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의원의 1947년 첫 회의는(제2회 제1차) 1월 6일 열렸다. 그 회의에서 박건웅 외 12인의 의원은 정치범 석방 건의안을 제출했다. 지난 가을 이래 많은 좌익 인사들의 체포와 수배로 인해 입법의원 선거를 비롯한 정치활동이 원활치 못한 문제는 누구나 아는 것이었다. 정치의 정상화를 위해 무리한 탄압의 중지를 건의하자는 것은 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입법의원이 마땅히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마땅히 할 일로 여기지 않는 의원들이 많았다. 그래도 체면이 있는지 정치범 석방을 정면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임시정부 수립 때까지 표결을 유보하자는 주장으로 나왔다.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 정치범들이 참여할 길은 열어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김규식은 이 안건의 유보를 반대하며 미군정 측도 적절한 석방 범위를 입법의원에서 제시하면 호응할 태세라고 역설했다.
좌우합작 일로 여운형 씨와 본인과 하지 중장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때 브라운 중위(‘소장’의 착오인 듯)도 있었고 버치 중위도 참석했습니다마는 그때에 여운형 씨가 정치범 석방문제 요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 하지 중장의 대답이 “그 정치범으로 피수된 사람의 명단을 가지고 오너라. 우리도 그 명단을 가지고 우리가 그 명단을 검토해서 정치범인지 아닌지 그것을 판단해 가지고 석방할 것은 석방하겠다.” 그렇게까지 말이 되었습니다마는 여운형 씨가 오늘까지 그 명단을 가져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미군정 장관이 정치범 석방해달라는 문제에 있어서 그마마한 호의라도 표시하는데 우리로서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그것만을 주장하고 감정적에 그쳐서 그 문제를 “우리 독립된 후에 처리합세.” 하는 것은 너무나 요원하다고 생각하고 너무나 대방에 대해서 제안한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봅니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1>(강만길, 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259쪽)
이에 따라 이 건의안은 제1(법제)위원회와 제2(내무)위원회 연석회의의 검토에 맡겨졌는데, 결국 3월 3일 본회의에서 정치범 석방에 관한 논의를 중지하자는 제안이 48대 7로 통과됨에 따라 폐기되고 말았다. 입법의회에서는 정치범 석방에 서두를 마음이 없는 의원들이 압도적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범 석방에는 잘 움직이지 않는 입법의원이 기민하게 움직이는 일도 있었다. 1월 13일 본회의에서 41명 의원 연명으로 ‘반탁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김규식은 이 결의안의 철회를 강력히 권했다. 국제조약의 내용을 입법의원의 법령으로 철폐할 수 없는 것이며, 이 결의안이 입법의원 본래의 사명과 거리가 먼 것이라고 주장했다.(위 책 251쪽) 결의안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1) 우리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 중 신탁통치에 관한 조항은 전 민족의 절대 반대하는 바임에도 불구하고 하지중장이 공동위원회성명서를 제5호에 서명한 것을 모스크바결정의 전면적 지지로 인정하는 것은 민족의 총의를 왜곡하는 것으로서 이에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단호 반대함.
2)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하기 위하여 초청된 개인·정당 급 사회단체에 대하여 모스크바결정의 실행에 관한 의사발표의 자유를 구속 내지 금지함은 신탁통치를 조선민족에게 강요하는 것으로서 대서양헌장에 보장된 언론자유의 원칙에 위반될 뿐 아니라 작년 5월 중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당시에 발표된 하지중장의 성명에도 배치됨을 지적하고 이에 단호 반대함.
그러나 한민당, 한독당, 독촉의 극우세력은 이 결의안 심의를 강행하고 1월 20일 찬성 44 대 반대 1로 통과시켰다. 반대 1명은 안재홍이었는데, 그는 미-소 양국군 사령관 모두에게 항의 및 요청 결의문을 보내자는 수정동의를 제출한 입장에서 하지만을 상대로 하는 원안에 반대한 것이었다. 안재홍의 반대파는 이 일을 빌미로 그가 ‘찬탁파’라는 비난을 두고두고 퍼붓는다. 맨 앞의 날자는 1월 20일의 착오로 보인다.
1월 21일에 입법의원에서는, 당시 남조선 미 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이른바 반탁결의로 알려진 현 전남 이남규 지사 외 제씨에 의하여 제출된 결의안 나왔고, 나는 남의 하지 중장, 북의 치스티야꼬프 대장, 모-소 양국 사령관에게 일률로 항의 및 요청하는 결의문을 수정동의로 제출하여, 세간에 이른바 “44 대 1” 문제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수정제안자의 원안에 대한 반대거수는 당연한 책무이다. 44대 1로 찬탁을 하였다고 만들어내고 선전하는 도배 있는 것은, 동서고금 정상적(政商的) 파쟁배 있는 곳에 거의 항다반사로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때에 술렁대는 일부 정상들의 동향은 여간이 아니었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441쪽)
합작위원회의 중도 우익 인사들은 1946년 하반기 동안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모처럼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입법의회가 만들어진 이제 그들에 대한 극우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합작위원회의 우측 대표 소환”
11일 하지 중장의 성명을 계기로 민족진영은 그 전부를 들어 반탁운동을 재개 추진시키려는 이때에 합작위원회의 우측 대표들은 신탁에 대하여 불명확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므로 비상국민회에서는 16일 상임위원회를 열고 대표들의 소환을 결정하였다 하며 민주의원에서도 18일 회의에서 대표 소환에 대한 결의가 있으리라고 한다. (<동아일보> 1947년 1월 18일자)
“합위 해소를 - 이 박사 타전(打電)”
도미 중인 이승만 박사로부터 20일 민주의원에 합위를 해소하라는 내용의 다음과 같은 전문이 왔다고 한다.
