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프레시안북스>에서 남부디리파드의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오창은의 리뷰를 보았다. 한 때 간디 추종자였다가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한 저자가 간디 노선을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에 입각한 것으로 비판한 책이라 한다. 그 책을 읽지 않았어도 리뷰를 보며 공산주의자의 관점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시각이라 생각했다.


이 책을 “충격적으로 읽었지만, 간디에 대한 근본적 사고 자체를 변화시킬 만큼의 전환을 경험하지는 못했다”는 비평자의 소감에도 공감이 간다. 나는 간디를 ‘성인’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완벽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약점을 가졌으면서 그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지극한 사람을 나는 ‘성인’으로 생각한다. 1997년 4월 11일자 <중앙일보>에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사탕을 먹지 말거라"


"이 아이의 사탕 먹는 버릇을 아무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이라면 아이가 들을 겁니다. 사탕 먹지 말라고 아이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이를 데리고 중년의 간디를 찾아온 어머니가 간절히 부탁했다.

아이의 눈을 그윽이 들여다보며 입을 뗄듯하던 간디가 눈길을 어머니에게 돌리고 말했다. "보름 후에 아이를 다시 데려오세요. 그때 말해 주겠습니다."

"저희는 먼 곳에 살기 때문에 보름씩 여기 머물기도 어렵고 보름 후에 다시 오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간디는 다시 한 번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또 말했다. "아무래도 보름 후라야 말해줄 수 있겠습니다."

할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돌아갔던 어머니가 보름 후 다시 찾아왔다. 간디는 아이의 눈을 한동안 그윽이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얘야, 사탕을 먹지 말거라." 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하고 고마워하며 어머니가 물었다. 왜 그 말씀을 보름 전에는 해주실 수 없었느냐고. 간디가 대답했다. "그때는 저도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간디는 인도의 예속상태가 영국의 욕심보다 인도의 도덕적 무기력에 근본원인을 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제창한 사티야그라하(비협조-불복종)운동은 압제자에 대한 저항에 앞서 인도인의 도덕성 함양 과업에 치중했다.

1931년 영국과의 협상에서도 간디는 인도인의 자치 권한 확대보다 소외계층 대책에만 주력해 민족주의 진영에 실망감을 주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천민층의 참정권 제한 방침에 항의해 옥중단식을 하는 등 인도 내부의 문제를 영국과의 관계보다 늘 앞세웠다.

성실한 도덕적 실천만이 진정한 인도 독립의 길임을 간디는 몸으로 보여주었다. 배타적 권리의 주장보다 인류에게 책임질 줄 아는 능력이 인도 독립의 열쇠라고 한 그의 가르침은 수미일관(首尾一貫)한 그의 실천으로 인해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청문회 증인들에게 호통치고 설교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보며 간디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마치 완전무결한 인간인 듯 증인들을 질타하는 그들이 증인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도덕성을 가졌다고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사탕 먹지 말라는 한 마디를 위해 스스로 가다듬기를 마지않는, 그런 지도자가 아쉽다.


이 글을 2009년 3월 4일자 <프레시안>에 올린 글에서 다시 써먹었다. [기사 표시] 어느 청와대 비서관이 독립기념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간디가 방직공업 확장에 반대한 일을 들먹이며 "(일제 때) 일부 독립운동 지도자가 이런 유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 우리의 근대화가 늦어졌다"는 소리를 했다는 소식에 열 받아서였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써먹고 있다.


이 글이 간디의 ‘지극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해서 간디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게 되는 것이다. 간디(1869-1948)는 청년기에서 중년기에 걸쳐(1893-1914) 남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 나탈에서 지내는 동안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간디의 정치의식은 만주국에서 최남선이 보여준 협력주의와 방불한 것이었다. 여러 방향에서 비판이 가능한 자세였다.


