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구호기구 운라(UNRRA)의 피오렐로 라가디아 총장이 기자회견에서 조선 구호문제를 언급했다.


운라 본부총장 라가디아는 신문기자 회견석상에서 조선에 대한 운라 구제사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재까지 조선에는 운라 구제품이 수송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조선을 일체로 취급하여 운라의 종사원 일반구제품 및 식량 등이 미소 양군 점령지구 내에 자유 교류될 것을 원하고 있으나 현재 상태는 이러한 조건이 구비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라가디아 성명은 제5차 운라대회 석상에서 소련 측 대표 훼노부가 타국가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토의되고 있으나 조선은 등한시되어 왔으며 오스트리아, 이태리 기타 국가에 운라 구제품이 수송되는 반면 조선은 차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일부에서는 보고 있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11일자)


1943년 11월 창설된 운라(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는 유엔 창설 후 그 기능의 상당부분이 유엔에 넘겨졌고 이름이 ‘UN’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유엔 산하기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운라의 이름의 ‘United Nations’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을 말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름대로 연합국 국민만을 구호 대상으로 활동하다가 1944년 말부터 추축국 외의 전쟁 피해자 전부를 대상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운라는 조선에 대해서도 구호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워싱턴 7일 AP발 합동] 운라 본부회장 라가디아는 조선에 관한 기근구제방책을 성명하였다. 운라의 조사사절단은 미소 양군의 초청에 의하여 조선 식량상태 조사와 운라의 금후 행동을 결정하기 위하여 운라조사사절단은 금주 내로 조선으로 향하여 출발할 것이다. 금년 1월에 운라는 조선 긴급구제를 위하여 100만 불을 朝鮮에 배정할 것을 승인하였던 것이다. 운라조사사절단은 조선에 대한 이 이상 필요한 요구를 조사할 것이며 또 이미 승인된 물자의 배당업무의 책임수행을 할 것이라 한다.

(<조선일보> 1946년 5월 8일자)


운라는 회원국으로부터 37억 달러의 기금을 모아(미국이 27억 달러) 집행했는데, 효율성에 대해 일부 비판이 있을 뿐, 공정성을 널리 인정받았고(장개석 정부의 횡령을 제외하고), 여러 곳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큰 지원을 받은 나라로 중국(5.18억 달러), 폴란드(4.78억 달러), 이탈리아(4.18억 달러), 유고슬라비아(4.16억 달러) 등이 꼽힌다.


운라의 사업 규모에 비추어 보아 조선에 이미 배정되었다는 1백만 달러는 ‘착수금’인 셈이고, 조사 후 본 예산을 편성할 계획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운라 조사단은 소련군 점령지역까지 조사를 마쳤다.(<서울신문> 1946년 7월 20일자) 그런데 8월 초순의 운라 대회에서 조선 지원 계획이 제출되지 않은 데 운라 소련 대표가 항의했고, 미국인 총장은 조선에 물자 “자유 교류”의 조건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명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조선에 대한 미국의 신용차관 얘기가 나왔다. 일본에 3천만 달러, 조선에 2천5백만 달러의 크레디트를 설정해 미군 잉여물자를 매도한다는 것이었다.


[워싱턴 9일발 AP합동]미 정부당국 언명에 의하면 미 정부는 5,500만 불의 크레딧트를 조선과 일본에 설정하여 이 양국가로 하여금 미육해군의 과잉시설품을 구입하도록 결정하였다 한다. 이 결정은 재무성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사령관 요청에 의하여 결정된 것인데 이에 의하면 조선에는 2,500만 불에 상당한 크레딧트가 설정될 것이라 한다.

그리고 양국은 이 크레딧트를 수출에서 획득한 불화로 반환하리라 하는데 조선에는 정부가 수립되지 않고 있는 만치 이 크레딧트로 구매되는 시설품은 일단 미 군정청이 구매하는 형식을 위하여 후일 조선정부수립 시에 이에 이양되리라 한다. 현재 구매할 수 있는 과잉시설품은 수송 도로건설 통신방면의 시설품이라 하며 이것은 다만 남조선에만 한하여 사용될 것이라 한다.

