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열리지 않는다. 식량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문을 펼쳐볼 수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최근 입수한 <東아시아 近現代通史 7 - 아시아 諸戰爭의 時代>(岩波書店 펴냄)와 <위키피디아>를 들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아시아 여러 나라 사정을 살피는 것으로 일기를 때워야겠다.


오늘은 우선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와 미얀마 생각을 해보겠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대영제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는 1947년 8월 독립 후 제3세계의 움직임에 중요한 역할을 맡음으로써 냉전의 구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실 영국은 ‘제국’인 적이 없었고 식민지인 인도에 1876년 ‘제국’이라는 이름을 붙여 영국 여왕(또는 왕)이 인도 여제(또는 황제)의 호칭을 겸했던 것이다. 미얀마는 1886년 인도제국에 병탄되었다가 1937년 별도의 식민지로 분리되었고, 1948년 독립 후 오랜 기간을 사회주의 군부독재 밑에 지내 왔다.


1942년 일본군의 진격은 영국,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동남아시아 지역에 복잡한 변화를 일으켰다. 지배국에 저항하고 있던 각지의 민족주의 세력 중 상당부분이 일본군을 환영했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것도 이들의 협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백인 세력을 배격하는 데 힘을 합치자는 미끼였다.


우리에게 ‘아웅 산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미얀마(버마)의 독립 영웅 아웅 산(1915-1947)도 일본과의 협력에 앞장선 인물의 하나였다. 1940년에 그는 식민당국의 수배령을 피해 중국으로 갔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갔고, 동남아 공격을 구상하고 있던 일본 당국의 우대를 받았다. 미얀마독립군(BIA, Burma Independence Army)의 모태 ‘30인 동지’는 아웅 산이 모집한 청년들이 일본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결성한 것이었다.


1942년 3월 일본의 미얀마 점령 후 아웅 산은 미얀마방위군(BDA, Burma Defense Army)으로 이름을 바꾼 군대를 지휘하며 일본군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다가 1943년 8월 미얀마가 형식적 독립을 취하자 국방장관으로 입각해서 이번에는 미얀마국민군(BNA, Burma National Army)으로 이름을 바꾼 군대를 계속 지휘했다. 그러다가 1945년 3월 27일 국민군을 이끌고 일본 통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3월 27일은 미얀마에서 ‘저항의 날’로 기념되다가 군사정권 하에서 ‘국군의 날’로 바뀌었다.


아웅 산은 1947년 1월 애틀리 영국 수상과 1년 내에 미얀마를 독립시킨다는 협정을 맺고 건국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가 반년 후 암살당했다. 7월 19일에 그의 정적 우 사우가 보낸 무장테러단이 과도행정부 회의장에 난입해 여섯 명의 각료와 함께 아웅 산을 살해했다. 우 사우는 후에 재판을 거쳐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영국인들의 획책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영국군 중견장교 여러 명이 연루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아웅 산 암살의 진상 중 완전히 밝혀지지 못한 것도 있을 수 있다. 다만 분명한 사실로서 유의할 것은 일본, 영국, 미얀마 민족주의의 3각 관계 중에서 빚어진 깊은 갈등이 암살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아웅 산이 일본 지배에 협력하고 있던 3년 동안 미얀마 북부 지역은 대동아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현장이었다. 수많은 영국군, 인도군, 중국군, 미군 장병들이 그 지역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미얀마 민족세력 내에는 많은 갈등이 쌓여 있었고, 아웅 산은 많은 사람의 원한을 사고 있던 사람이었다.


인도의 민족주의 지도자 중에도 일본과 협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수브하스 찬드라 보세(1897-1945?)가 그런 사람의 하나였다. 보세는 간디의 무저항운동에 반대하며 인도의 즉시 독립을 요구하고 무력투쟁을 제창한 사람이었다. 열한 번이나 감옥에 드나드는 틈틈이 콜카타 시장도 지내고 국민의회 의장도 지낸 그의 어록 중 제일 유명한 말이 이것이다. “당신의 피를 주시오. 그러면 자유를 드리겠소.”


