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은 <우남 이승만 연구>에서 1946년 12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날 때의 상황을 서술한 절에 “이승만-김구-하지의 동상이몽”이란 제목을 붙였다.(627-635쪽) 당시 남조선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세 사람이 다가오는 변화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그런대로 어울리고 있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는 1년 전의 반탁운동 이래 김구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이승만과의 관계도 3월의 미소공위 개막 직전 민주의원 의장직을 물러나게 한 이래 전과 다른 거리가 생겼다. 특히 미소공위 중단 후 하지가 좌우합작에 치중하면서 골이 깊어졌다. 모스크바 3상회의 1주년을 앞두고 하지가 미소공위 재개에 힘을 기울이는 시점에서 이승만의 미국행을 하지가 반긴 것은 미소공위를 반대하는 이승만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으로 내다보았기 때문이었다고 정병준은 해석한다.
김구와 이승만 사이에도 1946년 내내 세력다툼의 긴장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반탁’이란 공동 과제가 있었고, 이승만의 출국으로 역할 분담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역할 분담을 정병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승만은 도미에 앞서 김구와 향후 계획에 대해 합의했다. 이승만은 미국 여론에 호소하는 외교 활동 노선을 주장했고, 김구는 주한미군 5만 명에 대항하는 폭동과 임정 법통을 근거로 한 정부 수립 노선을 주장했다. 논의 끝에 김구는 이승만이 미국 측으로부터 조속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혁명적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는 전제로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국내와 워싱턴에서 반탁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 핵심은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우익 대표를 철수시키는 것, 입법의원을 반탁운동의 선전장으로 활용할 것, 신탁 문제에 대한 미군정의 불확실한 태도와 공산주의자들을 선호하는 정책을 공격할 것,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할 것 등이었다. 종국적으로는 미군정에 대한 반란이었다.
국내에서 김구가 반탁-반 군정-반 하지 운동의 일환으로 시위와 폭동을 일으키면, 미군정은 결국 김구를 체포-투옥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국 김구는 순교자로서 집중 조명을 받게 된다는 시나리오였다. 동시에 이승만은 미국에서 하지가 공산주의자들을 감싸는 반면 한국 애국자들을 박해한다고 선전함으로써 하지의 해임을 요구하는 한편, 즉각적인 한국 독립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호소하려 했다. 국내와 워싱턴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이 반탁-반 군정- 반 하지 운동은 반탁-모스크바결정 폐기라는 종전의 반탁운동과는 달리, 직접적인 정권 장악으로 초점이 이동해 있었다.(위 책 633-634쪽)
중간 문단에서 김구와 이승만의 합의 내용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 들어 있는 사실이 주의를 끈다. 김구는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인물이며 분단건국을 지지한 일이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38선을 베고 죽겠다”는 처절한 외침을 남긴 민족주의자다. 그런 그가 이승만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 노력에 합의할 수 있었을까?
김구의 언행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이었으므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그의 입장은 앞으로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런데 1946년 하반기의 그의 태도를 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는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는 했지만 원칙적 입장에 그쳤을 뿐, 실제로 좌우합작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김구는 신탁통치만이 아니라 군정까지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승만과 달랐다. ‘외세 거부’라는 점에서 민족주의자로서 순수성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그가 미국과 소련보다 중국의 영향력을 원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장개석 정부가 끝내 조선에 영향력을 누리지 못한 채로 몰락해 버렸기 때문에 이 점이 별로 부각되지 않고 말았지만, 김구의 중국 국민당 정부에 대한 의존 자세에는 민족주의의 기준을 벗어나는 점이 적지 않았다.
김구가 1948년에 들어서서야 분단건국 반대에 나선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1947년 중에 중도파의 좌우합작-남북합작 노력에 그가 동조했다면 이승만의 분단건국 획책이 그처럼 순풍에 돛단 듯 진행되지는 않았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민족주의자인 김구가 분단건국에 반대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고, 너무나 늦게까지 그 위험을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의 진행을 방관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1947년의 상황 진행을 살피면서 다른 가능성도 검토하려 한다. 자신이 주도권을 쥘 수만 있다면 분단건국도 감수할 용의가 있었으리라는 가능성이다. 물론 영속적 분단을 바란 것은 아니겠지만, 외세를 몰아내고 제대로 된 민족국가를 남반부에만이라도 우선 세워놓은 다음 북반부를 ‘해방’시키는 것이 미국과 소련의 뜻에 따르는 건국보다 낫다고 그가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었다면 이승만과의 합작이 좌우합작이나 남북합작보다 그에게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을 수 있다. 1946년 말 도미 시점에서 이승만의 분단건국 의도는 더할 수 없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영속적 분단을 바라든, 일시적 분단을 바라든, 반탁-반 군정-반 하지 운동은 김구와 이승만이 공유하는 목적이었다.