(<조선일보> 1946년 8월 10일자)


중국에 엄청난 금액의 운라 원조가 쏟아지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일본은 추축국이었기 때문에 운라 원조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은? 조선은 추축국이 아니라 피해국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분단 점령 상태를 이유로 운라 원조를 늦추고 있는 중에 일본과 같은 조건으로 원조 아닌 차관을 국제기구 아닌 미국에게 받게 한다는 것이다. 위 기사에서 미국에서도 재무성이 반대하는 것을 맥아더 요청으로 결정된 것이라 하는 데서 이 조치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다.


당연히 조선의 각계에서 반대가 쏟아져 나왔다. <서울신문>은 8월 11일자에 무역경제연구소의 비판적 견해를 인용한 기사를 내보냈고, <자유신문>은 8월 12일자 사설로 강경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러치 군정장관이 8월 14일 이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잉여물자의 구매가격이 “미국의 현행가격”의 3분의 1 이하임을 강조했다.


“정식 통지는 아직 받지 않았으나 대외청산위원회는 조선경제 유지 및 회복에 필요한 미국정부과잉재산 구입을 위하여 조선에 대하여 2천5백만 불의 크레디트를 제공하는 데 동의하였다 한다. 이 원금은 1952년 7월 1일에 시작하여 25등분하여서 반제될 것이며 이자는 1951년 7월 1일 연 2,66%의 율로 제1회 이자 지불 시에는 동일까지 적립하여 지불하게 된다. 이 제안에는 재조선미군정이 폐지될 때 그 당시에 남은 미지불 원금과 이자 지불의 책임을 조선임시정부에 이관함은 미국정부와 장래 조선정부 간 조약에 포함되도록 의정할 것이라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주의하여야 한다.

나는 여러 국가가 이 크레디트에 신입하였고 이 제안의 상환조건도 어느 타국의 그것보다도 더 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크레디트가 벌써 대여된 국가 중에는 벨기에·인도·타이·오스트리아·이탈리아가 있다. 이 제안에는 확실히 설명되지 않았으나 이 물자가격은 미국의 현행가격의 3분지1 이하일 것이므로 2천5백만 불의 차관으로 조선은 3배 이상량의 물자를 즉 대가 7천5백만 불 이상의 물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므로 이 크레디트에 의하여 조선은 광범위의 물자공급을 받을 수 있도록 될 것인데 기중에는 약품·외과기구·치과용품·병원 및 X광선기구와 같은 의료용품·의류·양화수선품·운수비품·트럭 기타 자동차부분품·타이어·건축기구·트랙터·도로수리차·전화 및 라디오기구·건축재료·전기기구 및 용품·공구·선박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제안의 조건 아래에서는 조선경제 유지 및 회복에 필요한 물자만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한 조선경제 유지 회복에 필요한 충분한 과잉물자가 없으면 2천5백만 불을 전부 소비하지 않아도 좋다. 대외청산위원회가 각국에서 과잉물자 처분을 속히 완료하고자 희망하므로 군정청은 이 제안을 수리 또는 거부함에 제한된 기간이 부여될 것이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6년 8월 15일자)


이 차관 문제에 대한 비판의 가장 큰 초점은 조선인의 정부가 수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남 지역의 미군정이 조선인 전체의 책임으로 남을 차관 조약을 맺을 수 있느냐 하는 데 있었다. 12일자 <자유신문> 사설은 과거 제국주의 침략의 “일면에 있어서 국내의 과잉상품의 판매를 편리하게 하며 타면에 있어서 이것을 자본으로 하여 그 나라의 산업을 통제하는 힘을 길러온 일거양득적 정책”을 떠올린다며 긴요하지 않은 물자가 들어올 것을 걱정할 뿐 아니라 설령 “구입되는 물자가 조선의 건설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조선 인민 전체의 의사와 전체의 입장에서 고려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요, 아지 못하는 사이에 이러한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불합리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하지 사령관이 8월 17일 아놀드 소장을 민주의원에 보내 이 차관의 지지를 요청한 것은 점령군이 차관 조약을 맺는 데 대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민주의원은 이 요청에 충실히 응했다.