“구안지사(具眼之士)에게 합위 지부 설치에 관한 9일부 <서울타임스>에 대하여 유의하라 하시오. 극렬분자에 부수하는 세력이 만연되지 못하도록 방지하라고 권하시오. 분열하여 지배하려는 경향은 떡잎 때부터 말살하여야 됩니다. 합위는 유명무실이니 해소하여야 합니다. 대중을 기만하여서는 안 됩니다.” (<자유신문> 1947년 1월 22일자)
안재홍의 아래 회고는 1월 18일의 민주의원 회의 광경을 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날짜에는 역시 하루의 착오가 있다.
나는 1월 19일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서, 백범과 현 이(시영) 부통령 이외 해내외 혁명가-정치지도자 수십 인 참석한 자리에서 제1착으로 발언을 청하여 변론한 바 있다.
중국인 측이 “도미하여 국제외교장 리에서 한국의 통일독립을 완성키로 공작하시던 이 박사와, 국내에서 제현을 망라하여 내정적 쇄신을 추진하시는 김규식 박사”의 예를 들어, “이 나라의 경사가 멀지 않겠고, 자기들 외국 교민들도 흔행(欣幸)의 날을 함께 맞이할 것을 기다린다”는 <華文漢城日報> 창간호 축사로 나온 물구를 원용하여 가면서, “외국인은 이 일을 아름답게 전망하여 주고 있건만, 우리네의 일은 실질에서 그다지 좋게 되어가지도 못하고, 세칭 3영수의 사이에도 혼연일치를 못 보는 것은 외딴이요, 가끔 그 사이에 한조(寒潮)가 떠돌고 있는 것은 개탄할 일”이라고, 술회 겸 고언을 하였다.
이때에 외타 장로들은 모두 침묵하였고, 그중의 한 분은 날카로운 발언도 있었고 하나, 백범은 김 박사의 정견(政見)이 실당(失當)은 한 줄로 말씀하되, “피차 아끼고 신뢰하는 점이야 변함이 있겠느냐”고 하시는 것이었다. 실은 이때 나로서 어느 한 분을 두둔하자고 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국가사가 분규에 빠져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일차 발언한 것이었었다. (위 책 440-441쪽)
이 대목은 안재홍이 너무 조심스럽게 기록한 것이어서 글만 보고는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제 1947년 1월에 진행된 일들을 살펴보면서 비로소 그 맥락을 파악하게 되었다. 첫 문장에서 그가 “변론”이라 한 것은 김규식과 합작위에 우익의 비난이 쏟아지던 상황을 전제로 이해할 수 있다. 김구도 김규식에게 인간적 신뢰는 지키지만, 김규식의 노선이 잘못된 것으로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구, 김규식, 이승만, 3영수 사이에 혼연일치는커녕 갈등이 일어나고 있던 사실을 안재홍이 민주의원 회의장에서 공공연히 지적하고 나설 만큼 ‘영수’들의 신뢰감이 무너지고 있었다. 안재홍은 이로부터 십여 일 후 민정장관 취임을 결심한 뒤에야 김구를 찾아가 사유를 알렸다고 한다. 원래는 결정하기 전에 의견을 청하는 사이였는데,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1주일을 두고 고심한 나머지, 나는 취임 승낙을 하여 놓고 비로소 백범께 만나뵈어 그 수락 사유를 말씀하였더니, 그분의 예에 의하여 구수한 웃음을 띠면서 “승낙을 이미 하였으면 도리가 없는 것이고, 승낙하기 전이라면 자기로서는 단연 민세의 민정장관 취임을 말라고 하겠다”고 하시며, “금후 그대는 도로무공(徒勞無功)일 것이고, 결국 득담(得談)만 많이 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나는 의심없이 반대하실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에, 그분께는 사후 양해의 의미로 승낙 직후 말씀하였던 것이었다. 또 그 말씀이 꼭 옳다고까지 말씀하였다. (위 책 441-442쪽)
김구는 신탁통치를 이유로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고 군정에 협조하지 않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업고 조선 문제를 연합국의 손에서 빼내 유엔에 가져감으로써 분단건국을 꾀하고 있었다. 김규식은 조선 건국이 연합국의 합의에 따라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김구와 이승만의 영도력을 하늘같이 받들던 안재홍이 이제 그들을 떠나 김규식의 노선을 따라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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