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이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 279-281쪽에서 ‘교육출세론’을 해방공간의 중요한 현상의 하나로 꼽은 것은 적절한 지적이다. 사실 교육출세론은 과거제가 국가체제의 주축이던 왕조시대부터 조선 사회에 깔려 있던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일본 식민지배가 시작하면서 한 차례 틀이 바뀌었던 것이 해방을 계기로 또 한 차례 폭발한 것이다.


일본 식민지배자들은 새로 도입된 근대교육을 협력자집단의 형성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종래 조선왕조의 지배계급 중에는 이민족 통치에 저항하는 기류가 있었다. 다른 대안이 없는데도 식민지배자들이 제공하는 일체의 학교제도를 거부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일본인 통치에 순응하는 황민교육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자들과 선교사들이 세운 적은 수의 학교들이 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그런 학교들에 대해서도 황민교육의 요구가 갈수록 강해졌다.)


식민지 조선에서 교육의 기회는 근대사회답지 않게 매우 좁았다. 고등교육일수록 더했다. 고급 직종의 인력을 일본인으로 채우는 식민정책이 1940년대 들어 인력 부족이 심각해질 때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전문학교 이상은 일본에 가서 수학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유일한 정규대학 경성제대의 조선인 졸업생은 해방 때까지 3백여 명에 불과했다.


교육의 기회가 좁고 비용을 본인이 부담하는 제도 아래 교육의 길은 체제 순응의 길이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 사회의식을 키워 이민족 지배나 군국주의 체제에 저항하러 나선 사람은 극소수였다. 굳이 반민족적 의식을 가지지 않은 학부형들도 자식의 출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라도 교육을 시켰고, 대부분 자식들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체제에 순응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았다. 비록 제일 높은 자리들은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희소가치 때문에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교육제도는 식민지 지배체제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사람들의 생존 의지와 출세욕이 그 미끼가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해방으로 인해 고학력자의 수요가 폭증했다.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수만 개의 자리가 갑자기 비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주재하던 기관의 하위직에 있다가 벼락출세를 한 사람들 중에는 충북 봉양의 금융조합 이사 김성칠도 있었다.


유재홍 씨의 복명에 의하면 내가 연합회 본부 지도과 참사가 되었으니 얼른 부임하라는 기별이 자꾸 지부로 오나 전신전화가 통치 않기 때문에 연락을 하지 못했으니 곧 상경하라는 의미의 말과 또 지부장 사무취급으로 신임되었다는 조병순 씨의 편지가 왔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금명일 중으로 서울 가서 취임을 거절하기로 했다.

이건 내가 도도해서 참사에의 승진을 미타하게 여겨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리고 또 반드시 안일의 길을 취해서만도 아니다. 나의 나아갈 길은 따로이 있고 그 길을 똑바로 가기 위해선 지도과 참사가 부적임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당분간 이 조합에 그냥 눌러 있으면 좋겠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 1945년 12월 3일)


그러나 그는 이틀 후 연합회에 부임했다. 지도과 참사가 아니라 과장이었다. 금융조합 연합회란 것이 농협중앙회 같은 조직이었고, 이사회 밑에 4-5개 과가 있었다. 지방의 단위조합 조합장이 국장급으로 날아 오른 셈이다.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하상용 씨를 통해서 신(新) 회장에게서 사령을 받았다. 구(舊) 회장 이하 일인(日人) 간부 환시 하에서 다시 미인(米人)의 사령을 받게 되니 얼굴에 모닥불을 퍼붓는 것 같다. 저놈들이 옛날은 우리들에게 와서 머리를 굽신거리더니 이제는 또 미인의 앞에 같은 태도로 나갈 것이다 하고 일인들이 속으로 비웃을 걸 생각하니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자꾸만 후회스럽다. (<역사 앞에서> 1945년 12월 5일)

오늘 처음으로 과장 자리에 앉아서 일을 보았다. 이 변란통을 이용해서 좀 더 좋은 자리를 하나 얻어둘 양으로 분주하는 여러 사람의 틈에 나도 한몫 끼이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혼자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역사 앞에서> 1945년 12월 6일)


그의 옆에서 분주한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동료 과장으로 그의 일기에 나타나는 사람으로 이재형과 김주인이 있는데, 1914년생의 이재형은 한 살 위의 김성칠과 매우 편안한 사이로 여러 번 나타난다. 한편 1916년생의 김주인은 김성칠 아래 지도과 참사로 들어왔다가 몇 달 후 교무과가 만들어져 김성칠이 옮기면서 지도과장 자리를 넘겨받았다. 김성칠보다 자기 근무 경력이 더 긴데 왜 아랫자리에 들어가야 하느냐고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밤에는 이재형 군이 놀러 와서 김주인 군이 과장이 못되어서 안달이란 말을 전하고 나와 주인 군의 처지가 거꾸로 되었다면 어떨까 하는 말을 하기에 그저 웃고 말았으나 내가 만일 미타한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면 기어이 취임을 거절했을 것이요, 일단 승낙하고 취임한 이상은 제 소임을 성실히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역사 앞에서> 1945년 12월 20일)