1941년 초 영국 경찰의 감시를 피해 콜카타를 떠난 보세는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소련으로 갔다. 공산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영국과 사이가 나쁜 소련이 인도 해방에 나서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소련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소련 주재 독일 대사의 도움을 받아 독일로 갔다. 나치 지도부는 보세의 이용가치를 인정하고 영국군 포로 중 인도인 3천 명으로 ‘인도인 부대’를 만들도록 도와줬다. 보세는 이 부대를 앞세운 독일군이 인도로 진격해 주기를 바랐지만, 그것이 헛된 꿈이며 독일인들은 자신의 선전가치만을 이용하고 있음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1943년 초 독일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1942년 여름부터 인도 침공을 노리고 있던 일본군에게 보세는 대단히 큰 가치를 가진 인물이었다. 보세 역시 일본군의 도움으로 인도 ‘해방’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일본군은 싱가포르 등지에서 많은 인도인 포로를 확보하고 있었고 민족 지도자로서 보세의 명망은 포로들의 열렬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일본군 점령지역의 인도인 주민들도 보세가 만드는 아자드 힌드 파우지(INA, Indian National Army)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자드 힌드 군대는 8만5천 명의 병력까지 조직이 되었고 아자드 힌드(자유 인도) 임시정부도 세워져 추축국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아자드 힌드 군대의 국내 진입은 일본군이 점령한 벵골 만의 섬들과 동북부 국경지대에 그쳤다. 1944년 3월에서 6월에 걸친 일본군의 인도 공격전에 참가한 아자드 힌드 군대는 영국군의 지휘를 받는 인도인 군대와 싸워야 했다. 그리고 이 공격전이 실패한 이후로는 다시 조국 해방의 희망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


종전 후 아자드 힌드 부대원 상당수가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아자드 힌드가 영국 측 선전처럼 일본의 괴뢰군이 아니라 인도 민족주의에 입각해 자발적으로 만든 군대였다는 사실이 이듬해 초 알려지면서 인도인의 반영 감정이 거세게 터져 나오기도 했다.


보세 자신은 영국인의 법정에 다시 서지 않았다. 당시 알려진 바로는 1945년 8월 18일에 그를 태우고 일본으로 가던 비행기가 타이페이 부근에서 추락했고, 화상으로 죽은 보세의 시신을 화장한 유골이 일본으로 옮겨져 어느 절에 안장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비행기 사고는 확인되지 않았다. 인도 정부는 1992년 죽은 사람에게 수여하는 바라트 라트나 훈장을 보세에게 수여했는데, 이 훈장이 후에 대법원 결정으로 취소되었다. 취소 이유는 보세의 사망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세의 사망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단이 구성되어 1999년부터 2005년까지 활동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1945년 8월 18일 타이페이 부근에서 소문과 같은 비행기 추락이 없었다는 사실만을 이 조사단은 확인했다.


지난 8월 15일자 <경향신문>에 소개된 양칠성이란 사람을 생각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150052215&code=940100 징용에 끌려가 포로감시원으로 일하다가 종전 후 게릴라전에 참여하고 네덜란드군에 붙잡혀 처형당한 전북 완주 출신의 30세 청년. 제2차 세계대전은 단순한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었고, 조선인의 전쟁 경험은 비교적 좁은 범위였다. 전쟁 후 새로운 세계 질서의 구축에 이런저런 위치에서 참여하는 민족들이 얼마나 다양한 배경과 과제를 갖고 있었는지 당시의 조선인들은 얼마만큼 파악하고 있었을까.


지금 시간이 2시 20분.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열어보니 지금은 열린다. 우선 한 숨 자고 65년 전의 식량 문제는 아침에 조사해 봐야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