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조선의 만성적 식량난을 “풍년기근”이라고 당시 사람들은 말했다. 1945년의 쌀농사는 모처럼의 풍년이었고 일본으로의 강제반출도 없어졌다. 38선 이남의 쌀을 상당량 이북에 보내도 아무 문제없을 것 같았다. 이런 전망 위에 미군정은 1945년 10월 5일 “미곡 자유시장”을 일반고시 제1호로 발포했다.


주둔한 지 한 달이 안 되어 미곡시장 자유화를 서둘러 발포한 까닭이 무엇일까? 지주층을 대표하는 성향이 강한 조선인 고문단의 작용을 추측할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일반고시 제1호는 미군정의 가장 중대한 실책의 하나였다. 두 달도 안 되어(11월 19일) 미곡통제를 위한 일반고시 제6호를 발포해야 했고, 이듬해 1월 25일에는 미곡수집령을 법령 제45호로 발포해야 했다. 소련군과의 관계에도 이북으로 쌀을 보내지 못하는 사정이 큰 걸림돌이 되었다.


왜 예상 못한 식량난을 겪어야 했을까? 당시 사람들은 술과 떡 등 낭비 풍조, 일본으로의 밀수, 그리고 매점매석을 이유로 꼽았는데, 어느 것이 주된 이유였을지 판단하기 어렵다.


낭비 풍조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엄격한 의미에서 ‘낭비’라기보다 식민지시대의 극심한 소비 억제가 풀림으로써 쌀 소비량이 크게 늘어났을 것 같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식량난이 극심했던 사정으로 보아 밀수출의 동기도 충분하기는 한데, 미군의 개입 없이는 전체 식량사정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규모가 크게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46년 11월 5일 군정청 식량행정처장의 성명을 보면 이에 대한 의심이 파다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쌀을 외국으로 수출하였다는 낭설에 대하여서는 누차 군정당국이 부인하여 왔었는데 다시 5일 군정청식량행정처장 지용은은 거듭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명을 하고 외국으로 수출한 사실이 전연 없다고 자세히 밝히었다.

“최근 항간에는 쌀을 조선으로부터 일본이나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는 낭설이 있는데 이것은 전연 거짓말이며 이것은 미국에 대한 불신뢰감을 조장키 위한 기도에서 나온 중상입니다. 나는 이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해 본 결과 이것은 아무 근거 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 미군이 조선에 진주한 이래 쌀을 조선 이외의 지방으로 가져간 일은 정말 없습니다. (...) 조선곡류를 조선 외의 타지방으로 보낸다고 말하는 사람은 당신들에게 멀쩡한 거짓말하는 사람인 줄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1946년 10월 8일자)


잘못된 식량정책으로 많은 조선인, 특히 도시민들이 막심한 고생을 겪었고, 이것이 미군정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다. 식민지 말기 전쟁기에도 1인 1일 2.5홉이 배급의 표준이었는데 1946년 전반기 대부분을 통해 겨우 1홉이었고 그나마 제대로 배급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1946년 여름의 하곡 수집도 목표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렀고, 심한 홍수로 인해 쌀 수확도 전망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군정청은 식량정책을 엄중한 문제로 생각하고 1946년 8월 12일에 다음 미곡년도 미곡수집을 위한 식량규칙 제2호를 발포했다.


“1946년 12월 1일부터 1947년 8월 1일까지의 8개월간 조선인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곡수집에 관한 국가계획을 완비함”에 목적을 둔 식량규칙 제2호의 요점은 할당된 분량의 공출을 집행하는 데 있었다. 집행 대상은 자작농과 소작농이었다. 이에 대한 좌익의 대표적 반응을 9월 22일 민전 담화문에서 볼 수 있다.


