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劉邦)이 초한쟁패(楚漢爭覇)에서 결국은 항우(項羽)를 이겨냈지만, 처음에는 항우에게 연전연패를 겪으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팽성(彭城) 부근에서 크게 패하여 항우의 부하 정공(丁公)에게 쫓기던 유방은 다급한 나머지 정공에게 통사정을 했다. “우리 사이에 원수진 일도 없는데 너무 심하게 굴지 맙시다.” 너무나 딱했던지 정공은 공격을 늦추고 활로를 열어주었다.


항우가 망한 뒤 정공이 유방을 찾아오니 유방이 대뜸 끌어내 처형하라며 꾸짖었다. “저 자는 항우의 신하로서 주군에게 불충하여 그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하였으니 후세 인신(人臣)은 저 자를 본받지 말지어다!”


투쟁을 이겨낸 승리자가 투쟁과정에서의 적대자들을 자기 본분에 충실했던 것이라 칭찬하며 포용하는 일은 동서고금에 많이 있지만,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상대방을 본분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다. 유방이 확립하고자 하던 군신(君臣)관계의 원칙을 강조하기 위해 정공을 희생시킨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전범재판이 열렸을 때 대부분의 혐의자들은 전쟁 당시의 실정법이나 맡고 있던 직책에 의거해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인류에 대한 범죄’의 개념은 실정법의 방어막을 깨뜨리기 위해 제기되어, 군인이라 하더라도 인륜에 벗어나는 명령이라면 거부할 책임이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많은 전범의 유죄판결을 끌어냈다.


하인리히라는 동독 젊은이가 92년 1월 베를린 법정에서 살인죄로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89년 2월 베를린 장벽 경비병으로 있을 때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한 청년을 쏘아 죽인 혐의였다. 하인리히의 형량은 2년을 더 끈 항소심을 통해 집행유예 6개월로 줄었지만, 범죄적인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따른 행위는 유죄의 딱지를 뗄 수 없었다.


탈주자 사살명령의 최고책임자 호네커가 간암 말기상태에서 재판을 면제받은 채 죽었고, 비밀경찰 책임자 미엘케도 탈주자 사살과 관련된 혐의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순박한 시골청년 하인리히의 살인죄 판결은 더더욱 독일인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막바지에 이른 동독체제 청산재판에서 며칠 전 마지막 총서기 크렌츠가 탈주자 사살책임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독일인들의 마음이 크게 가벼워질 것 같지는 않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