한 번 분단이 되고 나면 재통일이 쉽지 않고 분단으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할 국제정세였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1947년 시점에서는 그런 위험을 인식한 사람도 있고 인식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김구가 철저한 외세 배격을 위해 일시적 분단이라도 감수할 생각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 그를 비판할 일은 아니다. 주어진 상황과 그의 대응 방식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면서 비평할 점을 찾아볼 일이다.
1월 16일자 하지의 성명서를 1월 11일자 일기에 실어 놓았는데, 그중에 주목할 대목이 있다.
“남조선에 있는 일부 오도를 받은 정당의 경솔한 행동은 조선 문제에 다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의 친선을 이간하고 또 그 국가들로 하여금 조선민족은 그 자주독립을 완성시키려고 조직된 기관에 협력하지 아니하므로 조선은 독립할 준비가 되지 못하였다는 관념을 주게 될 것이다. 조선에 관하여 다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본관 및 미국민은 조선독립의 호기를 잃은 조선 사람들의 불온한 시위와 행동에 대하여는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미소공위의 결렬을 비롯해 조선 독립이 순조롭지 않은 상황의 책임이 반탁세력에 있다고 처음으로 지적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들어 반탁운동을 절대적으로 옹호하던 종래 하지의 태도와 다르다. 12월 24일 치스챠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탁운동의 규제를 약속한 것이 단순한 전술적 양보가 아니라 상황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는 미소공위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반탁운동을 이용하려 했으나 이제야 반탁운동의 목적이 미소공위의 파괴에 있고 주둔군 사령관의 입장을 위협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1947년 1월 중순 반탁운동의 재개 시도는 미군정의 위상과 조선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이 위협에 대한 하지의 대응은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에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길게 인용한다. (643-646쪽)
구체적으로 이승만과 김구의 반탁-반 군정을 위한 폭동과 시위 계획이 미군정에 감지되었다. 미군정은 워싱턴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가 주고받은 암호 편지들을 검열해, 이승만의 광범위하고 격렬한 반탁-반 군정- 반 하지 거사 계획을 알게 되었다. 하지는 이승만이 반미의 모든 악질적 음모를 꾸민 장본인이며, 김구 일당이 이승만의 이름을 빙자해 그의 추종자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한편 이승만과 김구의 계획에 대한 제보가 1월 10일경에 접수되었다. 제보자들은 제2의 3-1운동으로 기획된 이 시위-폭동이 한인 중에 순교자를 발생시키고 혼란을 야기해서, 군정으로 하여금 김구나 여타 우익 지도자를 투옥하게 할 계획이라고 했다. “은밀하고 신뢰할 만한 제보자들”은 이승만이 이 폭동을 기획했으며, 기간은 1월 18일부터 20일까지고 예정되어 있다고 알렸다.
하지와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의 반탁 시위와 폭동을 저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을 설득하는 작업이었다. (...) 굿펠로우의 설득을 받은 이승만은 이 직후 대규모 시위를 중단하고 반외세-반미 행동을 자제하라는 언론 보도문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1월 15일에 김구에게 전문을 보내 소요와 폭력 시위 계획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 이승만의 협조를 얻어낸 하지는 1월 16일에 김구와 2시간 반 동안 회담하며 설득을 시도했다. 브라운은 그 외의 우익 지도자들과 접촉했다. 이날 하지는 라디오와 방송을 통해, 반탁 시위가 남한 단정운동과 긴밀히 연계된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 하지의 지시에 따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1월 17일에 모든 선동자들을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경고 성명을 발표했다.
미군정은 시위를 주도할 것으로 알려진 전국학생총연맹 본부를 1월 15일 3차례, 16일 1차례나 수색하며 관련자를 연행했고, 독촉국민회 부-군 지부장 회의에 참가한 지방 우익 지도자들을 귀가시키는 데 주력했다. 미군정의 강력한 조치로 인해 전국반탁학련 반탁궐기대회 1주년을 기념해 계획되었던 1월 18일의 대규모 반탁 시위는 별다른 일 없이 넘어갔다. 전국학련이 주최한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가 천도교당에서 개최되었지만, 참석자는 1,300명에 불과했다. 김구는 오늘만큼은 혼란을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해산해달라고 연설했다.
이승만과 김구가 합의했던 1월 18-20일간의 반탁 시위와 폭동은 무산되었지만, 이번에는 김구가 독자적으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김구는 이승만의 계획을 이용해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함으로써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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