민전에서는 식량대책으로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식량문제의 해결은 오직 북조선에서와 같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토지 없는 농민과 토지 적은 농민에게 토지를 분여하여 주는 무상몰수 무상분여의 토지개혁을 즉시 실시하고 식량의 수집과 배급을 즉시 인민의 손으로 넘기어 지주와 모리배들의 은닉 매점 집적을 철저히 숙청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식량문제의 당면정책도 오직 이러한 원칙적인 방법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남조선에서 이러한 원칙적 해결이 즉시 실시되기를 우리는 요구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22일자)


민전은 토지개혁을 통한 “원칙적 해결”을 주장했다. 그에 비해 우익에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주장을 내놓고 있었다. <동아일보>가 이례적으로 군정청 정책에 예리한 비판을 가한 8월 17일자 사설 “미곡수집령의 검토”에서부터 이 주장의 방향이 나타난다.


지난 13일 내 미곡연도에 비하여 미곡수집 계획을 확립하려는 중앙식량규칙 제2호를 발표한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에서는 뒤이어 곡 식량 집배에 관한 범위와 그 행정계통과 수속 및 그 직능 등을 규정한 미곡수집령을 발표하였다. (...) 미곡수집상 가장 중핵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표준가격은 후일 신문지상에 발표하기로 되었으나 대체로 이 규칙의 내용이라는 것은 전 일정시대의 소위 공출제도와 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할 것 이외에는 다만 준렬한 벌칙을 규정하였다는 것만이 주목될 뿐이다.

(...) 미곡수집의 일방적 강화는 실제에 있어서 결국 농민의 희생을 강요함과 다름이 없는 일이며 따라서 미곡수집에 있어서도 금 미곡년도에 체험하고 있음과 별다른 무엇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현금의 하곡수집상태가 이를 실증하는 일이다.


민주의원에서 8월 19일에, 그리고 한민당에서 8월 22일에 ‘식량대책안’을 내놓았는데, 거의 같은 내용이다. 그 가장 중요한 주장은 소작농이 지주에게 지불할 소작료만을 수집 대상으로 하자는 것이다. 예상 수확고 2천만 석 중 5백만 석을 점하는 소작료만을 수집해도 비농가 인구 6백만 명의 배급에 충분하니 그 밖의 쌀은 자유판매를 허용해도 된다는 것이다.


토지개혁을 시행하지 않는 한에서는 합리적 대책이었다고 생각된다. 소작농이 소작료를 지주가 아닌 관청에 납부하고 그 공출증을 전해 받은 지주가 ‘공정가격’에 따라 쌀값을 현금으로 받는다는 것은 지주층에 불리한 방안인데, 어떻게 지주 세력에 기반을 둔 한민당에서 이런 방안을 내놓았는지 어리둥절할 정도다. 쌀의 자유시장이 활발해지면 공정가격도 어느 정도 현실화될 것을 기대한 것일까?


아무튼 행정력도 부실한 상황에서 지나친 규제가 경찰의 횡포 등 온갖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현실에 비추어보면 규제를 최소화하려는 민주의원-한민당의 대책에는 바람직한 면이 분명히 있었다. 지나친 규제가 매점매석과 암시장을 부추기고 있었고, 경찰은 투기현상 방지보다 서민을 괴롭히는 데 힘을 쓰는 경향이 있었다.


식량규칙 제2호 발표 후 종래의 미곡수집령 폐지 방침이 알려지자 불과 십여 일 사이에 쌀값이 10퍼센트 가량 떨어졌다. 행정과 경찰의 규제가 쌀 품귀현상에 적지 않은 몫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奏效! 쌀길 트는 비상조치 - 춤추고 나오는 ‘쌀’ - 가격, 반입 철폐 소리에”

시세에 맞지 않는 38원의 쌀값과 반입 통제망에 걸려 근년에 없는 대풍작이면서도 지난 정월달부터 쌀 걱정을 하게 된 주요 도시의 인민들의 생활난은 지금 극도로 위기에 이르러 비명을 올리고 있다. 이리하여 군정 당국에서는 이 타개책으로 신곡이 나올 때까지는 종래의 미곡 통제령을 근근 일제 폐지하기로 되어 이 보도가 한번 신문에 발표되자 창고 속에 잠자던 쌀은 재빨리 속속 튀어 나오고 있다.