인도로 돌아온 후 민족 지도자로, 나아가 20세기 인류의 정신적 지도자로 간디가 성장함에 있어서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남부디리파드처럼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한 간디의 운동노선을 공산주의 관점에서 혁명의 방해자로 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오창은이 또한 거론하는 암베드카르처럼 신분 해방의 장애물로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간디가 인도인에게, 그리고 인류에게 베푼 큰 가르침은 이데올로기 차원의 것이 아니다. ‘지극한’ 자세로 정치운동 아닌 도덕운동을 일으킨 것이 그의 공로였다.


‘정치’라면 현실적인 것으로, ‘도덕’이라면 현실과 관계가 없거나 있더라도 멀리 있는 우활한 것으로 사람들은 흔히 생각한다. 나는 이런 관념을 현대사회의 병리적 현상으로 본다. 문명 발생 이래 도덕은 정치의 핵심이었다. 근세까지 내내 그랬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도덕이 정치의 핵심이라는 당시의 ‘상식’을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덕이 정치에서 경시되어 가는 당시의 풍조에 역설을 통해 경고를 발한 것이 <군주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역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상식’이 되어 있다.


정치는 물질과 정신으로 구성된다. 역사를 통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경제력과 군사력, 즉 물질적 요소가 정치에서 큰 역할을 맡아 왔다. 그러나 한편에 도덕성의 역할이 균형을 맞춰주고 있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경제력과 군사력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이 균형이 무너지고 정치가 물질적 측면에 치우쳐 매달리게 되었다.


계몽주의시대 이래 ‘보편적’ 원리가 정치이념을 지배하게 된 것이 그 뚜렷한 징표다. 보편적 원리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도덕적 가치의 구체적인 힘을 잃는 것이다. 이념에 봉사하기 위해 비도덕적 행위를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근대 세계에서 정치의 정신적 측면은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간디 못지않게 훌륭한 도덕적 자세를 갖춘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있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현실정치에서 소외되어 지내는 것이 근대 세계에서 정상적 현상이었다. 간디가 정치지도자로서 그만큼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 특히 인도와 영국의 정치 상황에 기인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해방공간의 조선인 중에도 간디만큼은 안 되더라도 실제 권력을 누린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한 도덕적 자세를 보여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좌절을 우리는 흔히 그들의 비현실성, 우활함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해방공간의 구체적인 사정을 들여다보며 그런 설명이 지나친 선입견에 묶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 중에는 나름대로 현실적인 비전을 제시하려 애쓴 이들이 있었다. 물질적 힘, 즉 돈과 주먹이 당시 세계에서도 예외적일 만큼 조선에서 큰 위력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양심적 지도자들의 도덕적 노력이 철저하게 소외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의 도덕적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의 선입견은 상당 부분 그 결과로서 빚어진 것일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안철수와 박원순의 등장에 환호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정치의 도덕적 측면을 재발견하는 데 큰 까닭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치에서 도덕적 측면이 지나치게 취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인은 정치인의 도덕성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선거판에서 병역 문제나 비리 문제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도덕의식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도덕성은 정치의 종속적 요소라는 관념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 살리기’ 같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구호 앞에서 맥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안철수와 박원순에게서 도덕성이 정치의 본질적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생각나는 얘기를 적는다는 게 좀 길어졌다. 65년 전 오늘 있었던 일 하나를 전한다. 이승만 저격미수 사건이다.


12일 아침 이승만은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청년단체 합동결성대회에 참석하려고 자동차로 돈암장을 떠나 창덕궁 뒤를 거쳐서 돈화문 앞 교차점 바로 (권농정 2번지)앞을 통과할 즈음(10시20분)에 동 12번지 부근 골목에 잠복하였던 괴한에게 4방의 권총저격을 받았다. 탄환은 자동차 뒷등 유리창 변두리에 4방 모두 맞았으나 차체를 뚫지 못하고 이 박사 외 5명의 동승자는 아무 피해가 없었다. 동승자의 말에 의하면 검은 양복 윗저고리에 감빛 바지를 입고 탈모에 머리를 기른 중키의 괴한 1명이 골목으로 달아나는 뒷모습을 보았을 뿐인데 급보에 접한 경찰진은 곧 출동하여 권농정 일대를 샅샅이 뒤지는 한편 용의자 수명을 구속하여 엄중히 취조 중이다.


