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9일 좌우합작위원회(합작위)에서 합작위의 조직 확대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일반 대중과 각 방면 지도자들은 벌써부터 현 합위의 조직확대 내지 합작진영 조직의 필요를 역설하고 있으나 본 합위는 합작통일의 본의와 정반대 결과, 즉 좌우세력을 배척하는 모종의 중간 혹 제3세력의 형성을 조성하게 된 것을 우려하여 합위 조직확대에 관한 모든 의견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다. 본 합위는 이와 같이 제3 혹은 중간전선이 아니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좌우 각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자 及 유력한 개인을 총망라하여 민족통일전선을 재편성하자는 주장에 찬성하는 바이다.” (<경향신문> 1947년 1월 30일자)


합작위의 역할 강화에 대한 김규식의 의지가 느껴지는 담화다. 1월 20일 극우세력이 추진한 반탁결의안의 입법의원 통과에 김규식은 매우 분노한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은 며칠 동안 서울을 떠나 있었고 그 동안 입법의회도 열리지 못했다. 정용욱은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169쪽에서 “김규식은 한민당-이승만 세력이 지배하는 입법의원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며 시골로 은퇴하여 버렸다.”고 서술하고 이런 주석을 붙였다.


김규식은 입법의원 의장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다고 미군정 측에 알려 왔다. 그는 하지와 브라운이 좌우합작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이를 입법의원의 설치로만 몰아간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심지어 그는 이런 상태라면 대의제 정부수립의 추진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지에게 말하였다. <사건일지>, 1947. 1. 20 및 1. 23


며칠 후 귀경한 김규식은 1월 30일에 하지와 브라운(미소공위 수석대표)을 만났다. 이후 미군정의 조치를 보면 이 시점까지 미군정 고위층은 김규식과 합작위에 더욱 힘을 실어주어 극우세력을 견제토록 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 같고, 김규식에게 그런 방침을 알렸기 때문에 귀경한 것으로 보인다. 1월 29일 합작위의 조직 확대 방침 천명은 그런 상황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합작위의 조직 확대 방침은 그 동안 극우세력이 쏟아 온 합작위 비난과 공격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것이었다. 독촉국민회 선전부에서 1월 20일까지 열린 부-군 지부장회의의 결정사항이라고 발표한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합위가 삼상회의를 전체적으로 지지한다고 한 것은 찬탁을 종용한 것이니 차를 분쇄하여야 하며 좌우합작이란 미명하에 기실 민족진영의 분열을 책동하는 결과가 되었고 지방유세대의 명의 등으로 지방운동을 교란하고 있으니 此는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으로 규정하여 경향을 막론하고 차종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할 것”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7년 01월 25일, 26일


“반역집단”이니 “회색행동”이니 극단적 적대감을 느끼게 한다. 독촉국민회의 최대 사업이 반탁운동인데 반탁운동은 일반 인민에게 이미 호소력을 잃고 대중운동이 아니라 조직운동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합작위에서 유세대로 시작해 지방조직에 착수할 기색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반발한 것이다.


독촉국민회보다도 극우세력의 합작위에 대한 적대감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민주의원이다. 합작위 우익 대표는 민주의원에서 임명하는 형식을 취했었다. 민주의원은 1월 18일 회의에서 합작위 대표 김규식, 원세훈, 안재홍, 김붕준의 소환을 결정하고 이렇게 발표했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사명은 좌우가 합작하여 임정을 수립함에 있었는데 사실에 있어서는 좌익과 합작 못하였을 뿐 아니라 권한 이외의 기관을 작성하고 사명 이외의 행사를 감행하였다. 더욱 현하 중대한 신탁문제에 관하여 태도가 극히 모호하다. 본원은 본래의 동 위원회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감하여 본원 선출의 의원은 소환함.”


이것은 이승만이 민주의원으로 보낸 지령에 따른 것이다. 이승만은 전보를 통해 합작위를 “극렬분자”로 몰아붙이고 합작위의 지방조직 확대를 경계하며 떡잎(嫩葉)부터 말살할 것을 주장한다. 이승만이 자신에게 불리한 상대를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구안지사(具眼之士)에게 합작위원회 지부 설치에 관한 정월 9일부 서울타임에 대하여 유의하라 하시오. 극렬분자에 부수하는 세력이 만연되지 못하도록 방지하라고 권하시오. 분할하여 지배하려는 경향은 눈엽(嫩葉) 때부터 말살하여야 합니다. 합작은 유명무실이니 해소하여야 합니다. 대중을 기만하여서는 안 됩니다.” (<동아일보> 1947년 1월 23일자)


민주의원은 원래 중경임정 중심의 우익 통합단체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로 만들어지면서 하지 사령관의 자문기구 임무를 겹친 기구였다. 이승만, 김구 두 영수의 지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입법의원이 만들어지면서 자문기구의 임무가 사라졌다. 그래서 12월 12일 입법의원 개원을 전후해서 입법의원의 존속 문제가 제기되었다.