미곡통제법령이 근일 중에 발표되리라는 소식이 한 번 발표되자 (...) 이래서 이날 시세는 전일에 5백30원하던 것이 벌써 30원이 떨어져 5백원 이내로 보리 역시 30원이 떨어져 4백원 대까지 내렸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25일자)


천정을 모르고 올라만 가던 쌀값이 요사이 떨어져 가고 있다. 즉 신곡수집계획이 완성되기까지 자유판매로 된 것과 금년 신곡의 풍작을 예상한 농촌저장미의 다량의 시장진출과 아울러 하곡수집의 원만 등으로 5백2·30원 하던 쌀값이 28일 현재 450원대로 폭락되었다.

(<조선일보> 1946년 8월 30일자)


식량규칙 제2호라 해서 미곡 통제를 없앤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당시 시장 상황이 너무 굳어 있었기 때문에 앞 미곡년도의 통제령과 다음 미곡년도의 통제령 사이에 잠깐 풀어주는 정도의 조치였던 것 같다. 불과 십여 일 후 식량행정처에서 통제 계속을 발표하자 ‘1보 후퇴’했던 쌀값이 금세 ‘2보 전진’으로 돌아섰다.


중앙식량행정처에서는 11일 미곡의 불법매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경고를 발하였다.

“군정청의 허가 없이 미곡의 매도 매입 운반 축적 등은 8월 12일부로 발표된 중앙식량규칙 제2호에 의하여 금지되었다. 그리고 법령 제45호 77호 87호의 개정은 중앙식량규칙 제2호에 의한 정부 미곡통제 계속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금년가을의 미곡수집과 배급에 대한 군정청의 계획은 조선사람 정부에 대한 공평 정당한 식량배급을 확보함에 있다. 양미시장에서의 미곡매매를 하는 사람은 매국적 범죄행위자로 누구든지 발각되는 대로 법적 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12일자)


일시 떨어지는 듯하던 시중의 쌀값이 다시 뛰어올라 불과 일주일간 내외에 백원가량이 올라 식량난으로 곤란중인 시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터인데, 이같이 오른 것은 그동안 지방에서 소량으로 들여오던 쌀을 못 들여오게 한다고 지난 11일 중앙식량행정처에서 발표한 때문에 시중의 쌀이 자취를 감추게 된 탓인데 이에 대하여 14일 경성지구 물가감찰부에서는 상부로부터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쌀 문제는 일체 간섭치 않을 방침이라고 성명한 바 있어 아직은 지방에서 다소간 식량을 가져온다든가 시중에서 매매하는 문제는 완전히 묵인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미곡사정의 실제로 보아도 군정당국으로서 현재 배급되는 식량 이상의 배급은 신곡이 나오기까지 있을 수 없다고 하므로 농촌에서 가지고 있는 적은 양의 쌀이라도 될 수 있는 대로 들여오도록 하여 부족한 식량을 어느 정도로 보급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이상 지금까지 묵은 쌀을 지방에서 들고 오거나 지고 오는 정도의 것은 당연히 묵인되어야 할 정세에 있는 터로 경찰이며 기타 당국의 의향도 다 같은 태도인 것은 작금의 폭등한 쌀 사정에 관하여 크게 참고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15일)


생필품 제1호인 쌀값이 군정청 방침에 따라 이렇게 널을 뛰니 투기꾼들은 살 맛 났을 것이다. 군정청 방침을 예측할 수 있던 사람들은 앉아서 떼돈 벌었을 것이다. 결국 부담은 민중에게 돌아오는 것인데, 민중의 지팡이는 그러지 않아도 힘든 민중을 더 힘들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짓을 다하고 있었다.