김성칠이 12월 3일자 일기에서 “나의 나아갈 길”이 따로 있다고 한 것은 학문과 교육의 길이었다. 그런데 주변의 권유에 따라 금융조합 연합회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으면서는 자기 뜻을 금융조합에서도 펼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연합회에 교무과를 만들기로 한 데는 그의 의지가 작용한 것 같다. 그가 대구에 출장 갔을 때 금융조합에 무슨 교무과가 필요하냐고 그에게 따진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밤에 화월식당에서 김의균 지사 이하 각 부장을 초대해서 연회가 있었다. 농상부장 서만달 씨가 여러 사람을 붙들어서 함부로 욕설을 퍼부어도 모두 감수하므로 부쩍 기수가 나서 종말엔 나를 대하여 이 자식 금융조합에 무슨 교무과가 필요하냐고 트집을 걸기에 너 같은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받아주었더니 노발대발해서 덤비었다. (<역사 앞에서> 1946년 2월 6일)


1월 30일에 김성칠이 법전 고병국 교장으로부터 역사학 교수로 초빙받았으나 사양하고 시간강사로만 나가기로 했다는 것을 보면 그 시점까지는 금융조합에서 계속 일할 생각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3월 19일 일기에는 돈암동에 집을 샀다는 말이 나온다. ‘문화주택’인 원효로의 금융조합 사택을 떠날 결심을 그 사이에 한 것이다. 그 날 일기에는 금융조합을 떠나는 동기도 밝혀져 있다.


장덕수 씨 등 민주의원 측이 하상용, 임흥식 씨 등을 초청해서 공작한 결과 과장회의에서 중역들이 우익과 결탁하기를 선포하였을 때 나는 그 비(非)를 지적하고 두 시간 동안 고군분투하였다. 다시 3월 9일 오후 인민비판사 주최로 좌익편에서 금융조합 문제를 논의하고 민전, 전평, 전농, 해방일보 등 좌익의 논객들이 금융조합에 공격의 일제 화살을 보내왔을 때 나는 그들의 공식주의적인 관념론을 상대로 세 시간 동안 항변하였다.

그러나 금융조합의 우익 편향은 이제 결정적인 사실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나는 이 기관을 물러나야겠다. 나는 현하의 조선에 있어서 좌익의 경거망동을 싫어한다. 그러나 우익의 혼란도 보기 숭하다. 어느 편으로든 나 자신이 규정받는 걸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한 기관에 간부의 일원으로 몸을 담아두는 것도 생각할 문제이다.


도대체 금융조합 같은 기관이 우익과 결탁한다느니 우익으로 편향한다느니 하는 것이 어떤 것이었을까? 대출금을 우익에만 빌려줘? 우익의 예금만 받아? 구체적으로 이해가 안 가지만, 아무튼 우익에서는 주요 기관 운영자들을 포섭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김성칠은 교무과장으로서 조합원 교육사업에 뜻이 있었던 모양인데, 운영진이 우익으로 간판 들고 나서면 그 사업이 제대로 될 수가 없다. 2월 18일 법전 개강 전에 결심을 할 것을, 하고 한탄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할 수 없이 3월 하순에 금융조합을 그만둔 후 경성대학에 조수(지금의 조교) 자리를 얻어 학과 사무실을 연구실로 쓰며 1년간 지내다가 이듬해 조교수에 취임했다.(경성대학의 공식 명칭은 1945년 10월 16일 서울대학으로 바뀌었지만, 국립서울대학교가 되기 전까지는 당시에도 이후에도 ‘경성대학’으로 통상 불렸다.)


그러나 학교도 좌우대립의 회오리에 말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4월 17일 일기에 그는 경성대학 예과 학생들의 동맹휴학 반대 성명을 반기는 마음을 적었다.


대학 예과 학생들이 근래 학원의 유행병처럼 되어 있는 동맹휴학을 반대하는 성명이 신문지상에 발표되었다.