이 언저리에서 눈에 띄는 것이 이승만의 움직임이다. 좌우합작 정국에서 비교적 잠잠히 지내던 그가 8월 12일에 차관 지지 담화를 발표한 데 이어 17일 민주의원 ‘통과’ 뒤에도 기자들에게 차관 지지 의사를 거듭 밝혔다.


“현재까지 각 외국은 미국의 원조를 안 받은 곳이 없다. 그런데 조선만이 아직 그 자본적 원조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장래 무슨 대상(對償)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전장에서 남은 물품을 세계 각국에 분배하는 것이므로 대상 문제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회에 많은 물품을 얻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군정청에서는 외국인이 조선에 투자하는 것을 방지하고 있으나 이것은 군정당국보다도 우리 한국인 각자가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 예를 들면 일정시대 조선 각지에서 일인이 상업권을 획득하고 있었으나 개성에서는 그들의 존재가 없었다.”

(<자유신문> 8월 13일자)


17일 민주의원에서 차관 설정을 통과시킨 후 이승만은 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없는 물품을 시가의 4분지1 염가로 구입하게 된 것은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그리고 상금껏 미국으로부터 혜택을 입지 못하였는데 금반 차관이 성립된 것은 경하할 바이며 이미 이 문제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놀드 소장에게 급속히 실현되기를 요청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8월 20일자)


차관 문제에 대한 사회민주당, 민전과 인민당의 비판 담화문 요지가 8월 20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되었다.


◊ 사회민주당: “미국에서 물자를 구입한다는 것에 대하여 원칙적으로는 찬성하는 바이나 구입물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이어야 한다. 민주의원은 군정청의 자문기관이요 조선민족이 승인하는 대표적 기구가 아니다. 민주의원이 승인하였다는 것은 월권행위다. 38선의 장벽을 그냥 두고 아무리 좋은 물자를 구입하더라도 그 혜택은 38이남의 인민에게 한하고 부담은 38이북의 동포도 공동책임을 져야하는 모순이 있다.”


◊ 민주주의민족전선: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대외무역차관 설정문제 등 국가흥망의 지대한 관계를 가진 문제가 군정의 일방적 결정으로 민주의원이 이것을 심의 가결하였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외국 독립자본에 예속화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식민지적 정책은 절대 반대하는 바이다.”


◊ 인민당: “차관이란 국가와 국가사이에 약정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잠정적 통치인 군정이 국가를 대표하여 차관설정을 행할 수 없는 것이며 차관에 의하여 수입될 물자가 국가적으로 유효하게 사용되지 못하고 간상 모리배에 이용되기 쉬운 것으로 이를 장래할 우리 정부가 승인할 리가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절대반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8월 20일 민주의원 함상훈 공보부장이 반박 담화를 발표했다.


“전일 본원에서 발표한 2천5백만 불 물자구입에 관하여 일부에서는 물의가 있는데,

첫째 물자구입을 독점자본주의의 착취라 하여 건설적 물자를 수입하는 것이 불가하다면 재해에 의한 파괴의 재건과 금후의 생산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 물자구입은 생산재의 구입이다. 북조선에서 소련으로부터 1억 원의 차관을 얻어 북조선농림은행을 설립한 것은 착취가 아니고 미국서 건설물자 2천5백만 불 구입을 착취라 함은 부당하다.

둘째 남조선에만 물자를 사용하고 북조선주민에게 부담을 시킨다하는데 남북통일 정부가 수립되면 그 물자는 북조선에도 균점하게 사용할지니 비난은 부당하다.

셋째 민주의원이 정부가 아닌데 전 조선인을 대표하여 물자를 구입한 것은 월권이라 하나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라도 시급한 건설을 요하는 금일 민족총의로서 된 본원이 하지중장의 자문에 의하여 이에 찬의를 표한 것은 하등 민족적 권한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21일자)


중국이 운라에서 받은 지원의 20분의 1 금액을 미군 잉여물자로, 그것도 원조가 아닌 차관으로 들여오는 일에 이승만은 왜 이렇게 좋아하는 것일까? 지금은 짐작만 해두자. 그것도 확인될 날이 있겠지.

Posted by 문천