19일 아침 서울역내에서는 한두 말 혹은 대여섯 말을 지고 들고 오는 승객의 쌀을 모조리 취체하는 경관이 빼앗았다.

(<조선일보> 1946년 9월 20일자)


경찰청에서는 19일부터 일제히 쌀 취체를 개시하였는데 이에 관한 장 경무총감은 다음과 같은 단호한 태도로 임할 것을 언명하였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쌀값은 아니 내려가고 모리배의 도량은 더욱 심하여 가고 대중생활은 도탄에 빠져 있다. 남조선의 인민은 사선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왕 이렇게 해도 쌀이 대중의 손에 들어오기는 틀린 일이니 경찰로서는 쌀 가지고 있는 개인의 집이고 모리배 창고이고 간에 무엇이든 불문하고 철저히 조사하여 적발되는 대로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돈에만 눈이 어두운 그런 놈들에게는 추호의 용서도 동정도 있을 수 없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20일자)


쌀 취체를 개시한 19일부터 20일 오전까지 경찰청에서 압수한 쌀은 잡곡을 합하여 약 3백 가마니나 되는데 19일 오전부터는 마포 용산 방면으로 전력을 주력하여 은닉미의 적발에 착수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21일자)


자가용으로 한두 말씩 지고 오는 쌀까지 경찰관이 압수하고 있는 사실에 관하여 제1경무총감 장택상은 21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모리성 있는 쌀만 압수할 뿐이지 그 외 것은 간섭치 않는다. 경찰관이 정거장에서 압수하고 있는 것은 경기도의 부탁으로 운수경찰이 협력하였을 뿐이다.”

(<조선일보> 1946년 9월 22일자)


21일자 <서울신문> 기사에서 압수 미곡이 모두 약 3백 가마니라 한 것을 보면 소량 휴대품이 분명하다. 19일에 장택상이 “무엇이든 불문하고 철저히 조사하여” 적발한다고 한 것은 소량 휴대도 취체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런데 21일에 한 말은 다르다. 모리성 있는 쌀만 압수한다고 우기면서 정거장에서 있었던 취체는 “경기도의 부탁”에 협력하였을 뿐이라고 둘러대고 있다.


대구항쟁이 다가오고 있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 296쪽에 “1946년 10월 1일에 발생한 대구항쟁은 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1923년생으로 전평활동을 하다가 대구항쟁에 참여한 이일재도 이렇게 회고했다.


배가 얼마나 고팠으면 이런 일도 있어요. 46년 초부터 콜레라가 만연했을 때, 환자가 수용소 가면 다 죽어버리는 거예요. 수용소라도 약을 안 주고 격리 수용하는 방법 외에 도리가 없었어요. 그런데 배고파서 드러누워 있는 할머니-할아버지를 환자로 오인해서 수용소에 보내는 사례도 있었죠. 콜레라에 걸려서 누워 있는 사람이나 굶어서 누워 있는 사람이나 구별하지 않았던 거죠. (...)

식량 얘기 하나만 더 하지요. 1946년 9월 29-30일, 초하루-초이튿날 ‘기아행진’을 했어요. 대구 중심지들은 일본 놈들이 살았던 곳이고, 비산동-내당동-남산동-대명동 일대 변두리 사람들이 기아행진을 벌였어요. 백 명, 이백 명 무리지어 시청이나 도청에 쌀을 달라고 항의하러 갔던 겁니다.

시장실을 찾아가 왜 쌀을 안 주느냐고 따졌더니 시장이란 작자가 한다는 소리가 정말 어이가 없었어요.

“살림한다는 계집들이 먹을 양식도 준비 안 해놓고 뭘 하느냐?”

이건 실언도 아니고 폭언이지, 폭언. 굶주린 사람들에게 그런 소릴 하다니! 그러고는 일본 놈들이 놓고 간 세탁비누 두 개씩 가져가라는 거야. 더욱 화가 치민 여자들이 말하더군요.