◊ 한 목격자 담: 10시20분쯤 상점 속에 앉아 있는데 별안간에 총소리가 너덧 방 들리자 자동차 한 대가 상점 앞에서 정차하며 차속에서 권총을 든 사람 2명이 뛰어 달려가므로 같이 쫓아가 보니 권농정 12번지 골목 안에 중단발하고 검정학생복을 입은 23·4세 되어 보이는 청년 1명이 도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자동차에서 나온 사람은 권총에다가 총알을 재어 넣느라고 시간이 늦어서 범인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9월 13일자로 “자료 대한민국사”에 표시된 기사. 그런데 “한국근현대 신문자료”에서 찾은 <동아일보> 기사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괴한은 6명이나 되었다고 한다.”고 한 점이 두드러진다.)


지금의 율곡로로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빠져나온 지점, 종묘 서쪽 담 밖의 골목길 입구에서 벌어진 일인 모양이다. 위 기사만으로 납득이 안 되는 점이 있다. 범인을 쫓기 위해 목격자의 가게 앞에 세운 차가 이승만이 탄 차였을 수는 없다. 사건이 일어났으면 이승만은 최대한 빨리 현장을 벗어나야 하니까. 경호원이 탄 별도의 차였을 텐데, 일 터지고 나서 권총에 장전하느라 범인을 놓쳐? (13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이승만 일행은 차 한 대로 움직이고 있었고 별도의 수행 차량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나는 이 일을 이승만의 자작극으로 보는 것이다. 좌우합작이 대세인 상황에서 주목을 좀 끌어보려고. 그리고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에도 도움을 주려고. 이승만은 사건 직후 YMCA빌딩의 대한독립청년단 결단식에 참석해서 연설 중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한다. “지금 내가 이곳으로 오는 길에 어디서 딱딱 하는 소리가 나기에 길에 놀던 아이들이 딱총을 놓는 줄 알았더니 그것이 나를 향하여 권총을 쏜 모양이다. 그런데 생각하면 4발씩이나 총알을 발사했으면 나를 맞혀야 할 터인데 맞히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총을 쏜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인줄 믿는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9월 13일자)


9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이 저격이 계획범죄라는 정황 증거를 소개하고 15미터 거리에서 네 발의 탄환을 자동차 뒤쪽에 집중적으로 맞춘 것을 보면 능숙한 사수로 보인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그런데 차 안에 이승만 외에 비서 2인과 기사, 경호원이 타고 있었다 하고 별도의 수행 차량 이야기는 없다. 차 안에서 아무도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목격자가 봤다는 “권총을 든 2명”은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이승만의 비서가 장택상 경찰청장을 13일 방문했을 때 장택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직 범인을 체포하지는 못하였으나 범인의 단서는 잡혔다. 범인은 의외의 방면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자유신문> 1946년 9월 14일자 “이 박사 저격범 단서 포착”)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혐의자 11명 체포”를 보면 와룡정 파출소에 임시수사본부를 두고 일대 민가를 가가호호 수색한 끝에 봉익정 송산여관이 투숙 중인 한 전문학교 학생 등 11명의 “수상한 혐의자”를 종로서에 유치하고 엄중 조사 중이라 했다. 위의 <자유신문> 14일자 기사에 따르면 12일 중에 20여 명이 검거되었다가 그날 밤 모두 석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14일 새벽 유력한 용의자로 모 좌익정당원 김성도(23세, 가명)를 체포했다는 기사가 15일자 <동아일보>에 나왔고, 같은 신문 17일자에는 “벙어리 된 이 박사 저격혐의범”이란 기사에서 혐의자가 공산당원임을 밝혔다. 그러나 18일자에는 이 혐의자에게 도저히 뒤집어씌울 수 없었던지 “범인은 오리무중 - 이 박사 저격범은 누굴까” 하는 기사를 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