1947년 초반에 하지기 느낀 개인적 배신감이 큰 작용을 했다. (<우남 이승만 연구> 649-650쪽)


입법의원의 반탁 결의안은 하지에게도 김규식에게도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미소공위 재개에 장애가 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김규식은 입법의원을 미군정의 ‘보조’기구로 보는 하지의 시각에도 조정의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일을 접어놓고 지방에 가 있다가 1월 30일에 하지를 만나고 2월 3일에 입법의원을 다시 열었다. 개회 모두에 그는 하지와의 대화 내용을 보고하면서 하지의 격앙된 감정을 그대로 전했다.


“김규식 하지 중장과의 회담 보고”


입의 의장 김규식은 3일 제13차 본회의에서 동 의원에서 반탁을 결의한 후 하지 중장과의 회견 보고를 하였는데 동 보고에 의하면 동 중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반탁결의라고 하면 언론자유가 있고 또 민의 대표기관인 만큼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결의문 내용을 보면 반탁을 하는 결의가 아니라 나와 미국정책에 대한 반대표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불쾌하다. 미국은 조선독립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이러한 태도로 나온다면 미국으로서는 독립 전에 조선 문제로부터 손을 뗄런지도 모른다.”


이 보고 후에 김의장은 이러한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부언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4일자)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