“느그 집에는 세탁비누 묵고 사나?”

농촌의 빈민들이야 초근목피라도 있다지만 도시 빈민들은 아무것도 없으니 쌀 달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당시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는데, 전부 륙색을 메고 다니는 거예요. 열차를 타고 대전에 내려 호남에 가서 뭐든지 가지고 가 쌀과 바꾸는 거죠. 쌀을 구해오는 게 모든 가족들의 일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해요.

(문제안 등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171-172쪽)


 

1946. 9. 23 / 9월 총파업과 공산당의 ‘신전술’

1946년 9월 23일 정오 부산 철도공장의 파업을 개시로 하여 며칠 사이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에 ‘9-23 총파업’이라 한다. 이튿날 경성 철도공장이 뒤를 따르면서 비상사태가 빚어졌다.

운수동맥의 심장인 경성철도공장인 24일 오전 9시부터 완전히 그 기능이 끊어졌다. 즉 지난 17일 최저생활이 보장을 위하여 여섯 가지 요구사항을 운수부장과 철도국장에게 제출한 경성철도공장 3천여 명의 종업원들은 21일까지 그 건의에 대한 회답을 요구하는 동시에 만일 기한까지 회답이 없을 때는 최후적 행동으로 나간다는 경고를 했었는데 기일이 지나도록 하등 회답이 없으므로 드디어 24일 상오 아홉시 종업원 대표들은 운수부장과 철도국장을 직접 면회하고 요구조건을 관철할 때까지 파업을 단행한다는 정식선언을 하고 전면적 파업에 이르렀는데 이에 앞서 부산 철도공장 종업원 약 2천명도 23일 정오를 기하여 경성공장과 같은 요구조건으로 파업을 개시한 후 운수부장대리의 특별방송까지 있었던 것이다. 한편 24일 종업원으로부터 파업단행 선언을 받은 운수부장 코넬슨은 곧 운수부 과장이상 간부를 회의실에 모아 놓고 동 열시 반부터 이 문제에 대한 구수협의를 하고 있는데 회의는 열두시가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조선일보> 1946년 9월 25일자)

요구사항 6개항은 (1) 쌀 배급(노동자는 4合 가족은 3合), (2) 일급제 반대, (3)임금 인상, (4) 해고 감원 반대, (5) 급식을 종전과 같이 계속할 것, (6)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할 것이었다. (4)번 이외의 요구는 모두 점진적 노력의 대상이었다.

해고 감원 문제가 얼마나 긴박한 상황이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긴박한 상황이었다면 점진적 노력을 요하는 다른 문제들 틈에 끼워 내놓을 것이 아니라 그것 하나만을 걸고 투쟁에 나서야 했을 것 같다. 이 총파업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 요구 내용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전평이 주도한 이 전국적 파업운동은 7월 이후 공산당이 채택한 신전술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신전술이란 그 동안 미군정에 대한 직접 비난이나 항거를 삼가던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 저항에 나선 것이다. 물론 공산당의 의도만으로 거대한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파업 확산을 위한 조건은 해방 이후 축적되어 온 것이었다.

1945년 11월 5일자 일기에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 배경을 설명한 것처럼, 일본인의 철수를 계기로 조선 노동자들은 새로운 권리의식과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많은 공장에서 자치위원회(직원위원회 또는 노동자위원회) 형태로 운영권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미군정은 자치위원회의 권한과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인 경영자들을 대신할 조선인 경영자들을 임명했다. 이 조선인 경영자들은 종래의 일본인 경영자들에 비해 책임관계가 분명치 않은 조건에 놓였고, 그 조건을 사리를 위해 악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양심적인 경영자라도 미군정의 불안정한 경제 정책 아래 정도를 지키기 어려웠다. 1945년 8월 9일자 일기에 동양방직 사태를 적었는데, 노동 분규가 진행되는 가운데 회사 경영진이 대량의 쌀을 감추고 있던 일이 드러났다. 폭리를 위한 매점매석으로 비판을 받았으나 검찰은 결국 종업원의 생계를 위한 것으로 인정, 가벼운 처분만을 내렸다.