금번 창설된 남조선입법의원을 계기로 민주의원에서는 10일 정례회의에서 민의의 존폐문제 입의와 민의와의 관계 민의의 성격규정 등 중대한 의제를 중심으로 장시간 논의한 바 있었는데 동 회의는 계속하여 14일 오후 2시부터 김구 김규식 등을 비롯한 다수의원 참석리에 同 5시경까지 진지한 토의가 있었다. 전문컨대 민의 존폐문제에 있어서는 對 입의 관계에 독자적 태도를 취하는 김구 중심 의원의 의견과 일부 의원의 존속주장과 존폐문제는 同 의원 이승만 귀국 후에 결정하자는 김규식 중심 의원의 의견과 일부 의원의 폐지주장 등에 논쟁이 있었다 하는 바 최후적 태도결정은 금명간에 있을 것이라 한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17일자)


민의 존폐문제로 기간 수차 회의를 거듭하여 오던 민주의원에서는 17일 정례회가 끝난 후 同 공보부장 함상훈은 기자단에게 동일 결의한 민의 존속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본원은 본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의 전통을 이어 창설된 비상국민회의에서 최고정무위원회로서 성립되었는 바 금번 입법의원 설립과 동시에 하지중장의 자문에 응하는 기능은 해소하고 임시정부 수립의 사명을 완수하기에 계속 노력함.” (<서울신문> 1946년 12월 18일자)


이상한 결정이다. 자문 기능이 사라졌다면 ‘민주의원’의 이름을 버리고 원래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로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영수들의 임명으로 조직된 기구이니 영수 이승만 없이는 존폐도 스스로 결정 못하는 기구다. 이승만은 이용가치가 있는 한 민주의원을 버리려 하지 않았고, 미국행에서 그의 ‘민족대표’ 자격을 부여한 것이 민주의원이었다. 승용차와 급여 등 민주의원에 대한 군정청의 지원은 입법의원 개원을 계기로 중단되었을 텐데, 민주의원 멤버들은 막대한 정치자금을 가진 이승만의 지원에 의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극우세력의 공세에 맞서 합작위는 몇 차례 담화로 사명의 계속을 역설했다. 12월 18일 담화에서는 “극좌·극우의 편향주의 선전가들”의 중상에도 불구하고 합작위가 “오직 합작 7원칙을 철저히 실시하기 위해서 진력 분투할 뿐”이라고 주장했고, (<조선일보> 1946년 12월 19일자) 1월 8일에는 박건웅 선전부장이 합작위의 사명이 “사실은 점점 확대 진전되고” 있으며 “가급적 입법의원으로 하여금 민의에 의하여 그 직능을 발휘하도록 노력할 뿐”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1947년 1월 9일자) 입법의원의 극우 편향 견제를 그 사명으로 표방한 것이다.


1월 22일 다시 박건웅이 발표한 담화는 극우세력의 공세 강화에 대항하여 반탁운동에 대한 합작위의 반대 입장을 정면으로 들고 나왔다. 민주의원의 파견에 관계없이 합작위는 자기 사명을 가진 기구임을 주장한 대목이 눈에 띈다.


1) 반탁운동의 재연에 따라 일부에서 合委 반대를 성명하는 것을 보고 합작운동의 전도를 우려하나 사실상 합작운동은 모든 곤란 중에서 계속 발전하고 있다. 앞으로 합작운동의 확대 발전에 따라서 합위의 조직형식을 변경할 수 있다. 그러나 합작운동 본지(本旨)는 목전의 민주해결과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전 민족적 요구이므로 불가피로 발전할 것이다. 본 합위는 일관한 신념과 주장으로 합작을 한층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1) 다시 대두하는듯한 반탁운동은 과거 1년 이상 쓰라린 경험에 의하여 그 성과 여하를 일반민중이 잘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제5호 성명에 날인하지 아니치 못하였고 민족 내부의 분열과 외인의 조소를 초치한 것밖에 없다. 우리는 연합국을 비판 반대하기 전에 우리 민족 내부를 단결하여 공위를 재개하고 임정이 수립된 후에 전 민족이 1개의 강고한 단체로 연합국에 대하여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투쟁할 것을 투쟁하는 것이 옳고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1) 이제 비국(비상국민회의) 민의 방면에서 우측 대표가 아니라는 거조에 출하였다 할지라도 합위는 불고한다. (<경향신문> 1947년 1월 23일자)


합작위를 둘러싼 논란에서 극우세력은 합작위의 독자세력화를 경계했다. 자기네가 장악한 우익 주도권에 대한 도전을 꺼린 것이다. 이것은 합작위 입장에서도 딜레마였다. 극우세력 견제를 위한 세력화는 현실적으로 필요했다. 입법의원에서 관선의원 선출을 합작위가 주도했는데도 반탁 결의안이 44대 1로 채택된 것은 합작위 측의 조직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합작위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울타리를 친다는 것은 원래의 임무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장차 사태 진전에 따라 다른 세력을 합작에 끌어들이는 길을 스스로 막는 결과가 될 것이었다.


1월 8일 박건웅의 담화 중 “김규식 박사의 모당 당수설이 있는데 사실무근”이란 대목이 있다. 10월 이래 한민당을 탈당한 인사들이 민중동맹이란 이름으로 정당을 결성하고 있었고 김규식을 당수로 영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원세훈, 김약수 등을 중심으로 한 이 정당에 김규식도 참여할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합작위 활동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갔다. 이에 따라 2월에 접어들면 새로운 통일전선 결성 움직임이 일어나고 은퇴를 선언했던 여운형도 이에 호응하여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게 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