정치모략의 학원 침입을 반대하고 학원의 순수와 자유를 지키려는 것이며, 동맹휴학은 최후의 수단임을 재확인하고 연학에 전심해서 국가재건에 공헌하겠다는 것이며, 태만 정신을 맹휴의 미명하에 호도하려는 그릇된 생각을 배격한다는 것이며, 어느 것이나 다 현하 학원의 불안에 대처할 학도의 노선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이러한 청년학도들이 있으매 믿음직하다. 조선의 앞길에 빛을 그릴 수 있다.


학원 소요는 4월 들어 크게 늘어났다. 3월 초 발포된 군정청 법령 제6호에 의거 법정학교 폐교 결정이 나오면서부터 좌익에 호응하는 학생들의 시위와 동맹휴학이 잦아졌다. 이에 대한 미군정의 황당할 정도로 무단적인 대응책이 7월 13일 발표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이었다. 시설이나 예산의 획기적 투자도 없이 통제의 편의만을 노린 이 조치에 대한 반발은 좌익의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학생만이 아니라 교수들까지 자리를 박차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군정청은 이 계획을 강행, 8월 22일 국립서울대 설립에 관한 법령(제102호)을 공포했고, 9월 13일까지 학생 등록을 요구했는데 대다수 학생들이 이를 보이콧했다.


국립종합서울대학령 실시에 있어서 그동안 각 관계학교와 학생층에서는 맹렬한 반대로써 대학령의 철폐를 강경히 요구하고 있는데 신입생 재학생을 불문하고 금후 학생으로서 자격을 가지려면 신입생은 11일까지 재학생은 13일까지 학생등록(즉 입학수속)을 해야 한다는 법령으로 말미암아 신입생 중에는 등록거부의 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등록을 감행한 학생도 있어 등록기일까지의 학생동향이 자못 주목을 끌고 있다.

대체로 12일까지의 학생 동향을 살펴보면 신입생 3천8백60명 중 약 7백명이 등록을 하였다 하며 재학생은 12일부터 13일까지가 등록기일이나 12일까지는 등록한 학생이 한 사람도 없다 한다. 그리고 학교별로 검토해 보면 법학대학(法專)과 의과대학(醫專)은 학생회에 등록을 전적으로 하기로 가결한 듯하며 대학예과와 공업대학(工專)도 대부분이 등록을 하기로 가결한 모양이다.

그런데 끝까지 등록을 하지 않은 학생에 대한 조치와 결원수를 학교당국으로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총장 앤스테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등록기일은 13일까지이나 어떠한 사정으로 등록할 수 없었던 학생의 편의를 도모하여 14일까지는 등록을 접수하겠다. 그리고 등록을 하지 않은 학생 수의 결원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자격자를 다시 모집할 터인데 모집 방법에 있어서는 금일부터 원서를 접수하여 접수 순서대로 개별적으로 전형하겠다.

그러나 입학된 학생으로서 외부의 압박으로 인해서라든가 혹은 그밖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등록을 하지 못했다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등록기일 후라도 결원을 보충하기 전까지는 공평히 처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기일 안에 등록하기를 바란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6년 9월 13일자)


‘국대안 사태’는 학원 안에 그치지 않고 전 사회적 혼란의 큰 요소가 되었다. 군정청의 조치가 학문, 교육, 문화, 사회, 어느 면에서도 납득이 되지 않는 무단적인 것이어서 정치적 편향성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반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좌익의 선전과 조직활동에 좋은 소재가 된 것이었다. 이 상황을 전우용은 <현대인의 탄생>(이순 펴냄) 158쪽에 이렇게 설명했다.


좌익은 교수와 학생들의 불안과 불만을 ‘혁명적 정세’를 조성하는 데 이용하려 했다. 국대안이 발표된 직후부터 ‘국대안 반대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반대운동은 당장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들에게서 미래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들에게로, 나아가 대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로까지 확산되었다.

통합 대상 학교의 교수, 학생 절대 다수가 국대안에 반대했다. 전문대학 교수단연합회, 조선학술원, 문화단체 총연맹, 조선과학자협회, 과학기술자연맹 등 좌우익을 막론하고 경성대학 출신들이 주도하던 학술단체, 문화단체들이 잇따라 반대성명을 냈다.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비롯한 좌익 정치단체들도 국대안 반대에 합세했다.


국립서울대학교는 설립 후 1년간 정상적 학교 기능은 마비된 채 좌우대립의 격전지로 남아 있었다. 이를 계기로 서북청년회 등 우익세력의 학원 진입을 강준만은 중시했고,(<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 276-279쪽) 조선의 학술-교육계에서 관립학교 출신보다 기독교계 사립학교 출신과 영-미 유학파가 주도권을 쥐게 된 사실을 전우용은 중시했다.(<현대인의 탄생> 165-166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