그런데 동양방직 사태의 진행 중에 노동운동의 양상과 미군정 노동정책의 변화 기류가 비쳐 보인다. 6월 중순에는 군정청 노동국 당국자들이 노사간 중재에서 전평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 이 회사의 간부와 경비원으로 ‘신우회’란 조직이 만들어져 노동자들과 충돌하는 일이 거듭 일어나더니, 8월 초에는 인천공장 노동자들이 전평을 탈퇴하고 대한노총에 가입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10일자)

6월에는 전평도 유화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 상황을 서중석은 이렇게 서술했다.

전평은 1946년 6월에 들어 한층 유화적인 지령을 내려보냈다. 6월 13일부 전평 서명의 지령 제24호 “일상노조운동과 군정협력에 관한 건” 등 몇 개의 지령은 8월에 들어와 실로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이 지령들은 파업을 가능한 한 억제할 것을 지시하였다. 6월 17일부 전평 서기국 서명의 특별지령 “조합활동 특히 직장 내 활동에 관하여”에서는 “파업 태업 등의 항목에 관하여”라는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당면의 조선현실은 경제부흥에 의한 자주경제의 수립이 긴급히 요청되고 있으며, 우리 노동자의 생활향상도 경제부흥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우리는 경제부흥과 노동조건 개선을 병진시키는 투쟁을 전개시켜야 한다. 산업을 고의로 파괴하려는 기업가와 물가자재를 방매하여 폭리를 취하려는 모리배가 있는 타방, 태업, 파업을 구실로 노조를 파괴하려는 여러 가지 음모가 있고, 기타 여러 가지 정치적 관계로 보아 파업, 태업 등의 전술은 될 수 있는 대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승리를 위하여는 파업이 절대 필요하다 할지라도 이를 분산적으로 무계획하게 기분적으로 단행한다면 승리할 수 없는 것이니, 금후에 있어서의 파업은 상부기관의 지도 없이 파업해서는 안 된다.”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446-447쪽)

1946년 6월에서 8월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가. 우익에서 전평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대한노총은 4월 8일 설립된 후 노동계에서 단연 열세에 처해 있었다. 1918년생으로 조선차량에 근무하면서 대한노총 설립에 참여한 김명식은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군정에서 노동조합 말고 다른 단체는 공장에 들어갈 수 없도록 했기 때문에 우리도 노동조합을 만든 거죠. 대한노총이 처음 생겼을 때 공장 직원 1,700명 가운데 74명만 대한노총에 속해 있었고, 370명 정도가 전평에 소속되어 있었어요. 전평에서 임금 인상을 주장하니까 그쪽에 사람들이 많이 몰린 거죠. (<8-15의 기억>(문제안 외 지음, 한길사 펴냄) 261쪽)

군정청의 노동정책 담당자들은 노동조합의 발전을 유도하기 위해 전평을 존중하는 정책을 제안했다. 그러나 5월 이후 미군정 고위층이 정판사사건 등 공산당 탄압정책을 취하면서 공산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전평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태도를 차츰 거두게 되었다. 그런 상황을 이용해 우익에서 만든 대한노총이 세력을 확장한 것이었다. 동양방직의 ‘신우회’와 같은 구사대 성격의 조직이 대한노총에서 일반적 형태였을 것 같다.

김명식의 회고에서 전평이 임금 인상을 주장했다고 한 것은 대한노총에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겠다. 전평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조직인 반면, 대한노총은 노동운동에 대항해 사용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었다. 1929년생의 유병화는 해방 직후 대구 철도노조 결성에 참여한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다가 8월말 대구 철도노조를 결성하게 되었어요. 지금 시민회관을 일제 시대에는 공회당이라고 했는데, 거기 소강당에서 10명 가까이 모여서 결성식을 가졌죠. 그 다음부터 내가 철도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했어요.

“노동자들이 한 달 봉급 가지고 한 달을 못 먹고 살면 안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해방 후에 한국의 경제 사정이라는 게 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 정부는 거기에 대한 대책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우리는 먹고 살 수 있는 조건을 찾기 위해서는 노조를 만들어 투쟁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던 거죠. (8-15의 기억> 250쪽)

전평은 이런 자연발생적 노조들을 기반으로 조직된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권리 확대에 앞서 회사를 살려내기 위해서라도 조직활동을 필요로 했다. 식민지시대에는 착취자의 역할이라도 확실한 역할을 가진 총독부가 있었고 경영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만한 책임감이나마 가진 존재도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회사의 장래를 위해 노동자가 나서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당시의 노동운동에서는 권리의식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였다. 위에 서중석이 인용한 전평 문건의 “경제부흥과 노동조건 개선을 병진시키는 투쟁”이란 대목도 책임의식을 중시하던 당시 노동운동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8월 중순 총파업 계획을 시작할 무렵 전평의 노선은 투쟁일변도로 돌아서 있었다. 바뀐 방향을 서중석은 이렇게 설명했다.

7월 하순 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함에 따라, 이것에 입각해서 전평 상무위원회에서는 보다 조직적이며 집단적인 대중적 파업 투쟁계획을 세웠고, 그 시기는 10월로 잡았다고 한다. 10월은 추수기여서 농민들의 추수투쟁과 연결하여 노농동맹을 강화할 수 있고, 미군정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로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평 상무위원회의 파업계획은 공산당 지도부가 질질 끌어 8월 중순에 가서야 파업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내려 전평은 그때서야 갑자기 파업준비에 착수했다.

전평의 신전술 채택은 8월 23일 “현하에 있어서의 스트라이크전략의 문제 - 조선노동운동 당면의 제 문제, 특히 2, 3의 우익적 편향에 대하여”라는 노선전환의 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장문의 문서는 앞의 파업과 태업 전술을 우익적 편향으로 비판하고, “태업, 파업, 시위운동 이외에 어떠한 투쟁형태가 있단 말이냐! 그리고 또한 그와 같은 운동을 직장 내에서 하지 않고 어데서 해야 되느냐!”라고 반문하였다. 이 문서는 파업을 회피하는 것은 무장해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노동자는 투쟁을 통해서 투쟁의 과정에서 교육되고 훈련되고 성장하는 것이며, 이상적인 상당한 준비가 없었다 할지라도 투쟁을 전개할 때에는 소여의 조건 하에서는 전력을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문서는 판가리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에서 나아가, “실로 스트라이크는 그 전부가 ‘판가리싸움’이며 조건 여하에 의해서는 ‘결정적 승리를 전취’할 수도 있으며... 승리냐, 패배냐 하는 판가리싸움은 ‘타협’을 전제로 하지 않고 적을 ‘굴복’시킬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역설하였다.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447-448쪽)

“판가리싸움”이란 말로 모험주의 성향을 노골적으로 밝힌 투쟁지상주의 노선이었다. 이런 노선 전환을 불러올 만한 요소가 미군정의 경제-노동 정책의 그 사이 변화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전격적이고 전면적인 전환을 가져온 것은 미군정의 일반 정책 변화가 아니라 공산당의 입장이었다. 공산당의 신전술은 미군정의 공산당 고립 정책에 대항해 박헌영 중심 공산당 주류 세력이 좌익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총파업이 빚어낸 경색 국면은 좌우합작의 기반을 위축시켰을 뿐 아니라 좌익 합당에서 박헌영 반대파의 손발을 묶는 효과를 가져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